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땡볕
“지금 한가허니 전화나 허고 있을 처지는 아닌 것 같은디유.”
권 상사는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 그를 데리고 차 일만이 골목 안으로 몸을 숨길 때까지도 그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힐책을 그
치지 않았다.
땡볕은 무차별적이었다. 골목 안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권 상사는 목덜미의 땀을 훔쳐내며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온통 난리가 나뿐졌시유. ‘헷또’가 해까닥 돌아버린 돼지가 형님을 꼭 잡고야 말것다구 시방 사방으루다가 사발통문을 돌리믄서 이빨을 갈구 있다는디유.”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째보’가 전하던 말을 옮기면서 권 상사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었다. 차 일만은 잠자코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있었다. 더웠다. 그러나 몸을 피할 곳은 아무 곳에도 보이지 않았다.
백주에 ‘뒷다마’를 맞았으니 아니 그러겠는가. 차 일만은 난감했다. 진퇴양난이었다. 물론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이럴 때는 ‘잠수를 탄다’는 것도 수월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그들의 몰매를 앉아서 맞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차 일만은 먼저 그 쪽의 세력이 궁금했다.
“누가 거기에 붙었대?”
“쌕쌕이파, 백곰파, 깡통파, 수원 역전파, 광주 금남로파, 부평 백마장파, 부산 서면파……. 암튼 돼지가 전국 각지루다가 ‘쩐’을 풀어가믄서 모두 불러 모으구 있다는디유.”
“짜아식이 아주 꼭지가 돌아버렸군!”
차 일만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렇다면 이미 돼지의 손이 전국을 거의 커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비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찾아보면 그런 속에서도 아직까지 ‘돼지’의 손이 미치지 못한 지역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며, 머릿속으로 재빨리 그곳이 어디일까 더듬기 시작했다.
“그러니 이잔 어찌케 해야 우리가 발 뻗구 살 수 있대유?”
“걱정 마.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이야…….”
차 일만은 권 상사를 못마땅하다는 투로 한 번 쏘아보고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하지만 아무리 ‘짱구’를 굴려보아도 그 ‘솟아날 구멍’은 금세 떠오르지 않았다.
잠시 뒤 권 상사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믄 이참에 아주 강원도루다가 ‘하이방’ 놓는 거이는 으쭈유? 남덜은 여름휴가두 가는 판국인디…….”
그의 말에 차 일만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춘천이라면 그와 한솥밥을 먹던 ‘뼁기’가 살고 있는 곳이었다. 그는 룸 사롱에서 술을 마시고 나오다가 새카만 ‘아이들’한테 넓적다리에 칼을 맞은 뒤 은퇴한 친구였다. 그 뒤 그는 춘천호에 좌대를 몇 개 설치하여 놓고 낚시꾼들을 실어 나르면서 부인과 함께 밥장수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술이 좀 과해서 그렇지 의리파인 그라면 찾아간 자신을 되돌려 세우지는 않을 것이었다. 특히 돼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관계로, 몇 달 숨어 지내는 데는 지장이 없을 터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그곳은 한 번 들어가면 다른 길로 빠져나올 수가 없는 외길이었다. 더구나 ‘돼지’가 벌써 눈 여겨 보고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 염 은옥과의 거리가 너무 멀다는 단점이 있었다.
“으쩌 머리를 흔든다요?”
“거긴 아니야. ‘돼지’도 그쯤은 벌써 ‘감잡고’ 있어.”
그는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입이 타들어왔으나 그는 연신 담배를 빨았다.
“그렇다믄 쑥고개 ‘뱀대가리’네는 으쩌유?”
권 상사는 다시 차 일만을 쳐다보았다. ‘뱀대가리’는 영등포 포주 출신으로 도망간 여자를 잡아다가 폭행을 일삼던 악명 높은 위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 ‘재수가 옴 붙어서’ 매를 맞던 여자가 그만 죽는 바람에 ‘학교’에서 과실치사죄로 여덟 바퀴를 돌고 나와 이번엔 영업장소를 쑥고개로 옮겨 ‘양색시’ 장사를 하고 있는, 차 일만과 권 상사와는 ‘빵깐 동기’였다.
