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는 없다 <제23회>
코끼리는 없다 <제2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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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7-09-17 16:47
  • 승인 2007.09.17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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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춥고 긴 여름(1)

권 상사의 음성이 떨렸다. 이윽고 안에서 슬리퍼 끄는 소리가 들렸다. 정기 점검이에유. 권 상사는 억지웃음을 웃으며 여자가 신분을 확인할 수 있도록 출입문 중앙으로 한 걸음 옮겨 섰다.

“이른 아침부터 웬 가스 점검이래요?”

여자도 ‘빳따’처럼 방심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문고리를 푸는 금속성 소리가 딸각, 들려왔다. 순간, 차일만은 호흡을 멈추었다. 이런 일의 성공 여부란 대개 여기에서 판가름 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는 더욱 벽 쪽으로 바짝 붙었다.

마침내 문이 열렸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여자는 문을 닫지 못했다. 여자가 한쪽을 내주는 것과 동시에 권 상사가 얼른 안으로 발을 들여놓음으로써 공간을 확보한 것이었다. 뒤이어 들어선 차일만이가 야구방망이로 가슴을 밀자 여자는 뒤로 맥없이 넘어졌다. 문은 권 상사가 잠갔다.

여자는 떨고 있었다. 아랫도리가 다 드러났으나 감출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권 상사는 넘어진 여자의 가슴에 방망이를 대고 턱짓으로 물었다. 그눔 어디 있어? 말 안하면 알지? 하지만 그 이상 위협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반쯤 정신이 나간 여자는 건달과 붙어사는 여자답지 않았다. 사색이 된 채 순순히
샤워실을 가리켰다.

차일만은 여자가 가리키는 샤워실 앞으로 재빨리 다가섰다. ‘빳따’는 샤워를 하는 모양이었다. 흥얼거리는 콧노래가 문밖까지 들려왔다. 차일만은 야구방망이를 든 오른손을 말아 쥐었다. 그의 집요한 눈길이 강장동물의 촉수처럼 아직까지 물소리를 내고 있는 샤워실을 더듬었다.

권 상사가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하나, 두울, 세엣……. 한 차례 숨을 몰아 쉰 차일만이 이윽고 거침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뿌연 수증기가 밀려나왔다.

‘빳따’는 예상대로 알몸이었다.

“어, 너는!”

‘빳따’는 놀란 눈으로 차일만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그는 역시 건달다웠다. 사태를 파악한 듯 금세 맨손으로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래, 나 ‘깜씨’야.”

“이 짜아식, 네가 감히…….”

“빚을 갚기 위해서 왔어.”

그러나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가 없었다. 샤워실은 몸을 피하기에는 비좁은 공간이었다. 급소에 일격을 당한 ‘빳따’는 곧 피를 흘리며 허리를 꺾고 말았다.

그러나 차일만의 방망이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퍽, 다시 그의 어깨를 난타했다. 쇄골에 방망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피가 튀었다. 비린내가 금세 샤워실에 가득 퍼졌다. 결국 ‘빳따’는 사정없이 내려치는 차일만의 매를 이기지 못한 채 의식을 잃고 샤워실 타일바닥에 누더기처럼 널브러졌다. 꼼짝하지 않는 기미를 보이자 차일만은 비로소 방망이를 거두었다. 주검 같은 ‘빳따’를 내려다보며 그는 숨을 몰아쉬었다. 등 뒤를 감싸고 있는, 한때는 서슬이 퍼랬을 ‘빳따’의 청록색 문신이 이젠 늙은 구렁이처럼 흉물스럽게 보였다.

“이잔 으쩔까유?”

권 상사가 물었을 때에야 차일만은 비로소 자신의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샤워실을 벗어나지 않았다.

“아직 한 가지 남았지.”

차일만은 차갑게 말했다. 그가 다시 준비했던 칼을 꺼내들었다. 잘 가라, 빳따야. 이것이 이별의 정표야. 그는 ‘빳따’의 왼쪽 다리 뒤꿈치를 정확히 겨냥했다. 그리고는 숨 한 번 쉴 사이도 없이 그것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칼이 들어가자 죽은 듯 널브러져 있던 ‘빳따’의 몸통이 한 번 크게 움직였다. 피가 다시 튀었다. 피비린내가 샤워실의 좁은 공간에 진동했다. 그러나 그는 칼끝에 뭔가가 걸려 칼날의 진행을 막을 때까지 칼을 거두지 않았다. 투욱,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소리가 마침내 그의 귀에 환청처럼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는 ‘빳따’의 발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보고나서야 일어섰다.

