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뒤 ‘제비’가 나섰다.
“그 짜식은 ‘떨새’와 ‘복만이’, ‘째보’와 친한데요.”
그러자 ‘누시깔’이 맞받았다.
“옛날엔 ‘주먹코’를 데리고 있지 않았습니까.”
강 승길은 머리를 끄덕거렸다. 비로소 길이 보이는 듯 했다. 먹이를 코앞에 던져줘야 물 줄 아는 그들이 밉살스러웠지만 그는 내색
을 하지 않은 채 다시 명령을 내렸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그 새끼들부터 잘 감시해. 그 주변에다 그물을 쳐두란 말이야. 쥐도 새도 모르게. 알겠어?”
그제야 ‘새끼오야지’들도 감을 잡은 모양이었다. ‘옙’하는 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강 승길은 막 일어서는 그들에게 다시 주의를 시키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늙은이가 버티고 있는 아파트나, 병원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거 알지?”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특히 병원 말이야. 한 번 속은 것으로 족해. 또 속아서는 안 되는 거 알지?” 그러니까 그는 가락동에 있는 병원뿐만 아니라 그 주변의 병원까지도 모두 감시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가 제거해야할 대상은 둘이야. 항상 머릿속에 박아둬. 알겠어?”
‘새끼오야지’들을 모두 내보낸 뒤 강 승길은 시계를 보았다. 11시 15분이었다. 김 국진 이사와 약속한 시간은 아직 45분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먼저 나가 기다릴 요량으로 채비를 서둘렀다.
그때였다. 휴대폰 벨이 울렸다. 발신번호는 ‘불독’으로 찍혀있었다. ‘빳따’ 대신 맡은 별동대 대장이었다. 무슨 일일까. 그는 급히 출입문을 다시 닫았다.
“형님, ‘깜씨’를 쑥고개에서 보았다는 ‘아이’가 있는데요.”
그는 목구멍에 가래가 낀 것 같은 탁한 음성으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강 승길은 온몸이 떨렸다.
“그 ‘아이’가 누구야? 믿을 수 있는 새끼야?”
“‘삐끼’지만, 그래도 확실하답니다.”
‘불독’은 여전히 조심스럽게 말했다. 강 승길은 맥이 풀렸다. 그렇다면 길거리의 ‘양아치’들 아닌가. 그러나 그는 미련을 그냥 버리기가 왠지 아까웠다.
“그렇다면 네가 직접 가서 확인해봐.”
이어서 그는 그곳에 가면 양놈들을 상대로 계집장사를 하는 ‘뱀대가리’가 있다는 것과 그가 그쪽 사정은 환히 꿰고 있다는 것, 그렇지만 자신과 별로 관계가 좋지 않으니까 조심해서 접근하라는 것 등을 비교적 상세히 일러주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까운 수
원 쪽에 항시 ‘아이’들을 대기시켜 놓을 테니까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콜’하라고 지시했다.
“실수하지 말고!”
폴더를 내리면서 강 승길은 얼굴 가득 회심의 미소를 띠었다. 김 국진 이사에게 비로소 큰 선물을 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 다시 길 위에 서다
왜 난데없이 어머니가 나타난 것일까. 차 일만은 희뿌옇게 밝아오는 새벽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넘기기에는 왠지 꺼림칙한 꿈이었다. 낭떠러지. 쫓아오는 강 승길을 피해 바닥이 보이지 않는, 도무지 뛰어내릴 수 없는 곳까지 몰린 그에게 어머니는 그대로 뛰어내리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아무리 꿈속이지만 그는 그때의 어머니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슬픈 얼굴빛이었다. 눈물을 흘리고 계셨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손짓만큼은 다급했다. 결국 그는 어머니의 손짓대로 그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렸다. 끝없는 추락. 그것은 ‘죽기’ 아니면 ‘살기’가 아니라, ‘죽기’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그러나 웬일일까. 순간, 그는 구름을 탄 것 같은 아늑함을 느꼈다.