젠장맞을……. 차 일만은 마침내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구두로 비볐다. ‘뱀대가리’라면 ‘양색시’ 장사가 께름칙했다. 그러나 이 판국에 이것저것 가릴 처지는 아니지 않은가. 더구나 그라면 ‘돼지’의 눈 밖에 있을 것이었다. 차 일만은 마침내 골목을 빠져나왔다. 어디이든 움직여야 했다. 사방이 노출된 이런 곳에서 시간을 더 이상 지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누울 자리를 보구 발을 뻗으랬다구, 지금 우리가 더운밥 찬밥 가릴 때는 아니잖유. 그러니께 그곳으루다가 일단 튀구 봅시다요. 그기라믄 노린내 나는 양코쟁이덜이 우글거려서 그렇지, 우리덜이 ‘잠수 타기’는 아주 안성마춤이구, 또 생긴 거이 좀 뭣 같기는 허지만 ‘뱀대가리’가 ‘자끄 잠그기’ 하나는 소문난 위인 아니유.”
차 일만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의 말이 옳았다. 지금이 어떤 때인가.
누구나 인생의 빛나는 한때는 있기 마련이었다. 또한 반대로 누구나 내리막길을 탈 때도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걷는 이 시점은 어디쯤 될까. 이윽고 그는 권 상사를 앞장 세웠다. 보도 불럭 사이를 뚫고 올라온 민들레 하나가 땡볕에 하얗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 사냥 전야
강 승길은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네 놈들은 뭐하는 놈들이야!”
“…….”
“백주에 ‘오야지’가 칼을 맞았어, 이 새끼들아!”
독이 오른 강 승길의 성질은 좀체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각 지역의 ‘오야지’들을 불러 사건의 진상을 알린 뒤 점심 대접을 하여 돌려보낸 다음, 그는 바로 집안 단속에 들어간 것이었다. 그러나 그도 ‘빳따’의 방심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뱃속에 아이가 든 여자 하나와, 그녀와 한 통속이 된 ‘깜씨’를 잡으라고 했더니만, 그 일은 마무리 짓지도 않은 채 계집질을 하다가 역습을 당한 그의 행위가 결코 정당하다고는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그것보다 이를 빌미로 그동안 공들여왔던 자신의 조직이 흔들려서는 아니 된다는 게 더 절박했다.
그가 야구 방망이로 시멘 바닥을 땅땅 구르며 목청을 높일 적마다 머리를 숙이고 있는 ‘아이’들은 온몸을 떨며 더욱 작아지고 있었다. 누가 감히 그를 막을 수 있을까. 그들처럼 오금이 저리기는 ‘누시깔’, ‘장군’, ‘딱부리’, ‘낡은이’, ‘제비’, ‘땅꼬마’, ‘불독’을 비롯한 ‘새끼오야지’들도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직접 관계를 맺지 않아 이번 사건에서 책임은 면했다고 하지만, 조직이라는 큰 틀에서 보자면 결코 무사히 넘어갈 수만은 없는 일이라는 것을 그들도 이미 감지하고 있었다.
씨바, 기집이 얼매나 좋으믄 지 심장 찔리는 것도 몰르고 그짓을 했으까 잉. 지나가는 말투로 ‘딱부리’가 투덜거렸으나 강 승길의 얼굴이 워낙 험악하므로 그 말을 받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강 승길의 집안 단속은 ‘아이’들에게 단체 기합을 주는 것으로 일단락이 되었다. 천정에 닿을 듯 올라갔던 야구 방망이가 바람을 가르며 치켜 올라간 엉덩이를 내려칠 적마다 ‘아이’들은 이유도 변변히 모른 채 비명을 질러대며 몸을 비틀었다. 그리고도 곧바로 일어나 차렷 자세를 취한 ‘아이’들은 더욱 충성할 것을 맹세했다.
한참이 지난 후, 강 승길은 회의실로 ‘새끼오야지’들을 불러들였다.
“이제 ‘빳따’는 물 건너갔다. ‘깜씨’의 칼솜씨는 아직 죽지 않았더라구. 정확히 끊어놨어.”
그는 한숨을 길게 토해내었다. 어디가 어떻게 끊겨 있었다는 상황은 설명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자리에 앉아 있는 ‘새끼오야지’들은 모두가 어디를 어떻게 끊겼을 것이라고 이미 짐작하고 있는 얼굴들이었다.
“그래서 이야기인데…….” 본론을 꺼내기에 앞서 강 승길은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느리게 말을 이었다. “이제는 정말 내 머리 속에서 ‘깜씨’를 지워버리기로 했어.”
높고 낮음도 없는, 듣기에 따라서는 맥아리가 없는 어조였다. 그러나 그 말투에는 왠지 비장한 결의가 담겨 있는 것 같아 누구도 선뜻 나설 수 없게 하는 힘이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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