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뒤 ‘뱀대가리’가 담배와 캔 맥주 대여섯 개를 들고 올라왔다. 식사는 권 상사가 돌아오면 같이 하자는 것을 보면 그도 권 상사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오늘도 꽤 더웠죠?”
“찜통이구만.”
차 일만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오늘 장사는 좀 어때?”
차 일만이 지나가는 말투로 묻자 ‘뱀대가리’는 또 풀썩 웃었다.
“씨바, 오늘은 일찌감치 종쳐버렸어요. 비상이 걸렸다나 뭐라나.”
“그럼 아주 공치는 거야?”
“그럼요. 모두 ‘열중 쉬엇’이에요.”
“이 장사도 그런 데가 있었군. 난 그냥 누워서 차려놓은 밥상을 배 두들겨가며 먹는 장사인줄만 알았는데…….”
“그렇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오늘밤은 기집들 밑구멍 청소도 못하게 생겼으니, 이거야, 원.”
정말 성질이 앞을 가립니다. 캔 맥주를 따서 차 일만에게 건넨 ‘뱀대가리’는 그러나 걱정이 없다는 투였다. 지네들이 그런다고 해서 내 입에 거미줄이야 치겠어요, 형님? 그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허공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이 차갑게 번득였다.
# 개밥그릇
김 국진 이사는 할 말을 잃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의 정수리를 향해 황 회장의 성난 목소리가 계속해서 화실처럼 날아왔다.
“도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한 거야?”
황 회장은 그날따라 그가 한없이 무능해 보였다. 자신의 밑에서 십여 년이 넘도록 밥 먹으면서 그가 속 시원하게 처리한 일이 도대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염 은옥의 일만 해도 그랬다. 지시를 내린 게 도대체 언제인데 아직까지 처리를 못하고 이런 보고를 올린단 말인가. 요즘 들어 가뜩이나 경쟁이 심해진 공천 문제로 노심초사하고 있던 황 회장에게 그가 보고한 내용이란 자칫 잘못하면 불안의 씨앗이 현실로 발아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김 이사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일의 책임을 면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황 회장의 역정을 들으면서 그는 곰곰이 따져보았다. 도대체 ‘그 일’은 어디에서부터 잘못 꼬인 것일까.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어눌하게 변명을 늘어놓던 강 승길의 비습한 얼굴이 떠올랐다.
“당신, 바보 아니야? 책상머리에 앉아서 일만 잘하면 뭐해!”
황 회장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을 기세였다.
“당신, 나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몇 번 말했지?”
“…….”
“입이 있으면 어디 말 좀 해봐!”
그때 마침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다면 김 국진 이사는 쉴 틈도 없이 더 많은 시간을 황 회장으로부터 시달렸을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박 의원이 수호천사의 노릇을 한 셈이었다. 수화기를 통해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황 회장은 언제 그랬느냐 싶게 음성이 바뀌었다. 네에, 네에, 그럼요, 그 점에 대해서는 아무 걱정 마십시오. 제가 모두 감당하겠습니다. 네에, 네에…….
김 이사는 한숨 돌린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전화기를 내려놓자마자 다시 원래의 얼굴로 돌아온 그는 닦달을 멈추지 않았다.
“몇 달 동안 당신이 한 일이 도대체 뭐야?”
김 이사는 후회막급이었다. 빌어먹을, 상무 자리가 뭐라고…….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할 수 있는 말이란 기껏 해봤자 ‘그 일’에 대한 전말을 다시 한 번 앵무새처럼 반복해서 보고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니까 일이 공교롭게 되느라고…….”
그는 강 승길이 이야기를 해준 대로, ‘그 일’을 맡았던 ‘빳따’라는 수하가 오히려 역습을 당해 휠체어를 타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으로부터 그 여자와 그 사내가 한통속이 되어 어디로 잠적했다는 것까지, 사실대로 말했다. 그리고 모두가 그 여자의 행방을 좇고 있으므로 아직 ‘그 일’이 완전히 실패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사족을 달았다. 하지만 황 회장은 그전처럼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았다. ‘그 일’의 실패는 차치하고, 이번엔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느냐는, 과정을 놓고 그는 신랄하게 물고 늘어졌다.
