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은 일단 잔느를 기소했다. 예심재판이 벌어지기 전에 로베르라는 변호사가 잔느의 변호를 맡았다. 변호사와 의사는 희생자인 아기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부검하기 시작했다. 부검의는 프랑스의 저명한 의사인 토와노 박사였다. 토와노 박사는 세 구의 시체에서 교살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아무리 어린 아기라고 해도 교살을 하면 설골(舌骨)이 부러지게 되어 있는데 전혀 그런 상처가 없었다. 잔느는 결국 무죄로 석방되었다.
1907년 잔느는 바우제라는 남자의 가정부로 들어갔다 그 집은 매우 가난했으나 남자와 세 아이가 살고 있었다. 한 아이는 언챙이었다. 어느 날 바우제의 아들 오규스트가 몸이 좋지 않았다. 바우제는 아들이 과식을 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오규스트의 여동생 루이즈는 의사를 찾아가서 오빠가 아프다고 말했다.
의사는 위장약을 처방하고 루이즈를 돌려보냈다.
오규스트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못한 채 점점 악화되어 갔다.
바우제는 마침내 자신이 직접 가서 의사를 데리고 왔다. 그러나 의사가 도착했을 때 오규스트는 이미 죽어 있었다. 의사는 목에 붉은 반점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사망진단서를 발급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검시관은 의사와 달리 오규스트의 목에 있는 반점이 뇌막염이라고 판단했다.
오규스트의 누이인 언챙이 제르느는 잔느를 고소했다. 예심판사도 잔느가 수상하다고 생각하여 검시명령을 내렸다. 예심판사의 검시 명령이 떨어지자 새로운 의사가 오규스트의 유해를 발굴한 뒤에 검시를 했는데 그는 지혈대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는 진단을 했다. 잔느는 체포되었고 파리는 경악했다.
첫 번째 재판에서 잔느를 무죄로 만든 로베르 변호사와 의사 토와노 박사는 당황했다. 잔느가 연쇄살인범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그들은 직업적으로 엄청난 타격을 받게 되는 것이다. 변호사는 잔느를 무료로 변호하면서 부검을 요구했다. 부검에는 토와노 박사가 참여했는데 시체는 이미 부패하여 사망 원인을 전혀 판단할 수 없는 상태였는데 그는 엉뚱하게 간헐열에 의한 자연사라고 진단했다.
잔느는 무죄로 석방되었다. 잔느는 석방되자 갈 곳이 없었다.
잔느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매춘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잔느는 여러 곳을 방랑하면서 매춘을 하다가 아동보호협회 회장인 조르주에 의해 ‘천사의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맡게 되었다.
조르주는 잔느를 사회적인 편견에서 보호하여 훌륭한 일자리를 제공했다는 명성을 얻으려고 했다. 그러나 잔느는 천사의 집에서 한 이이의 목을 조르는 것이 발견되어 쫓겨나고 말았다. 아동보호협회의 조르주 회장은 자신의 실책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이 일을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얼마 후 잔느는 채석장의 인부와 동거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돈이 없어서 허름한 여관에서 생활했다. 잔느는 여관 주인에게 남편이 술에 취해 돌아오면 자신을 때린다고 하면서 그럴 때에 여관 주인의 7세 된 아들 방에서 자게 해달라고 말했다. 여관 주인은 쾌히 허락했다. 어느 날밤 10시, 여관 주인은 아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아들의 방으로 달려갔다. 아들은 이미 죽어 있었는데 입에서 피거품을 내뿜고 있었다. 잔느의 손도 피투성이였다. 의사는 여관 주인의 아들이 목이 졸릴 때 고통 때문에 혀를 깨물어 피가 나왔다고 말했다.
잔느는 체포되었다. 잔느는 현장에서 체포되었기 때문에 살인 혐의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로베르 변호사는 엉뚱하게 살인혐의로 몰린 잔느가 심신 소모로 정신 이상을 일으켜 저지른 것이라고 말했다. 파리의 신문들은 로베르 변호사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토와노 박사는 이번에는 잔느가 정신병자라고 진단했다. 잔느는 그 바람에 재판도 받지 않고 태평양 한 가운데에 있는 프랑스령의 작은 섬으로 보내졌다. 그 곳은 중증의 정신질환자를 수용하는 정신병원이었다.
그녀는 2년 후에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했다.
최악의 어린이 연쇄살인사건
살인은 살인자보다 연약한 대상을 상대로 발생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래서 여성들이나 힘이 없는 어린이들이 범행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1999년 10월29일, 콜롬비아 국민들은 텔레비전 전파를 타고 방송되는 속보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알폰스 고메르 검찰총장은 전 국민이 텔레비전을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어린이 성폭행 사건으로 구속되어 있는 루이스 에두아르 가리비토가 콜롬비아 전국을 돌아다니며 어린이 140명을 살해했다고 발표했던 것이다.
콜롬비아 국민들은 경악했다. 가리비토에게 살해된 희생자들은 대부분 8세에서 16세까지의 어린이들이나 소년들이었다. 또한 1994년부터 5년 동안 콜롬비아 전국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어린이 연쇄살인사건이 해결되었다는데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가리비토는 애인이 있는 42세의 건장한 사내로 콜롬비아 수십 개 마을을 배회했고 그 중 60개 마을에서 가리비토가 출현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가리비토가 나타났던 마을에서는 어린이들이 실종되거나 살해되었다.
콜롬비아 경찰은 1994년 커피 생산 지역인 페레이라에서 실종된 어린이 36명이 모두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면서 본격적인 수
사에 착수했었다. 어린이들의 실종 사건은 콜롬비아 전국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페레이라 지역에 인접한 툰하, 아르메니아 일대에서도 실종 신고가 잇달아 접수되었다.
콜롬비아 경찰은 대대적인 수사에 착수했다. 어린이 대량 살인이라는 미증유의 사건이 발생하면서 콜롬비아는 공포에 떨었다.
국민들은 경찰의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그 결과 95명의 용의자가 수사선상에 떠올랐다. 가리비토도 95명중에 끼어 있었다. 경찰은 95명의 용의자를 낱낱이 조사했다. 경찰의 치밀한 조사 끝에 용의자들은 3명으로 압축되었다. 가리비토도 물론 3명의 용의자 중에 들어 있었다. 경찰은 마침내 가리비토가 툰하 지역 어린이 실종 사건에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집중적으로 추궁했다. 가리비토는 자신이 콜롬비아 어린이 연쇄살인사건 범인이라는 사실을 자백했다.
고메르 검찰총장의 발표는 콜롬비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국민들은 분노하여 희생자의 가족들과 함께 가리비토를 사형에 처
하라고 시위를 벌였다. 가리비토에게 희생되어 매장된 어린이들의 시체도 속속 발굴되었다.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서 그 모습을 지켜본 국민들 중에는 실신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가리비토는 결손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경찰 조사 결과 그는 어린 시절 성폭행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으나 애인까지 있었다. 애인의 집에는 연쇄살인에 대한 신문기사와 여러 가지 증거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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