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는 없다 <제26회>
코끼리는 없다 <제2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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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7-10-15 16:22
  • 승인 2007.10.15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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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춥고 긴 여름(3)

“내 말 알아듣겠냐?”

강 승길은 다시 좌중을 한 차례 훑어보았다. 이때였다. ‘땅꼬마’가 나섰다.

“소재는 확인이 되었습니까?”

강 승길은 대꾸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면?”

“벌써 ‘잠수’를 탔겠지.”

이번엔 ‘누시깔’이 말을 받았다. 그 말에 동의하듯 ‘새끼오야지’들은 모두 머리를 주억거렸다. ‘깜씨’가 얼마나 용의주도한 인물인가. 그들은 누구보다 그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빳따’를 잡기 위해 오래 전부터 비밀리에 그물망을 치고 준비해왔던 것처럼 이번 ‘잠수’에 대해서도 이미 계획을 철저히 세워놓았을 터이었다. 그리고 지금쯤은 벌써 그림자까지 감추었을 것이었다.

강 승길도 그것을 이미 감지하고 있었다.

“그 뺀돌이 같은 놈이 어디로 숨었는지 짐작 가는 데 없어?”

“…….”

“찾아봐, 죽치고 앉아 있지 말고. 알겠어?”

“그물은 쳐 놓았습니까?”

‘제비’가 물었다.

“그걸 말이라고 해!”

강 승길이 다시 역정을 내었다.

“이건 전쟁이야. ‘똘마니’들을 모두 풀어서라도 찾아내. 이 잡듯이 뒤져.”

“…….”

“그래서 방금 각 지방 ‘오야지’한테까지 협조를 구한 거 아니겠어?”

강 승길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낮술이라도 걸친 듯 벌겋게 충혈 된 눈으로 ‘제비’를 쏘아보았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누구 한 사람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결론은 지구전이었다. 피를 말리는 싸움……. 그들은 ‘깜씨’를 잡는 데에는 동의하면서도, 그 일은 하루 이틀에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시간이 약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칫 ‘깜씨’의 계산에 휘말릴 공산도 없지 않은 것이었다.

“그물이라면……”

역시 ‘땅꼬마’였다. 그가 빠르게 물었다.

“그 계집의 어미가 사는 아파트를 감시하고 있어. 또 그 년이 갈만한 병원도 확보해놓았고…….”

강 승길은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새끼오야지’들은 그쯤 이야기를 듣고도 벌써 전체를 파악하고 있었다. 이것이 전쟁이라면 그 정도를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깜씨’였다. 그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그물은 아무 소용도 없는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더구나 여자의 행방까지 막연하지 않은가.

“이 참에 아예 그 기집의 에미를 잡아 조지믄 으쩔까유?”

‘딱부리’가 의견이랍시고 내밀었으나 그것은 강 승길에 의해 단번에 묵살 당했다.

“조진다고 그 어미가 딸의 행방을 불겠어? 택도 없는 소리랑 하지도 마.”

그보다는 한시라도 방심하지 말고 감시하는 게 ‘장땅’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그렇게 하다보면 언젠가는 나타날 게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강 승길은 좌중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서슬 퍼런 그의 음성이 회의실 안에 울려 퍼졌다.

“춘천부터 뒤져. 또 대전이나, 전주 쪽에도 ‘아이’들을 보내놔. 짜아식이 그쪽으로 갔을 공산이 크니까.”

‘새끼오야지’들이 머리를 주억거리자 그가 다시 뱀눈을 치뜨며 명령했다.

“지금부터는 다른 일들은 모두 제쳐놔! ‘깜씨’를 찾아내는 일에만 총력을 기울여. 그 짜아식이 살아 있는 한 나는 잠을 자지 않을 작정이야. 알겠어?”


# 옥탑방

옥탑방에서 내려다보면 키가 크고 어깨가 떡 벌어진 흑인들도, 백인들도 모두가 다 눈 아래로 작아 보였다. 대낮부터 팔자걸음으로 골목을 오르내리다가 툭하면 행인들을 붙잡고 시비 걸기 일쑤인 딸기코 영감도 작아 보이기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 양반이 그래뵈도 한때는 이 지역에서 자기 땅을 가지고 농사짓던 인물이랍디다. 그런데 이번 미군 부대 부지에 자기 논이 수용된 뒤부터 저렇게 되었답디다. 일자 무식인 것을 이용하여 보상금을 세 아들들이 몰래 나누어갖고는 튀어버렸다나, 어쨌다나…….”

말을 마치면서 ‘뱀대가리’는 입을 쩍 다셨다. 사흘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목격할 수 있었던 그 영감쟁이에게도 그런 사연이 있었구나……. 차 일만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하품을 길게 빼어 물었다.

