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는 없다 <제24회>
코끼리는 없다 <제2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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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7-09-28 13:40
  • 승인 2007.09.28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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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춥고 긴 여름(1)

물론 ‘잠수 타기’가 그렇게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이미 그들이 전국에 사발통문을 돌렸다면 ‘뛰어야 벼룩이라고’, 멀리 뛴다고 해도 걸려들 공산은 컸다. 하지만 차 일만은 앉아서 죽을 수는 없다는 심산으로 일단은 ‘잠수’를 타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더구나 이제는 염 은옥이가 있음으로 해서 그냥 당할 수만은 없는 것이었다.

“조금만 더 기다리고 계세요. 때가 되면 제가 뛰어갈 게요.”

차 일만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왜 나는 그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일까. 사실, 그는 지금까지 마음속에 감추어두었던 사랑을 이참에 고백하기 위해 다이얼을 돌렸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꺼내기가 왠지 그렇게 수월하지 않았다.

한 낮의 열기는 뜨거웠다. 뜨거운 땡볕에 말라버린 거리는 자동차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빳따’에게 ‘칼침’을 먹인 뒤 일단 안양 쪽으로 몸을 피한 차 일만은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더위와 함께 말 못하는 답답함으로 인해서 온몸이 어느새 후줄근하게 젖어 있었다. 동태를 파악한 뒤 뒤따라 달려오기로 약속한 권 상사의 모습은 아직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대화가 끊어졌다. 길게 한숨을 토해내는 염 은옥의 숨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들려왔다. 그러나 침묵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도 이젠 다 알아요. 들었어요. 일만 씨가 어떤 사람인지…….”

“실망하셨죠?”

“아니요.”

“그렇다면, 고맙습니다…….”

차 일만은 공연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녀 앞에 치부를 드러낸 채 벌거벗고 선 느낌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옛 것을 모두 잊고, 새로운 빛깔로 다시 태어나 깨끗한 몸으로 그녀 앞에 서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런 말씀이 어디 있어요? 일만 씨가 어디가 어때서요?”

그녀의 목소리는 그러나 그의 기우를 말끔히 걷어가 주었다. 언제 그랬느냐 싶게 다시 맑고 상냥하게 변해 있었다. 그녀가 말을 뱉어낼 적마다 어디선가 로드 우드의 달콤한 향기가 풍겨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차 일만은 그런 그녀를 특별히 위로해 줄 말이 떠오르지 않아 여전히 안타까웠다. 바보 고치는 약은 없다고,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사랑해요’란 말은 끝내 토설해낼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한참동안 뜸을 들이다가 겨우 어눌하게 말했다.

“저도 지금 은옥 씨를 무척 보고 싶어요. 그렇지만 아직은 우리가 맘대로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아시죠?”

그녀는 말이 없었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도 묻지 않았다. 다시 수화기 저쪽에서는 긴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차 일만은 땀을 훔치며 부스 밖을 내다보았다.

눈이 부실 만큼 온통 하얀 색 천지인 거리는 땡볕에 뽀얗게 끓고 있었다. 죽은 도시처럼 거리에는 인적도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차 일만은 가까스로 용기를 내었다. “이번에 지방에 잠시 다녀와야 해요.” 그 말을 꺼내고 그는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벌써 몇 가피 째인지 몰랐다. 발밑에는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듣고도 그녀는 크게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얼마나요?”

“기한은 저도 알 수 없어요.”

이번엔 차 일만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수’란 언제나 기약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잠수’보다는 차라리 판사가 때려주는 대로 ‘학교’에서 ‘몇 바퀴 도는 게’ 훨씬 낫다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였다. 그것은 그나마 시한이 분명하지 않은가.

“그러나 한 가지는 꼭 약속할 게요.” 차 일만은 빠르게 덧붙였다. “은옥 씨가 아이를 낳을 때는 꼭 제가 그 자리에 함께 있을 게요.”

그때였다. 갑자기 수화기 안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귀를 바짝 대어야 들릴 정도로 아주 작은 소리였으나 차츰 그 소리는 흐느껴 우는 소리로 커졌다. 내가 또 말을 잘못했나. 차 일만은 당혹스러웠다. 그녀는 지금 양팔로 가슴을 감싸 안고 울고 있을 것이었다. 그는 잔기침을 터트리며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이럴 때는 무슨 말을 꺼내야 하는 것일까.

