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10월 어느 날, 러시아 남부 지역의 로스토프 시(市). 돈강이 유유히 흐르는 강변의 철로를 한 소녀가 느릿느릿 걷고 있었다. 밤이었다. 강변은 안개가 자욱했다. 한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욱한 안개가 낀 강변을 소녀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자주 뒤를 돌아보며 느리게 걷고 있었다. 로스토프 역에서 만난 남자, 바바리코트를 입고 머리가 약간 벗겨지고 안경을
낀 사내가 사람 좋게 웃으며 하던 말이 다시 뇌리를 파고들었다.
“강변 쪽으로 철로를 따라 가다가 기다려. 내가 금방 뒤따라갈게.”
사내의 목소리는 이웃집 아저씨처럼 부드러웠다. 게다가 그는 옷차림도 좋아 훌륭한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보였다.
18세의 토오냐는 사내를 쳐다보았다. ‘이 사내는 내 몸을 여관에서 원하는 것이 아니라 강변이나 숲에서 원하는 모양이로구나.
하필이면 안개가 짙은 밤에 강변에서 그 짓을 하려는 까닭이 뭐람? 그래, 여관 같은 곳은 드나들기가 싫은 거야. 잘못하면 공안원들에게 잡혀서 수용소로 끌려갈지 모르니까.’ 토오냐는 중년 사내를 쳐다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스커트를 벗고 몸을 파는 것은 어디라도 상관이 없었다. 이미 지난여름에도 숲에서 몸을 팔고는 했었다.
토오냐는 우크라이나 계의 백인 처녀로 알코올중독자인 아버지와 병든 어머니, 그리고 동생들과 살고 있었다. 생활 전선에 뛰어들 나이는 아니었으나 무슨 짓을 해서든지 먹고살지 않으면 안되었다. 토오냐가 로스토프 역주변에서 매춘을 하게 된 것은 오로지 생활고 때문이었다.
토오냐는 사내를 기다렸다. 로스토프 역에서 불과 5백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지점이었다. 철도변 바로 옆으로 돈강이 우쭐렁대고 흘러가고 있었다. 자욱한 안개 때문에 물결은 보이지 않았으나 강 파도소리가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들리고 있었다.
토오냐는 어깨를 움츠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10월인데도 날씨는 벌써 초겨울 날씨처럼 쌀쌀했다.
로스토프 시가 시베리아 남부지방이기는 하지만 여름에 가장 더울 때가 영상 23도, 겨울에는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비교적 추운 지방이었다. 그러나 토오냐가 몸을 떤 것은 추위 때문이 아니라 안개 자욱한 밤의 공포 때문이었다.
공포는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축축한 안개가 내리는 철도변에서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괴물이 살고 있는 것같은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그냥 돌아갈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집에는 빵과 채소가 완전히 떨어져 있었다. 사내는 매춘의 대가로 상당한 액수를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정도라면 일주일 먹을 정도의 빵을 살 수 있을 것이고 알코올중독자인 아버지에게 보드카도 몇 병 사줄 수 있을 것이다.
토오냐는 팔짱을 끼고 안개와 추위 속에서 몸을 떨면서 중년 사내를 기다렸다.
빨리 사내가 나타나고 철로변이든지 숲속이든지 그를 위해 스커트를 걷어 올리고 서둘러 일을 끝냈으면 싶었다.
저벅저벅. 발자국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철로 위의 자갈을 밟으며 오는 소리였다. 발자국소리 탓일까. 토오냐는 가슴이 세차게 뛰는 것을 느꼈다. 이상하게 뒷덜미가 서늘해지면서 소름이 돋았다. 토오냐는 발자국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안개 속에서 바바리코트를 입은 사내가 걸어오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토오냐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내는 점점 가까이 오고 있었다. 토오냐는 가까이 오는 사내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숲으로 가지.”
사내가 토오냐의 어깨를 움켜쥐며 말했다. 약간 쉰 듯한 목소리였다. 토오냐는 강과 반대편의 삼림지대로 걸어 들어갔다. 안개가 자욱해서 걸음을 떼어놓는 것이 수월하지 않았으나 가능하면 빨리 일을 끝내고 싶었다.
숲은 안개에 젖어서 축축했다. 철도변에서 50미터를 걸어 들어간 토오냐는 걸음을 멈췄다. 철도변에서 불과 50미터도 들어오지 않았는데도 침엽수들이 빽빽했다. 낙엽송이다. 안개가 끼지 않은 날이면 노랗게 물든 낙엽송이 무척 아름다우리라고 생각했다. 사내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안개 때문에 사내의 얼굴이 확실하게 드러나 보이지 않았다.
“저… 돈을 먼저 주셨으면 해요.”
토오냐가 말했다. 화대를 먼저 받는 것은 기본이었다. 사내가 들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고 지퍼를 열기 시작했다. 그녀도 돌아서서 팬티를 무릎 밑으로 끌어내리고 스커트를 벗을 준비를 했다.
‘아!’
다음 순간 토오냐는 자신도 모르게 낮게 신음을 삼켰다. 사내는 가방에서 망치를 꺼내 들고 있었다.
로스토프 역에서 매춘을 하는 어린 소녀 토오냐의 시체가 발견된 것은 사흘 뒤의 일이었다. 토오냐의 시체는 참혹했다.
머리는 둔탁한 둔기에 맞아 좌측 두부(頭部)가 함몰되어 피가 흘러내리다가 말라붙어 있었고, 옷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였다. 누군가 완전하게 벗겨놓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엽기적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토오냐의 알몸 여기저기가 난도질되어 있었고 살덩어리가 베어져 나간 곳도 있었다. 구소련 경찰은 토오냐의 시체를 보고 경악했다. 그들은 재빨리 수사에 착수했으나 공산당 지배하의 경찰이라 그토록 민첩하지도 않고 수사에 성의도 없었다. 게다가 수사를 하는 도중에 토오냐가 매춘부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수사는 더욱 하는 둥 마는 둥했다.
로스토프 시에서는 비슷한 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살인마에게 희생된 자들은 대부분 젊은 여자들이거나 어린소년들이었다.
희생자들은 안개 자욱한 습지나 삼림지대에서 살인마를 만나 성폭행을 당하고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살인마는 희생자들을 고문하고 살해했는데 사지를 절단하고 인육을 먹은 흔적까지 있었다.
그러나 구소련 당국은 연쇄살인은 서방 세계에서나 있는 일이지 소련에서는 그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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