“사람이 일을 도모하다가 실패할 수는 있어. 나도 그건 알아. 그러나 왜 졌는지는 알아야 할 거 아닌가 말이야!”
그는 김 이사를 향해 눈을 칩뜨고 따져 물었다.
# 사막을 건너가기 위하여
“우리두 시방부텀은 힘을 모아야 하것시유. 그래서 저것들과 한바탕 붙어보는 거여유. 그거이 최상의 방법이래니께유.”
권 상사는 빈 캔을 쓰레기통으로 던졌다.
그가 나들이에서 물고 온 정보란 날씨만큼이나 기분을 후덥지근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강 승길의 발광이 극에 달해 있다는 것과 그에 동조하는 무리들이 날이 갈수록 합세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짐작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러나 권 상사의 입을 통해 그 모든 것이 사실로 드러나자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전율을 느끼게 했다. 더구나 ‘후리가리’ 식으로 애들까지 풀어 전국을 ‘싹쓰리’할 요량을 하고 있다는 데에는 오금이 저릴 수밖에 없었다. 권 상사의 말에 의하면, ‘떡새’도 ‘복만이’도 그들에게 찍힌 관계로, 이미 ‘청계천 걸레’ 신세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차 일만은 그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에 대처할만한 특별한 방법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그는 자신에게 족쇄를 채우려는 강 승길의 행동이 어쩌면 생각보다 더 길어질지도 모르겠다는 것과 이제는 권 상사의 외출도 안심할 수 없다는 것이 걱정되었다.
“피하기만 한다구 모든 거이 다 해결되는 거이 아니쟎유, 형님. 그러니께 이참에 우리두 힘을 모아서 한 번 ‘박 터지게’ 붙어뿐지자구유. 아, 지덜이라구 뭐 모가지가 두 개썩 붙어 있는 것두 아닐 터이구. 어이, ‘뱀대가리’, 안그려?”
더위 탓일까, 권 상사는 벌써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우리 편이 될 수 있는 ‘아이들’을 셈하는 양 손가락을 놀리는 모양이 매가리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차 일만의 생각은 달랐다. 힘을 모아 정면으로 붙어보자는 것은 자멸을 의미했다. 또 설혹 백의 하나, 거기에서 승리를 얻는다고 하더라도 입은 상처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클 것이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이제 그들이 노리는 주요 대상이 염 은옥에게서 자신에게 돌려졌다는 것은 천만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뱀대가리’는 권 상사가 자꾸만 권하였으나 그를 거들고 나서지 않았다. 그럴 적마다 그는 오히려 차 일만을 지지하는 듯 한발 물러앉곤 하였다.
“방법은 여러 가지야. 이제 사흘밖에 안됐어. 좀 더 시간을 가지고 ‘짱구’를 굴려보자고. 설마하니 살 방도가 없겠어? 제갈량 같은 ‘깜씨’ 형님이 계시는데.”
‘뱀대가리’가 입맛을 다시면서 차 일만을 건너다보았다.
옥탑방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거리는 어느새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맥주 세병에 안주 하나, 기본 일만 오천 원에 아가씨는 무조건 공짜! ‘삐기’들이 외치는 호객소리가 옥탑방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짜아식들, 양키 애들이 뜨지 않으니까, 이젠 국산이라도 좋다 이거로군.”
‘뱀대가리’가 또 풀썩, 웃었다. 차 일만의 귀에는 그 소리가 마치 타이어에서 바람이 빠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사막이란 무작정 건너갈 수 없는 곳이다. 자칫 무모하게 행동하였다가는 목적지에 도착하지도 못한 채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뜨겁게 내려쬐이는 태양열. 예고 없이 불어 닥치는 모래바람. 그것들을 이기기 위한 힘과 지혜는 물론 끝없이 펼쳐진 모래 언덕을 헤매지 않고 건너갈 수 있는 낙타와 같은 혜안도 필요했다. 차 일만은 다시 캔 맥주를 마시면서 그 방법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었다.
# 식물성
어디에서 전화를 하는 것일까.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염 은옥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말을 해주지 않아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투로 짐작할 때 매우 곤경에 처해 있는 것만큼은 확실하였다. 그렇다고 꼬치꼬치 물을 수도 없는 일이어서 그녀는 그날도 몇 번이고 ‘몸조심 하세요’를 연발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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