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 마세요. 잘 계실 거예요.”
권 상사의 아내가 위로하고 나섰다. 하지만 그녀의 귀에는 그 말이 쉽게 들어오지 않았다.
“정말 그럴까요?”
“그럼요.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데요, 그 바닥에서 산전수전 죄다 겪으며 잔뼈가 굵은 분들이에요.”
권 상사의 아내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웃었다. 염 은옥은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출산일이 가까워오자 위로 솟아있던 배는 곧 쏟아져 내릴 듯 아래로 위태롭게 쳐져 있었다.
“혹시,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을까요?”
“그건 알아서 뭘 하시게요?”
“그래도…….”
물어보나마나 한 질문이었다. 그녀라고 그것을 알 수 있겠는가. 또 설혹 안다고 하더라도 달려가 도와줄 수도 없는 입장이 아닌가.
염 은옥은 마음이 아팠다. 그런 속에서도 뱃속의 아이는 갑갑한 모양이었다. 아무 때나 철없이 발길질을 해대어 그녀를 깜짝깜짝 놀라게 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그녀를 안심시키는 것은 그가 그날도 출산만큼은 꼭 곁에서 지켜주겠다고 약속한 것이었다.
권 상사의 아내가 다시 성경책을 들고 나왔다.
“그 사람들을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이란 이것밖에 없어요.”
그녀는 시편을 펼치면서 먼저 큰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던 그녀가 이번엔 무릎을 구부렸다. ‘하나님, 불쌍한 우리들을 궁휼히 여겨 주시사…….’ 그녀가 기도를 시작하자 염 은옥도 눈을 감았다. ‘어디에 있든지 그 사람을 지켜 주시고,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환란 가운데에서도 부르짖는 하나님이심을 저희가 믿사오니…….’
밤이 깊었다. 그러나 열대야의 열기는 자정이 가까이 되어도 식을 줄을 몰랐다. 후덥지근한 바람이 간간히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선풍기 바람을 쏘이며 두 사람은 식탁에 앉아 옥수수를 먹고 있었다. 밤늦은 시간에 먹으면 몸에 좋지 않다는 것도 잊은 채 염 은옥은 손바닥으로 훑으면 쌍으로 붙어 떨어지는 게 재미나 연신 훑고 있었다. 거리에는 그때까지도 행인들의 발걸음 소리가 잦았다.
“거기도 여기처럼 덥겠죠?”
“그럴 테죠. 이 좁은 땅덩어리에 어디 안 더운 데가 있겠어요.”
염 은옥이가 묻자 권 상사의 아내가 지나가는 말투로 대꾸했다. 역시 물어보나마나한 질문이었다. 그렇지만 염 은옥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문득 어딘가에서 땀 흘리고 있을 그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저는 걱정하지 않아요. 우리 그 사람은 ‘독립군’이니까
“독립군 이요?”
“지네들끼리는 그렇게들 불러요.”
권 상사의 아내는 빈 옥수수자루를 내려놓으며 얼굴 가득 활짝 웃었다. 그럴 때의 그녀는 정말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사는 사람처럼 아무 걱정이 없어 보였다.
그녀와 함께 생활하면서 염 은옥은 비로소 그 사람이 살아온 그 세계의 질서가 어떻다는 것을 대충 짐작 할 수 있었다. 그 세계란 개인의 자유와 권리보다는 조직을 위한 의무가 우선인 곳이었다. 조직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초개같이 버릴 줄 알아야 하는
것이 그곳의 윤리요 질서였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자신을 위해 ‘그 일’을 깨트려버린 그의 용기는 정말 대단한 것이었으며,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그가 늘 숨어 지내는 입장으로 내몰렸으며, 벼랑에 선 것같이 위태로워진 것은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질서를 깨뜨린 그의 모습이 언제 어디에서건 저들의 눈에 띈다면 단박 위험에 빠질 공산이 크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몰랐을 때는 몰랐지만 이제 그것을 알게 된 이상, 염 은옥은 걱정이 앞서서 밤잠이 오지 않았다.
옥수수를 씹던 염 은옥이가 다시 얼굴을 찡그리자 권 상사의 아내가 배를 훑어보며 확인하듯 물었다.
“이제 며칠 남았지요?”
“열흘…….”
“그럼 곧 입원해야 할 터인데, 그분이 알고 계세요?”
“오신다고는 했지만…….”
