코끼리는 없다 <제32회>
코끼리는 없다 <제3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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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7-11-27 09:48
  • 승인 2007.11.27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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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춥고 긴 여름(7)

“없소, 그 형님.”

‘뱀대가리’의 말투는 단호했다. 그는 숨길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투였다.

“없다니? 그럼 벌써 튀었단 말이요?”

‘불독’의 눈초리가 매섭게 빛났다. 그렇다면 어디로 튀었는지도 알고 있겠군. 미주알고주알 캐묻기 시작한 그의 말투는 어느새
심문하는 투로 바뀌어 있었다.

“괜히 ‘짱구’ 굴리지 말어, 이거.”

그는 이미 계산이 끝났다는 얼굴빛이었다. 바지에 걸린 멜빵을 한번 손가락으로 잡았다가 튕겼다.

‘뱀대가리’는 더 이상 참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이번 판에서 그는 되도록이면 방관자로 있고 싶었다. 그러니까 차 일만과 권 상사에게 닷새 동안 옥탑방을 내어주고 대접한 것은 사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있다가는 덤터기를 쓰는 것은 물론이고 까딱 잘못하면 그 소용돌이에 자신도 모르게 말려들 염려까지 있었던 것이었다.

“그 형님이 제 발로 찾아와서 잠시 쉬었다가 가시겠다는 데, 후배가 박절하게 거절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그렇더라도 이 뜨거운 복날에 뭐 빨아 먹을 게 있다고 여기까지 기신기신 찾아왔는지는 알아 봐야 하는 거 아니요?”

‘불독’은 잔뜩 독이 오른 눈초리로 ‘뱀대가리’를 쏘아보았다.

“‘영어’ 쓰지 마슈!”

그러나 ‘뱀대가리’는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았다. 아, ‘독립군’이 발 가는 대로 가지, 언제 방향 정하고 다닌답디까……. 그는 맞
받아 눈을 희번덕거리며 꼴답잖다는 투로 ‘불독’을 노려보았다.

“아니 그건 그렇고, 아무리 바쁜 걸음이더라도 남의 ‘나아바리’에 들어왔으면 먼저 인사부터 땡기는 게 우리들의 예의 아닙니까?”

쑥고개가 조그맣다고 우습게 봤다간 큰 코 다치지……. 그는 조금도 꿀릴 게 없다는 얼굴이었다. 사실, 그의 말은 옳았다. 아무리 난다 긴다 하는 ‘전국구’라고 하더라도 남의 구역에 들어갔을 때에는 그곳의 ‘지역구’에게 먼저 신고를 하는 게 이 바닥의 관례였던 것이다.

미안하게 됐시다……. ‘불독’도 그 말에는 결국 마지못한 듯 건성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는 차 일만의 행방에 대해서 추궁하는 것이 이곳에 내려온 목적이라는 것만큼은 잊지 않고 있었다. 다시 꼬치꼬치 묻기 시작했다.

“어디로 간 것은 나도 알 수가 없소. 언제 우리들이 ‘잠수’ 탈 때 누구에게 알려주고 갔습니까?”

“그래도 그 집에서 닷새를 묵었다면 뭔가 낌새 정도는 챘을 거 아니냐고요?”

“그건 그 형님 성질을 잘 모르고 하시는 말씀이외다.”

“하기야 나는 성질이 드럽다는 것밖에는 잘 모릅니다마는…….”

‘뱀대가리’는 또 풀썩, 웃었다. 누가 ‘깜씨’ 형님의 성질을 더럽다고 한단 말인가. 그래서 옛날부터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는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번엔 ‘까불이’가 다짐을 받듯 나섰다.

“그러니까 ‘깜씨’ 형님이 이곳에 계셨다는 것만큼은 확실한 거 아닙니까?”

“그러옴! 닷새 동안 잘 계시다가 떠났지.”

‘뱀대가리’는 선선히 머리를 주억거렸다.

그렇다면 이거 또 ‘뒷다마’를 때린 꼴이잖아! 이윽고 ‘불독’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영업을 시작하지 않은 ‘샤보이’ 클럽은 어둑했다. 실내에는 대형 선풍기가 연신 돌아가고 있는데도 퀴퀴한 곰팡내가 코끝을 맴돌고 있었다. ‘불독’이 잠시 통화를 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까불이’가 ‘뱀대가리’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형님, 당분간은 여기에서 움직이지 마세요.”

‘뱀대가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건 또 무슨 개뼈다귀 같은 소리인가……. 그는 ‘까불이’을 쏘아보았다.

