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동안 늘 보아온 때문일까. 그 웃음이 오히려 정겹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래, 방향은 정하셨습니까?”
“아직은…….”
이럴 경우, 이런 질문과 대답이란 서로 하지 않는 게 이 바닥의 불문율이었다.
누가 감히 ‘잠수 타는 곳’을 묻고 가리켜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차 일만은 그것까지도 고깝게 여기지 않았다. 며칠 함께 지내는 사이에 그는 사람이란 외양만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뱀대가리’를 통해서 새삼 배운 탓이었다.
겉으로는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모지락스러운 얼굴이었으나 그의 내면에는 누구보다 더 따뜻하고 진한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이번 기회를 통해서 알게 되었던 것이었다.
아침상을 물리자 어느새 옥탑방 판넬 위로는 햇살이 하얗게 퍼지고 있었다. 날씨는 여전히 무더울 모양이었다. ‘무기’를 비롯한 짐을 모두 정리한 권 상사는 그러나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이었다.
대놓고 반박할 수는 없었으나, 뜨거운 여름날 어디로 또 가잔 말인가. 그는 갈 곳조차 결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꿈이라는 불확실한 것에 의해 무조건 떠나야 한다는 것과 적극적인 방법은 모색하지 않은 채 계속되는 이 ‘잠수’가 언제까지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등이 싫었다.
“형님, 이참에 우리가 멈첨 그 ‘돼지’를 잡으믄 으쩔까유?”
권 상사는 며칠 전에 이미 차 일만에 의해 묵살되었던 말을 디시 끄집어내었다. 지난번 ‘빳따’에게 칼침을 놓듯이 ‘짱구만 잘 굴린다면’ 못할 것도 없지 않느냐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차 일만은 여전히 그 생각에 변함이 없었다.
“지난번하고는 사람이 다르다고 했지, 내가! 강 승길은 우리가 그렇게 얕잡아 볼만큼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야.”
“그렇다믄 우리두 ‘아이’들을 모으믄 되지 않것시유?”
“전쟁을 한판 벌여 보자고?”
“못할 거이두 없지유. 이렇게 살바에는…….”
권 상사는 여전히 볼멘소리를 했다. 그는 어느새 그렇게 될 경우 우리 편에 설 수 있는 인물들을 손가락으로 꼽고 있었다. 하지만 차 일만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염 은옥과 내놓고 살림을 차려도 방해할 사람도 없을 터이고……. 그러나 차 일만이 판단할 때 그것은 아직 시기상조였다. 냉동된 고기를 풀기 위해서는 그 몸에 박힌 얼음을 찬물로 서서히 빼내야 하듯이 지금 가장 적절한 방법은 시간을 통해서 서슬 퍼런 그의 기운을 먼저 풀어놔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에 다시 기회를 엿보아야 한다는 게 그가 계획하고 있는 순서였다. 물론 그것이 언제 다 이루어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아직은 아니야.”
차 일만은 권 상사의 입을 막았다.
거리에서는 어느새 딸기코 영감의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지나가는 행인들을 향해 외쳐대는 그 영감의 목소리가 옥탑방까지 거침없이 올라왔다. 똑바로 살어, 이년들아. 가랑이 벌려서 돈 벌을래다가 가랑이 찢어지지 말구……. 그 영감의 소리가 들려오자 혹시라도 또 지난번처럼 자신의 상품과 다름없는 ‘여자’들과 시비가 벌어지는 것은 아닐까, ‘뱀대가리’는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차 일만은 강 승길을 다시 떠올렸다. 그가 그리고 있는 밑그림이란 뻔했다. 그러나 그 밑그림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그렇게 수월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정치망처럼 촘촘히 쳐놓은 그 밑그림에 들어가는 날이면 다시 살아나오기 힘들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 아닌가. 그는 강 승길의 ‘아이’들을 한 번 그려보았다. ‘누시깔’, ‘장군’, ‘딱부리’, ‘낡은이’, ‘제비’, ‘불독’……. 모두가 하나같이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자신과 손발을 맞추던 옛날의 그 ‘아이’들이 아니었다. 강 승길의 수족이 된 그들은 야차 같은 모습으로 자신을 잡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을 것이었다.
강 승길이 내건 사탕을 입에 넣기 위해 한 방이면 ‘골’로 갈 것 같은 무시무시한 ‘무기’들을 감추고 백방으로 뛰어다닐 것이었다.