염 은옥은 어눌하게 대꾸했다. 언약은 했지만, 꼭 오리라는 보장은 자신이 판단해 보아도 믿음성이 떨어졌다. 그렇다면……. 그녀는 그것도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병원은?”
“그것도 그 분이…….”
이번에도 염 은옥의 대답은 분명치가 않았다. “지난번에는 가락동에 있는 산부인과에 갔었는데…….” 그 소리를 듣자 권 상사의 아내가 다시 소리 내어 웃었다.
“그렇다면 더군다나 꼭 오시겠네요.”
다시 새 옥수수를 집어든 권 상사의 아내가 껍질을 벗기면서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못 오시더라도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곁에서 도와드릴 게요.”
“고마워요.” 염 은옥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가 늘 곁에 있다는 것은 큰 위안이었다. 물론 그것도 그가 배려한 것이었지만.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그의 음성은 확신에 차 있었다. 더위를 타지 않는 사람처럼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이제 과거는 모두 잊기로 해요, 우리. 납덩어리처럼 우리 마음 가운데 가라앉아 떠나지 않던 과거를 이제는 모두 잊기로 해요. 지금 제가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사실은 모두 그것을 위한 작업이에요. 그는, 그녀가 “덥죠?”라고 물었을 때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그동안 마음속에 쌓아두고 있던 말을 비로소 뱉어내기 시작하였다. 고생스럽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이쯤은 우리가 살아갈 미래에 비한다면 아주 짧은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며 참고 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그러니까, 아셨죠? 지금은 울고 싶어도 울지 마세요.” 그녀가 고맙다고 하자, 그는 또 수화기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아니에요. 사랑 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한테, 사랑할 자격을 주시고, 그리고 미래까지 주신 분이 누구신데요. 저는 평생 여자의 사랑 같은 거 받지 못할 줄 알았거든요. 고마워요. 이렇게 고백하는 게 좀 우습지만, 저는 은옥 씨를 평생 내 마지막 여자로 알고 사랑할 거예요.
그녀는 울지 않았다. 그의 말에 오히려 기운이 솟았다. 몸조심 하세요. 그녀가 말하자 그는 속삭이듯 낮은 음성으로, ‘사랑해요’란 말을 되풀이했다.
권 상사의 아내가 자리를 거실로 끌고 나오는 것을 보며 염 은옥은 일어났다. 시계 바늘은 어느새 새벽을 향해 돌아가고 있었다.
# 작전 개시
강 승길은 아침부터 바빴다. 김 국진 이사로부터 호된 질책과 함께 골프장 공사 수주에 관한 점심 미팅을 정오에 갖자는 제의를 받았으며, 부산과 전주, 춘천 등지에 나갔던 ‘아이’들로부터 보고가 잇달아 쇄도한 탓이었다. 골프장 공사는 ‘그 일’의 실패로 아주 ‘물 건너’ 갈 뻔 했는데, 그래도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진 탓에 불씨를 되살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으나, ‘새끼오야지’들은 아직까지도 이렇다할만한 단서 하나를 찾지 못해 그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예상했던 춘천 ‘뺑기’ 주변을 며칠씩 잠복시켰으나 그것도 헛수고인 것을 보면 ‘깜씨’가 자신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아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더욱 울화를 치밀게 했다.
그는 ‘새끼오야지’들을 쥐 잡듯이 몰아세웠다.
“벌써 며칠 째야! 닷새면 일본 밀항도 끝냈을 시간이야. 알아?”
‘새끼오야지’들은 묵묵부답이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건 머리를 숙인 채 눈길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사발통문을 몇 차례씩이나 돌렸지만 지방에서도 종무식이었다. 다급해진 강 승길이 먼저 전화를 걸어보았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아바리’를 이 잡듯이 뒤지고 다녔지만, ‘깜씨’는커녕 그놈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권 상사 그놈의 동태는 어때?”
“그놈도 도통 코빼기를 볼 수가 없습니다.”
“안되면 그놈부터 잡아. 그놈이 ‘깜씨’의 손발이라는 것은 알고 있잖아!”
강 승길은 권 상사를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그놈이라면 이쪽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서 이따금 모습을 보일 게 분명하였으며,
두더지 같은 그놈을 잡는다면 아직까지 ‘찢어지지’ 않고 있을 ‘깜씨’의 거처쯤 찾아내는 건 시간문제라는 생각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