한참동안 쉬지 않고 울던 그녀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알면 안 되나요?”

염 은옥의 음성에는 간절함이 섞여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에게도 그 사실을 밝힐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그녀를 위한 배려였다. 혹시라도 그녀가 알게
된다면 그 뒤부터는 더욱 피 말리는 기다림이 될 것이 분명한 까닭이었다.

차 일만이 한참 동안 대꾸가 없자 염 은옥이가 다시 울음기 묻은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일만 씨와 함께 살려면 먼저 기다리는 습관부터 길러야 한다던데, 그 말이 정말 맞네요.”

차 일만은 야단맞는 학생처럼 잠자코 그 말을 듣고 있었다. 권 상사의 아내가 귀뜸을 해주었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꼭 여자들만이 안고 살아가야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남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떠나간 여자가 혹시라도 돌아오지 않을까, 기다리며 그 숱한 밤을 술로 밝히던 심정을 여자들은 알까. 그는 다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때였다. 이쪽을 향해 헐레벌떡 뛰어오는 권 상사의 모습이 부스 창밖으로 보였다. 하얀 거리를 가로질러 달려오는 그의 얼굴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 서두르고 있는 걸음걸이였다. 그렇다면 일이 수상하게 돌아가고 있단 말인가. 차 일만은 자신도 모르게 온몸의 근육이 수축되었다. 그렇게 ‘칼침’을 맞았을 경우엔 대개 석 달 정도의 치료를 필요로 하였다. 그렇지만 봉합이 다행히 잘 되어 퇴원을 한다 하더라도 한 번 손
상된 아킬레스건이란 제 기능을 되찾을 수 없는 것으로 그는 평생 목발이나 휠체어를 끌고 다니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혹간 재수 없게 생명을 잃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럴 경우는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출혈이 너무 심했다거나, 아니면 칼끝이 뼈 속까지 건드려 파상풍 같은 또 다른 치명적 증상을 유발할 경우였다. 그렇다면 이제는 그녀와의 통화도 곧 끝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아직도 뭔가 못한 말이 꼭 남아있는 것 같았다. 그녀도 그것을 어느새 감지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느닷없이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사랑해요.”

그녀는 혹시라도 차 일만이가 못 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때문인지 아주 분명하고 자신 있게, 보란 듯이 다시 한 번 더 또박또박 말했다. 하지만 차 일만은 그 말을 똑똑히 들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는 가슴 한 복판에 달군 인두가 닿은 것처럼 온몸이 화끈거렸다.

“저를 사랑하지 않으세요?”

그녀가 다시 한 번 확인하듯 말했다.

“사, 랑, 해, 요.”

비로소 차 일만은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것은 엉겁결에 내뱉은 말이었다. 얼굴이 붉어진 그는 쑥스러웠다. 생전 처음 해보는 고백이었다. 그러나 시원했
다. 사랑해요, 정말 사랑해요, 사랑해요, 정말 장말 사랑해요……. 마치 막혔던 봇물이 터진 것 같았다. 뒤를 이어 그는 수화기에 대고 ‘사랑해요’란 말을 한꺼번에 십여 차례 쏟아내었다.

수화기 저쪽에서 비로소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소식쯤은 서로 알고 있어야 하는 거예요, 아셨죠?”

“알았어요. 자주 연락할 게요.”

차 일만은 그 말끝에도 ‘사랑해요’를 또 후렴처럼 연발했다.

“약속하실 수 있죠?”

“그럼요. 약속해요.”

“이제부터 일만 씨는 저에게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분이에요. 그러니까 어디에 계시든지 늘 몸 조심하셔야 해요.”

“명심하겠습니다.”

차 일만은 마치 꿈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양 옆으로 초록빛 숲이 우거진, 아름답고 고즈넉한 꿈길……. 그 속을 그는 그녀와 함께 손을 잡고 걷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제부터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새벽 창이 밝아올 때까지 우두커니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 같은 것은 자신에게 없을 것이었다.

“날마다 일만 씨를 위해 기도할 게요…….”

그는 이윽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사랑해요. 가슴이 뛰었다. 왠지 조금 전까지 자신을 누르고 있던 피로가 한꺼번에 사라진 느낌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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