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도 그 사람을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도대체 지금 어디에서 헤매고 있는 것일까. 빗줄기는 더욱 굵어지는데……. 그녀는 문득 이곳에 자신을 내려주면서 그가 하던 마지막 말이 생각났다. 넉넉히 잡아도 일주일이에요. 그 안에는 반드시 데리러 올게요. 그러나 그 사람은 야속하게도 그 뒤로 문자 한 번 보내온 적이 없었다.
“감자 잡수세요.”
권 상사의 아내가 어느새 압력솥에서 감자를 끄집어내고 있었다. 소반 위에서 하지 감자가 하얀 속살을 뽀얗게 드러내고 있었다. 저물녘까지도 비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은 채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거래 전
사단법인 ‘해뜸 복지센터’의 입주식이 끝난 날, 황 회장은 오피스텔로 향하면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피곤이 몰려왔다. 국회의원을 비롯하여 구청장, 경찰서장 등 지역의 유지들과 지인들이 참석한 입주식은 요란하고 성대했다. 호텔 뷔페로 차려진 뒤풀이도 풍성했다. 축하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면서 그는 그 시간 동안 내내 입을 벌리고 배우처럼 웃었다. 국회의원이 되면 이렇겠다는 느낌으로 그는 열심히 사람들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그러나 그는 사실 뭐가 즐거운지, 무엇이 기쁜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치매 노인들을 수용하여 24시간 돌보는 현대식 쉼터를 만드는 것이 어렸을 때부터의 소망이었다고 인사말은 그럴 듯하게 하였으나, 그 원고는 모두 김 국진 이사가 작성한 것이었다. 기자들에게 뿌린 보도 자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박 의원의 권유로 어쩔 수없이 시작한 일이었으나 그는 처음부터 그 일이 마뜩찮았다. 먹고 배설하는 게 전부인 치매 노인들이 왜 세상에 오래 살아있어야
하며, 그들을 위해 사람들이 왜 정성을 기울여야 하는 건지, 그는 그 이유에 대해서도 구태여 알려고 하지 않았다.
황 회장은 쉬고 싶었다. 한 달에 일금 일천만 원으로 임대한 현지의 알몸을 끌어안고 한숨 자고나면 몸이 좀 가뿐해질 것 같았다.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을 향해 핸들을 꺾으면서 그는 다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생각보다 ‘금뺏찌’달기가 수월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그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했다.
박 의원이 전화를 한 것은 그가 현지의 알몸을 막 침대에 눕혔을 때였다. 하필이면……. 그러나 그는 거역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리듯 얼른 폴더를 밀어
올렸다.
“오늘 정말 수고 많았어.”
박 의원은 여전히 정중했다.
“수고는 무슨…….”
“참 잘 하셨어. 정치가 뭐 별 건가, 그렇게 시작하는 거야. 이제부터는 사람들이 황 회장을 달리 볼 거야.”
“모두가 다 박 의원님 덕분입니다…….”
“징조가 아주 좋아.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황 회장의 이미지를 쇄신하는 데라면 돈을 아끼지 말고 팍팍 써요. 돈 벌었다가 뭐 할 건가, 죽을 때 가져갈 수도 없는 게 그 알량한 돈 아닌가 말이야.”
박 의원은 쾌활하게 웃었다. 웃음소리에 힘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황 회장은 웃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얼마를 더 뿌려야 ‘금뺏찌’를 달 수 있을
까. 폴더를 내린 그는 다시 현지의 알몸을 내려다보았다. 뱀장어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 모잽이로 누워있는 그녀가 숨을 할딱거릴 때마다 들큰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그러나 그는 그의 몸에서 이미 욕정이 빠져나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도대체 그 ‘금뺏지’는 얼마짜리일까. 현지의 몸 위에서 내려온 그는 두 눈을 감았다. 얼마짜리이든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그것도 투자라고 생각했다. 또 다른 이익을 창출해내기 위한 투자……. 그는 ‘해뜸 복지센터’도 그것을 얻기 위한 발판에 불과하다고 자위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새알보다 더 아까운 돈이지만, 박 의원의 말대로 팍팍 뿌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이 세상에 밑천이 들어가지 않는 장사가 어디 있을라구……. 그는 천정을 올려다보며 혼
자 소리 없이 웃었다.
“안마해 드려요?”