그런데 왜 또 어머니의 모습이 나타났을까. 그는 머리를 한 차례 세게 흔들었다. 정작 자신이 보고 싶을 때는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안타깝게 하다가도 이렇듯 뜬금없이 나타나곤 하는 어머니……. 사실 그가 이런 경우를 겪은 적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문래동에서 부천 ‘아이’들에게 쫓기기 전날 밤에도 어머니는 어김없이 나타났으며, 인천 송도 사건으로 ‘짭새’들에게 잡히기 전에도 어머니는 한복을 곱게 입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렇듯 위급한 상황이 생길 때면 어머니는 난데없이 나타나곤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번엔 또 어떤 불길한 징조를 예시하는 것일까. 그는 비로소 자신의 등짝이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어. 차 일만은 머리맡에 놓인 담배갑을 끌어당겼다. 닷새라면 강 승길이 냄새를 맡을 수도 있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미적거리다가는 벼락을 맞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지체했을까. 그는 담배 한 대를 모두 태운 뒤 마침내 권 상사
를 흔들어 깨웠다.
“연장 챙겨. 아침 먹고 곧 떠날 테니까.”
권 상사는 그래도 금세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잠에서 덜 깬 눈을 씀벅거리며 불만스러운 어투로 같은 질문을 몇 차례 되풀이했다.
“떠난다구유? 대체 그거이 뭔 말씀이래유?”
그는 바깥이 잠잠해질 때까지 그냥 이 옥탑방에 눌러있으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차 일만이 꿈 이야기를 꺼내자 그는 곧 입을 다물었다. 비로소 자신의 힘으로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파악한 듯 했다.
“어므이께서 무어라구 말씀하시든가유?”
차 일만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다믄 아무 말씀두 아니 기셨는디 떠나자는게빈가바유?”
권 상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이미 명령은 떨어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연신 하품을 길게 빼어 물면서 어느새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째보’가 전해주었다는, 어제의 정보는 조금도 특별난 게 못되었다. 권 상사까지 그들에게 찍혔다는 것은 이미 예상했던 일로 새삼스러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천방지축으로 나댄 데 비하면 아무 탈이 없었던 게 그나마 다행인 셈이었다. 그렇지만 그 말을 정작 들었을 때 차 일만의 기분이 착잡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것은 바로 사형선고였던 것이었다. 그러나 권 상사는 오히려 장난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렇다믄 즈그덜이 이잔 나까정두 컸다구 인정하는 거이 아니것시유.”
하지만 차 일만은 그 말을 그냥 흘려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맘대로 바깥출입을 하지 말도록 해.”
“형님두……. 그러믄 바깥 소식은 누가 으쩌케 집어온데유?”
“말하면 들어. 알았어?”
차 일만의 눈꼬리가 날카롭게 치켜 올라갔다. 이제부터는 외출할 때 반드시 내 허락을 받도록 해. 차 일만이 잘라내듯 차갑게 명령
하자 비로소 권 상사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모양이었다. 그제서야 얼굴빛이 바뀌었다. 이에 대해서는 ‘뱀대가리’도 동조했다.
그렇지만 그것이 꼭 꿈을 꾸게 된 이유라고 볼 수는 없었다. 굳이 그런 정보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노출이란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이 바닥의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저자거리 같은 이곳에서 조심성 있게 행동하여야 한다는 것은 기본 상식이 아니겠는가.
날이 밝았다. 아침 밥상머리에서 권 상사로부터 이야기의 전말을 들은 ‘뱀대가리’는 갑자기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냐고 만류하고 나섰다. 곡 떠나야 한다면, 이틀만 더 있다가 가라는 것이었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대접다운 대접을 못했는데, 자신에게 그런 기회는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고집을 부렸다. 그러나 차 일만은 고개를 흔들었다. 떠나기로 작정한 이상,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래서 더욱이 번잡한 저녁 시간보다는 조용한 한낮을 택해 슬그머니 옥탑방을 내려가겠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신세 많이 졌어. 세월이 좋아지면 내가 이 신세는 꼭 갚을게.”
“신세는요, 무슨. 변변히 대접도 못해드렸는데…….”
“이만하면 덕분에 호강한 셈이야. 더운밥 찬밥 가릴 처지는 아니잖아, 지금 내가.”
누가 차 일만의 고집을 꺾을 수 있을까. ‘뱀대가리’는 차 일만을 쳐다보며 그 특유의 풀기 없는 웃음을 풀썩, 던졌다. 그러나 차 일
만은 벌레가 날아와 달라붙는 것 같았던 그 스믈거리는 웃음이 예전처럼 싫지만은 않았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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