휴우, 차 일만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디로 갈까. 그는 고개를 숙였다. 어디로 갔으면 좋겠다는 방향은 마음대로 그릴 수 있었지만 문제는 당사자들이었다.
그들이 자신을 반겨줄 지는 미지수가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강 승길의 그물이 사방에 쳐져 있는 판국에 잘못하면 그것이 빌미가 되어 오히려 역습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게 어려움이었다.
그는 문득 세상이 갑자기 좁다는 느낌이 들었다.
권 상사가 철제계단 입구에 쌓아놓은 짐은 많지 않았다.
텐트와 침낭 두어 개, 속옷가지들이 들어있는 크고 작은 배낭 세 개가 전부였다. 이게 다야? ‘뱀대가리’가 어이없다는 투로 말하면서 다시 풀썩, 웃었다. ‘도바리’까는 눔의 짐이 이만하믄 호강인겨……. 권 상사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연장’은?”
“침낭 속에다가 잘 말아 두었지유.”
“‘연장’은 항상 손이 닿는 곳에 두어야 한다는 거 알고 있지?”
“아무렴 지가 이 바닥 생활이 몇 년인디 안즉 그런 것두 모를까유?”
배낭을 어깨에 걸친 권 상사가 양손에 가방을 들며 웃었다. 철제계단을 내려오는 것은 ‘뱀대가리’가 앞장섰다. 계단을 다 내려온 차 일만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얼마 만에 밟아보는 땅인가. 약국, 전봇대, 정육점, 편의점, 해장국집, 그리고 이름도 생소한 클럽, 클럽들……. 그것은 옥탑방에서 내려다보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독립군’에게 악수를 청하지 않는 것은 이 세계의 예법이었다. 차 일만은 ‘뱀대가리’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뱀대가리’도 그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는 허리를 구십 도로 굽혔다. “생각나면 언제 오셔도 됩니다. 형님을 위해서 옥탑방은 늘 비워놓을게요.”
“고맙다, ‘뱀대가리’.”
두 사람은 큰 거리로 나왔다. 예상대로 더위가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물론 ‘잠수 타기’가 그렇게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이미 그들이 전국에 사발통문을 돌렸다면 ‘뛰어야 벼룩이라고’, 멀리 뛴다고 해도 걸려들 공산은 컸다. 하지만 차 일만은 앉아서 죽을 수는 없다는 심산으로 일단은 ‘잠수’를 타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더구나 이제는 염 은옥이가 있음으로 해서 그냥 당할 수만은 없는 것이었다.
“조금만 더 기다리고 계세요. 때가 되면 제가 뛰어갈 게요.”
차 일만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왜 나는 그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일까. 사실, 그는 지금까지 마음속에 감추어두었던 사랑을 이참에 고백하기 위해 다이얼을 돌렸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꺼내기가 왠지 그렇게 수월하지 않았다.
한 낮의 열기는 뜨거웠다. 뜨거운 땡볕에 말라버린 거리는 자동차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빳따’에게 ‘칼침’을 먹인 뒤 일단 안양 쪽으로 몸을 피한 차 일만은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더위와 함께 말 못하는 답답함으로 인해서 온몸이 어느새 후줄근하게 젖어 있었다. 동태를 파악한 뒤 뒤따라 달려오기로 약속한 권 상사의 모습은 아직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대화가 끊어졌다. 길게 한숨을 토해내는 염 은옥의 숨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들려왔다. 그러나 침묵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도 이젠 다 알아요. 들었어요. 일만 씨가 어떤 사람인지…….”
“실망하셨죠?”
“아니요.”
“그렇다면, 고맙습니다…….”
차 일만은 공연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녀 앞에 치부를 드러낸 채 벌거벗고 선 느낌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옛 것을 모두 잊고, 새로운 빛깔로 다시 태어나 깨끗한 몸으로 그녀 앞에 서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런 말씀이 어디 있어요? 일만 씨가 어디가 어때서요?”
그녀의 목소리는 그러나 그의 기우를 말끔히 걷어가 주었다. 언제 그랬느냐 싶게 다시 맑고 상냥하게 변해 있었다. 그녀가 말을 뱉어낼 적마다 어디선가 로드 우드의 달콤한 향기가 풍겨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차 일만은 그런 그녀를 특별히 위로해 줄 말이 떠오르지 않아 여전히 안타까웠다. 바보 고치는 약은 없다고,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사랑해요’란 말은 끝내 토설해낼 수가 없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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