현지가 물었으나 그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 선방
자정이 넘은 시각, ‘빳따’가 그 여자의 집으로 들어갔다는 권 상사의 보고를 받은 차 일만은 드디어 때가 되었다는 것을 예감했다. 그는 그 여자의 집에 ‘아이’들을 세워 시간마다 보고를 하도록 지시한 뒤 권 상사를 불러들였다. 짐작을 하고 있었다는 듯이 그는 10 여분도 지나지 않아 상기된 얼굴로 나타났다.
“아이들은?”
“세웠시유. 그라믄?”
차 일만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는 아침 10시쯤에 쳐들어가는 게 가장 적당한 시간대라고 설명해주었다. 그 시간대라면 아파트도 조용할 터이고, 습성상 긴장을 푼 ‘빳따’도 한껏 느긋해 있을 것이었다.
대개 ‘물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아침나절을 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보내기 일쑤였다. 일반 사람들이 퇴근하는 시간으로부터 시작하여 그들이 잠을 자는 새벽까지 ‘야통’으로 영업을 하다가 들어와 널브러지기 마련인 그들은 그 시간대가 되어서야 느리게 일어나 하품을 입에 물고 샤워를 하거나 아니면 목
욕탕으로 향하는 게 습성이었던 것이다. 누구보다 그들의 습성을 잘 알고 있는 차 일만은 그 시간대를 노리는 게 가장 성공률이 높고, 또 뒤끝이 깨끗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무기는?”
“발쎄부텀 준비해놨쥬. 이 말이 나온 뒤부텀…….”
“여자는 네가 맡아.”
“그라믄 형님은?”
권 상사가 차 일만을 쳐다보았다.
“‘빳따’는 내가 맡아.”
차 일만은 짧게 대답했다.
“어디까정 갈 건디유?”
“다시는 땅을 걷지 못할 거야. 이젠…….”
차 일만은 다시 어금니를 깨물었다. 야구 방망이를 어깨에 걸치고 꺼떡거리던 ‘빳따’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러나 이제 그 모습은 이 지상에서 다시 볼 수 없을 것이었다.
“그렇다믄?”
“목숨은 살려줄 거야. 아깝잖아, 그렇게 살겠다고 발버둥친 게…….”
그때였다. ‘아이’들한테서 보고가 들어왔다. 아파트의 불이 막 꺼졌다는 것이었다. 휴대폰에 대고 권 상사가 거칠게 소리쳤다.
“주변은 잘 살핀 거여? 증말 아무 것두 뵈는 거이 없어?”
차 일만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계집을 끼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 보고가 사실이라면 ‘빳다’는 이 순간까지도 자신을 너무 과신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과신
과 방심이 패망의 첩경이라는 이 바닥의 십계명을 그는 지금 까먹고 있는 게 확실했다. 도둑이 들려믄 개두 짖지 않는다는구먼서두……. 권 상사가 차 일만
을 향해 씨익, 의미 있는 웃음을 보냈다.
날이 밝았다. 염 은옥의 어머니가 차려준 아침밥을 함께 먹은 두 사람은 시간이 되자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천연덕스럽게 아파트를 빠져나왔다. 피가 튀어도 핏자국이 쉽게 드러나지 않도록 검은 색 바지와 티셔츠를 골라 입고 나가는 차 일만을 그러나 어머니는 예사롭게 여기는 눈치였다.
현장은 보고대로 조용했다. 혹시나 하여 주변을 눈여겨보았으나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 그러나 차 일만은 침착하게 아파트 주위를 한 바퀴 돌며 만약의 경우에 발생할지도 모를 도피처까지 물색해 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권 상사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모자까지 바꾸어 푹 눌러썼다. 구두약까지 바른 복장이 제법 기름때 묻은 가스 용역업체의 기술자 같은 모습이었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만……. 그 모습을 보며 차 일만은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12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버린 두 사람은 1202호 앞에 멈추어 섰다. 번호로 되어 있는 자물쇠를 보며 차 일만은 한 번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더 이상 꾸물거릴 시간이 없었다. 단시간 내에 끝내야 했다. 한 치의 오차도 있어서는 아니 되었다. 싸움판에서 산전수전 다 겪으며 잔뼈가 굵었지만 이럴 때의 그는
언제나 ‘초짜’처럼 입술이 탔다.
권 상사의 얼굴에도 긴장의 빛이 감돌았다. 초인종을 누르는 그의 손가락이 떨렸다. 그러나 반응은 의외로 빨랐다. 누구세요. 잠기가 아직 가시지 않은 여자의 느린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가스 점검 나왔는디유.”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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