“엄한 불똥이 형님한테 튈까봐서 그래요. 좋은 게 좋은 거 아닙니까.”

“그게 무슨 뜻이야?”

“요즘 ‘돼지’ 형님의 기분에 따라 수원의 일기예보가 매일 바뀌거든요.”

‘뱀대가리’는 비로소 얼굴의 힘살을 풀었다. 그러니까 ‘까불이’의 말은 ‘돼지’의 눈에 띠지 않도록 얼마 동안은 죽은 듯 엎드려 지내라는 것이었다.


# 이상한 해후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다. 어둠속에 몸을 숨긴 권 상사는 한참 동안 주변을 살펴보았다. 주변은 의외로 조용했다. 자동차의 불빛조차 뜸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지시한대로 집의 출입문은 열려 있었다.

“잘들 있었능겨?”

집안은 환했다. 그 환한 빛이 그에게는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그의 모습을 보자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의 아내와 염 은옥이 반색을 했다. ‘주여’란 말이 그녀들의 입술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찬밥 있능겨? 있으믄 열무김치에 비벼서 한 그릇 언능 내놔봐. 오랜만에 마누라 얼굴을 보니께 식욕이 마구 땡끼는구먼 이거.”

조금 전과 달리 권 상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는 웃음으로 그 반가움을 얼버무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 드러나는 반가운 기색은 숨길 수가 없었다.

얼마만인가. 그러나 그의 아내는 씩씩했다.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 지금이 몇 시인 줄이나 알고 있어요? 식사를 차리기 위해 곧장 주방으로 달려가면서도 그녀는 투덜거렸다.

그는 차 일만이 염 은옥에게 전해주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병원은 안양 쪽으로 정했다는 것과 출산한 뒤에는 곧장 조산원으로 옮겨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뒤에는 아이와 함께 강원도에 들어가 농사짓고 살자는 것 등을 그는 한 글자도 빠트리지 않고 그대로 말해주었다.

“그나저나 형수님 몸은 괜찮은거쥬?”

“그럼요.”

그렇지만 염 은옥은 그 사람과 왜 같이 오지 않았느냐고 묻지 않았다. 서운한 기색도 나타내지 않았다. 이미 함께 오지 못할 사정을 꿰뚫고 있었다.

“마누라를 너무 오래 버려두믄 안된다구 형님께서 하두 재촉해쌓는 통에 이번엔 지가 이렇게 헐레벌떡 달려온 거이지먼서두
다음엔…….”

그는 식은 밥을 입안에 가득 떠 넣으면서도 연신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의 아내가 곁에서 지청구를 늘어놓아도 그는 말문을 닫지 않았다. 다음에 실컷 볼 긋이니께 서분해 하지 마시라구 하셨시유. 그 말은 빈 말이 아니었다. 사실, 차 일만은 권 상사를 보내면서 염 은옥에게 꼭 그렇게 전해주라고 몇 번씩 당부했다. 그러니까 나중에 아주 많이 볼 수 있을 테니까 지금은 그때를 위해 잠시 참아두자는 게 그의 마음이었던 것이었다.

“꼭 전해, 알았지?”

“아, 알았시유.”

결국 차 일만은 권 상사가 눈살을 찌푸린 뒤에야 입을 닫았다.

누구나 사람은 자기 집을 갖기 원한다. 그 집에서 사람들은 편안한 쉼을 통해 세상이 준 상처를 치유 받고, 지친 심신을 회복하
며, 다음 날을 준비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만큼 집이란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 바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집도 틀린 데가 없었다. 그러나 ‘잠수’를 타야하는 경우에는 그렇지가 않았다. 집이란 오히려 상대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었으며, 때로는 집안에서 당하는 경우도 허다했던 것이다. 그래서 오랜만에 아내를 만날 수 있다는 일념으로 달려오기는 했으나 권 상사는 좌불안석이었다. 강
승길의 꿍꿍이속을 알 수 없어 더욱 불안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었다.

염 은옥은 거실 한쪽에 자신의 자리를 깔았다. 지금까지 두 사람이 함께 쓰던 안방은 부부를 위해 하루 내어준 것이었다.

권 상사와 그의 아내가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렸으나 그녀는 끝끝내 고집을 부렸다. 더부살이를 하고 있는 것만도 고마운 일인데 죽음을 불사하고 찾아온 남편과 갈라놓을 수는 없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아, 괜찮아요. 저는 오히려 은옥 씨와 함께 자곤 해서 그게 더 편해요.”

“아니에요. 오늘 하루만이라도 남편하고 같이 주무세요.”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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