감옥 생활이 따로 없었다. 그 사흘 동안을 그는 옥탑방에 갇혀 ‘학교’에서도 가장 싫어하던 독방 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어쩌다 한 번 바깥출입을 해볼까 해도 ‘뱀대가리’와 ‘권 상사’가 쌍수를 들고 말리는 통에 어쩔 수 없이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가로막는 이유는 한 가지였다. 이곳도 아직은 안심할만한 곳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으쩌케 사람 자슥덜을 믿을 수 있대유, 앞에서는 샐샐 웃응믄서 능치다가두 뒤루 돌아번지믄 ‘코’ 푸는 거이 시상 인심인디…….

권 상사는 그렇게 나돌아 다니다가 ‘쪽’이 팔릴대로 팔린 차 일만이가 누구 눈에라도 띄게 된다면 그땐 모든 게 끝장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늘 무시로 드나드는 ‘뱀대가리’의 ‘아이들’에게까지도 촉각을 곤두세우곤 했다.

그 점에서는 ‘뱀대가리’도 마찬가지였다. 첫날, 권 상사로부터 사건의 진상을 들은 그는 두 말 하지 않고 뜨거운 옥탑방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고단하고 불편할 것은 알지만, 그래도 자신의 집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이곳이라는 것이었다.

“계집애들과 양키 아이들이 들락거리는 아래층은 아무래도 보는 사람들의 눈이 많기 마련 아닙니까. 그러니까 좀 불편하더라도 계시는 동안은 여기에서 수양하도록 하세요.”

그렇게 말하면서 ‘뱀대가리’는 예전에 보았던 그 풀기 없는 웃음을 또 풀썩 던졌다.

차 일만은 여전히 그 웃음이 기분 나빴다. 걱정하지 말라는 시늉이 틀림없었으나, 역삼각형의 얼굴에 머리카락 한 올 없이 밀어버린 ‘백구’, 그리고 웃을 때마다 치켜 올라가는 눈초리가 왠지 사람의 기분을 묘하게 일그러뜨려놓는 웃음이었다.

마치 살인을 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만이 짓는, 맥이 빠져버린 듯한……. 그러나 사람의 본심이란 생긴 것과 다르다는 말은 그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차 일만은 사흘 동안 학교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정을 그에게서 새삼 느끼고 있었다.

사실 아래층은 두 사람이 걱정하는 것처럼 사람들의 눈이 많았다.

‘뱀대가리’가 직접 경영하는 일층의 ‘보난자’ 클럽은 물론이거니와 이층의 ‘해피’ 당구장, 그리고 삼층의 해외결혼상담소까지, 무시로 드나드는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었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면 잠에서 깨어난 거리는 다시 살아났다.

클럽마다 네온사인이 휘황찬란하게 돌아가고 원색의 옷을 입은 여자들이 하나 둘 부나비처럼 거리로 모여들었다. 그 판에 미군들까지 가세하기 시작하면 폭이 좁은 거리는 금세 차고 넘쳤다.

그 틈새로 딸기코 영감이 한 차례 휘젓고 지나가면 조무래기 ‘삐끼’들이 초저녁부터 설쳐대기 시작하였다. 권 상사가 주의하는 것은 바로 ‘그 아이’들이었다.

소속이 없는 ‘그 아이’들이 가장 무섭다는 것이었다. 강 승길이 만약 ‘그 아이’들까지 포섭하였다면 두 사람은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러니께 형님은 꼼짝두 하지 마시구 여구 기냥 기시쇼오. 바깥은 인자 내가 맡아서 모두 알아보구 댕길 테니께……. 아침에도 그는 그렇게 이야기하고는 아침 수저를 놓자마자 일어섰다.

‘떡새’와 ‘복만’이를 만나고 오겠다는 게 겉에 내세운 이유였으나, 저쪽의 동태를 상세히 염탐하고 오겠다는 속셈이 더 컸다.

해가 기울면 옥탑방에도 간혹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곤 했다.

하루 종일 불가마 속에 들어앉은 사람처럼 땀을 흘리던 차 일만도 이때쯤이면 옥상에 나앉아 땀을 식혔다. 어쨌든 이번 전쟁은 시간 싸움이라고 그는 판단하고 있었다.

강 승길의 예봉을 피해 몇 달만 견딜 수 있다면 그때는 오히려 역습도 가능하리라. 그는 건물 뒤편으로 길게 이어진 60년대식 쪽방에서 여자들이 출근하기 위해 준비하는 것을 내려다보면서 문득 염 은옥의 얼굴을 그려보았다.

조심하세요. 아침나절의 그 목소리가 아직까지도 귀에 남아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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