“다, 끝낸 겁니까유, 형님?”

“가자.”

차일만은 머리를 끄덕거렸다. 일은 계획한 대로 짧은 시간 안에 잘 마무리된 셈이었다. 그러나 차일만은 왠지 입이 씁쓸했다. 자꾸만 허방을 걷고 있는 것
처럼 마음이 우울했다.

“우리 볼 일은 이자 이긋으루 몽땅 끝나브렸으니께, 당신은 쩌 안쪽에 누워있는 쩌 양반이나 싸게싸게 병원으루 데려가뿌쇼. 미적거리다가 칵 뒤져뿌리기 전에.”

권 상사가 여자에게 데퉁맞게 말했다.

엘리베이터에 오른 차일만은 비로소 권 상사에게 ‘아이’들을 철수시키라고 지시했다. 형님, 칼 쓰는 솜씨 하나는 아즉까정 멀쩡하요, 잉.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이며 권 상사가 웃었으나 차일만은 웃지 않았다. 벌써 닷새가 지났구나. 그는 문득 염은옥이가 몹시 보고 싶었다.


# 약속

“왜 이렇게 전화가 늦었어요?”

“바빠서…….”

차일만은 담배를 깊게 빨았다. 갑자기 연기가 기도를 막은 탓일까. 기침이 터져 나왔다.

“왜 기침하세요? 혹시 감기 드신 거 아니에요?”

염은옥이의 음성에 놀라움이 실려 왔다. 잔기침을 연신 하면서도 차일만은 아니라고 말했다.

“건강하셔야 해요.”

차일만은 허허롭게 웃었다.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영영 나를 잊어버린 줄 알았어요.”

다시 평심으로 돌아온 염은옥의 음성은 여전히 맑고 차분했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그 말끝에서는 야속하다는 뜻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차일만은 얼굴이 달아올랐다. 생전 낯도 모르던 집에 짐짝 부리듯 내려놓고 닷새 동안 꿩 구어 먹은 소식으로 있다가 이제 와서 변명 한 마디 아니 한다는 것 자체가 낯이 뜨거운 짓거리임에 틀림없었다.

“일이 있었어요, 아주 중요한 일. 그래서……. 미안해요.”

이번엔 차일만이 물었다.

“아이는 어때요?”

염은옥은 다시 기쁜 음색으로 대꾸했다.

“빨리 나오겠다고, 시도 때도 없이 발길질을 해대서 야단났어요.”

“됐네요, 그럼…….”

“고마워요. 신경 써줘서.”

차일만은 갑자기 함박웃음을 웃고 있을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보고 싶었다. 달려가고 싶었고,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는 그는 온몸이 터질 것 같은 그 충동을 애써 억누르고 있었다.지금은 아직, 아니었다. 그는 그녀의 음성을 듣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지금 뭐하다가 전화 받았는지 아세요?”

“글쎄요……. 성경 읽다가?”

“어머머, 우리 일만 씨 이젠 귀신 다 되었네!”

염은옥의 웃음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어깨를 가늘게 떨면서 웃고 있을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이번에도 그녀가 먼저 물었다.

“우린 언제 만날 수 있는 거예요?”

그 물음엔 차일만도 주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글쎄요……. 그러자 그녀가 갑자기 비음이 섞인 어조로 재우쳐 물었다.

“밖에서 만날 수 없는 처지라면 일만 씨가 이쪽으로 달려오시면 되잖아요.”

그러나 차일만은 그 말에도 확실한 답변을 줄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을 보기 갈망한다는 그녀의 그 말이 눈물이 날만큼 고맙게 느껴졌다. 이제는 이 세상
을 숨 쉬며 살아가야 할 이유가 분명히 생긴 것이었다. 거역할 수 없는 그것은 사랑이라는,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띠로 두 사람이 함께 묶여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것도 안 되나요?”

그녀가 다시 재촉했다. 그러나 차일만은 여전히 대답을 미루었다. 생각 같아서는 만사 제쳐놓고 지금 당장 ‘디립따’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 길은 까딱 잘못하면 곧 죽음에 이르는 마지막 길이 될 수도 있다고 판단되었던 것이다.

이제 다시 새롭게 시작된 지구전이었다. 지금쯤 벌써 소식을 접한 강 승길은 그 무리들과 함께 혈안이 되어서 자신의 행방을 찾고 있을 터이었다. 어쩌면
그녀와의 통화조차도 빌미가 될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은 광분해 있을 것이었다.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라면 경험을 통해 그 정도는 이미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터이었다. 이럴 때는 잠시 몸을 숨기고 차선책을 궁리하는 게 순서였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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