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그는 한참동안 뜸을 들이다가 겨우 어눌하게 말했다.
“저도 지금 은옥 씨를 무척 보고 싶어요. 그렇지만 아직은 우리가 맘대로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아시죠?”
그녀는 말이 없었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도 묻지 않았다. 다시 수화기 저쪽에서는 긴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차 일만은 땀을 훔치며 부스 밖을 내다보았다. 눈이 부실 만큼 온통 하얀 색 천지인 거리는 땡볕에 뽀얗게 끓고 있었다. 죽은 도시처럼 거리에는 인적도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차 일만은 가까스로 용기를 내었다. “이번에 지방에 잠시 다녀와야 해요.” 그 말을 꺼내고 그는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벌써 몇 가피 째인지 몰랐다. 발밑에는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듣고도 그녀는 크게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얼마나요?”
“기한은 저도 알 수 없어요.”
이번엔 차 일만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수’란 언제나 기약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잠수’보다는 차라리 판사가 때려주는 대로 ‘학교’에서 ‘몇 바퀴 도는 게’ 훨씬 낫다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였다. 그것은 그나마 시한이 분명하지 않은가.
“그러나 한 가지는 꼭 약속할 게요.” 차 일만은 빠르게 덧붙였다. “은옥 씨가 아이를 낳을 때는 꼭 제가 그 자리에 함께 있을 게요.”
그때였다. 갑자기 수화기 안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귀를 바짝 대어야 들릴 정도로 아주 작은 소리였으나 차츰 그 소리는 흐느껴 우는 소리로 커졌다. 내가 또 말을 잘못했나. 차 일만은 당혹스러웠다. 그녀는 지금 양팔로 가슴을 감싸 안고 울
고 있을 것이었다. 그는 잔기침을 터트리며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이럴 때는 무슨 말을 꺼내야 하는 것일까.
한참동안 쉬지 않고 울던 그녀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알면 안 되나요?”
염 은옥의 음성에는 간절함이 섞여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에게도 그 사실을 밝힐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그녀를 위한 배려였다. 혹시라도 그녀가 알게 된다면 그 뒤부터는 더욱 피 말리는 기다림이 될 것이 분명한 까닭이었다.
차 일만이 한참 동안 대꾸가 없자 염 은옥이가 다시 울음기 묻은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일만 씨와 함께 살려면 먼저 기다리는 습관부터 길러야 한다던데, 그 말이 정말 맞네요.”
차 일만은 야단맞는 학생처럼 잠자코 그 말을 듣고 있었다. 권 상사의 아내가 귀뜸을 해주었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꼭 여자들만이 안고 살아가야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남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떠나간 여자가 혹시라도 돌아오지 않을까, 기다리며 그 숱한 밤을 술로 밝히던 심정을 여자들은 알까. 그는 다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때였다. 이쪽을 향해 헐레벌떡 뛰어오는 권 상사의 모습이 부스 창밖으로 보였다. 하얀 거리를 가로질러 달려오는 그의 얼굴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 서두르고 있는 걸음걸이였다. 그렇다면 일이 수상하게 돌아가고 있단 말인가. 차 일만은 자신도 모르게 온몸의 근육이 수축되었다. 그렇게 ‘칼침’을 맞았을 경우엔 대개 석 달 정도의 치료를 필요로 하였다. 그렇지만 봉합이 다행히 잘 되어 퇴원을 한다 하더라도 한 번 손상된 아킬레스건이란 제 기능을 되찾을
수 없는 것으로 그는 평생 목발이나 휠체어를 끌고 다니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혹간 재수 없게 생명을 잃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럴 경우는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출혈이 너무 심했다거나, 아니면 칼끝이 뼈 속까지 건드려 파상풍 같은 또 다른 치명적 증상을 유발할 경우였다. 그렇다면 이제는 그녀와의 통화도 곧 끝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아직도 뭔가 못한 말이 꼭 남아있는 것 같았다. 그녀도 그것을 어느새 감지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느닷없이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사랑해요.”
그녀는 혹시라도 차 일만이가 못 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때문인지 아주 분명하고 자신 있게, 보란 듯이 다시 한 번 더 또박또박 말했다. 하지만 차 일만은 그 말을 똑똑히 들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는 가슴 한 복판에 달군 인두가 닿은 것처럼 온몸이 화끈거렸다.
“저를 사랑하지 않으세요?”
그녀가 다시 한 번 확인하듯 말했다.
“사, 랑, 해, 요.”
비로소 차 일만은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것은 엉겁결에 내뱉은 말이었다. 얼굴이 붉어진 그는 쑥스러웠다. 생전 처음 해보는 고백이었다. 그러나 시원했다. 사랑해요, 정말 사랑해요, 사랑해요, 정말 장말 사랑해요……. 마치 막혔던 봇물이 터진 것 같았다. 뒤를 이어 그는 수화기에 대고 ‘사랑해요’란 말을 한꺼번에 십여 차례 쏟아내었다.
수화기 저쪽에서 비로소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소식쯤은 서로 알고 있어야 하는 거예요, 아셨죠?”
“알았어요. 자주 연락할 게요.”
차 일만은 그 말끝에도 ‘사랑해요’를 또 후렴처럼 연발했다.
“약속하실 수 있죠?”
“그럼요. 약속해요.”
“이제부터 일만 씨는 저에게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분이에요. 그러니까 어디에 계시든지 늘 몸 조심하셔야 해요.”
“명심하겠습니다.”
차 일만은 마치 꿈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양 옆으로 초록빛 숲이 우거진, 아름답고 고즈넉한 꿈길……. 그 속을 그는 그녀와 함께 손을 잡고 걷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제부터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새벽 창이 밝아올 때까지 우두커니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 같은 것은 자신에게 없을 것이었다.
“날마다 일만 씨를 위해 기도할 게요…….”
그는 이윽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사랑해요. 가슴이 뛰었다. 왠지 조금 전까지 자신을 누르고 있던 피로가 한꺼번에 사라진 느낌이었다.
# 뒷북을 치다
‘뱀대가리’는 떫은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 ‘샤보이’ 클럽 출입문을 밀고 들어섰다. 생면부지인 ‘불독’이 뜬금없이 사람을 통해 만나자는 전갈을 보내왔을 때 그는 이미 그가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 간파하고 있었다. 들어보나마나 그것은 ‘깜씨’의 행방을 캐기 위한 행차가 분명한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뱀대가리’가 수원 역전파 ‘까불이’의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자마자 ‘불독’은 인사도 나누기 전에 단도직입적으로 그것부터 묻기 시작했다.
“‘깜씨’ 아시죠?”
‘뱀대가리’는 잠시 대꾸를 미룬 채 그를 똑바로 건너다보았다. 마주 쏘아보는 눈빛이 번득이는 게 소문대로 성깔 하나는 제법 있어 보였다. 거기다가 다른 사람의 두 배 정도는 될 것 같은 큰 머리통은 자못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투덕투덕한 살집을 볼 때 민첩성에는 아무래도 문제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러지 마시고 서로 인사부터 땡기시죠, 형님들!”
‘까불이’의 설레발에 마지못해 머리를 숙이기는 했지만 ‘뱀대가리’는 여전히 입맛이 썼다. 이 짜식, 이거 족보도 모르는 놈 아니야? ‘깜씨’가 자기 친구야? 어따대구 ‘깜씨’래……. 그는 그의 말투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깜씨’가 이곳에다가 ‘아지트’를 차렸다는데?”
“‘아지트’는 무슨…….”
‘뱀대가리’는 풀썩, 웃고 말았다. 배알이 뒤틀렸다. 그러자 눈치 빠른 ‘까불이’가 다시 발라맞추며 거들고 나섰다.
“그러니까 이 형님께서는 지금 ‘깜씨’ 형님이 여기에 계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서 이렇게 부랴부랴 내려온 것이거든요.”
그가 말을 마치자 이번엔 ‘불독’이 말을 덧붙였다.
“‘돼지’ 형님이 특별히 찾고 계십니다, 시방.”
그는 잇대어 차 일만이 남의 애까지 배고 있는 여자한테 환장해서 강 승길이 특별히 밀어준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대타로 처리하기 위해 나선 ‘아이’들까지 ‘물먹였다’는 것과 ‘아삼육’이던 ‘빳다’를 휠체어에 앉혔다는 이야기까지 줄줄이 엮어냈다. 그의 말인즉, 그러므로 그는 반드시 징계를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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