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안은 양반집 여자로 품행이 음란하고 방자하거나, 3번 이상 재가(再嫁)한 사람의 소행을 기록한 대장으로, 재가(再嫁)를 금지한 유교사회의 산물이다.
고려시대부터 존재했던 자녀안은 유부녀가 음탕한 행동을 하면 자녀안에 기록한 뒤 종으로 신분을 낮추었던 제도였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자녀안의 차이점은 고려시대에는 간통자만 자녀안에 기록했으나 조선시대에는 삼가(三嫁)까지 음행으로 보아 자녀안에 기록했다. 조선 성종 때는 재가한 여성의 자손은 과거시험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하여 여성의 재혼을 막기도 했다. 양반집 여자가 자녀안에 기록되는 것은, 음탕한 여자라는 낙인이 찍혀 당사자는 물론이고 가문이 사회적으로 매장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양반가의 남자들은 자신의 집안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을 때 그 여자를 죽이기도 하는 등, 스스로 처벌을 가해 많은 문제를 발생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개별처벌은 대개가 덮어지기 마련이었다.
2003년 개봉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던 영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朝鮮男女相悅之詞)’의 내용과 흡사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물론, 영화 ‘스캔들’의 원작은 18세기 말 프랑스의 쇼데를로 드 라클로가 18세기의 퇴폐적인 사교계의 풍속을 묘사한 서간체(書簡體) 심리소설 ‘위험한 관계(Les Liaisons Dangereuses)’ (1782)였다.
세종 5년 9월 25일. 20대 혈기왕성한 세종은 여느 때처럼 대소신료들과 정사를 논의하고 있었다. 대사헌 하연(河演)이 중요한 현안들을 처리한 세종께 계하기를,
“비밀히 계할 일이 있사오니 좌우의 신하들을 물리치고 의정(議政) 이원(李原) 만을 남게 하시기를 청합니다.”하였다.
세종이 하연을 쳐다보니 대소신료들과 나눌 사안이 아닌 듯하여, 이를 허락했다.
여러 신하들이 나가자, 하연이 아뢰었다.
“전 관찰사 이귀산(李貴山)의 아내 유씨(柳氏)가 지신사(知申事) 조서로(趙瑞老)와 간통(姦通)하였으니, 이를 국문(鞫問)하기를 청합니다.”
세종은 즉위 초부터 여러 간통사건을 다루었던 터라 간통의 간자만 들어도 언짢아져 양미간을 누르고 한동안 말없이 고민하던 일이 잦았기에 하연은 대소신료들을 물리쳐 달라 청하였던 터였다. 한참을 생각하던 세종이 그대로 따르라는 명을 남기고 편전을 나갔다.
이귀산의 아내 유씨와 조서로는 먼 친척사이였다. 유씨가 어릴 적 아버지를 잃고 여승이 되어 조서로의 집에 출입하게 되면서 또래의 조서로와 가깝게 지내며 서로의 어머니 집에서 자주 만나 놀게 되었다. 유씨의 나이 14세가 되니 비로써 여자의 굴곡이 나타나고 초경(初經)을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조서로가 유씨가 아프다는 얘기를 듣고 유씨의 어머니 집으로 문병하게 되었는데 유씨의 어머닌 집에 없었다.
“대체 어디가 아픈거야?” 조서로가 근심어린 얼굴로 물었다.
“응? 아냐... 어머니 말씀으론 내가 여자가 된 것이래.” 유씨가 대답하며 얼굴을 붉혔다.
“넌 여자아인데, 여자가 되었다니?” 갸우뚱하며 조서로가 연거푸 물었다.
“그...그게 여인이 되었단.....” 유씨가 얼버무리며 이불 속으로 숨었다.
장난기가 발동한 조서로는 이불속으로 파고들어 유씨에게 간지럼을 태웠다. 그러한 장난질이 어느새 두 사람이 껴안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고, 예전과는 사뭇 다른 유씨 몸의 변화에 조서로는 본능적으로 음심이 일었다. 조서로가 덥석 유씨의 봉긋한 가슴을 만졌다. 유씨는 눈을 감고 조서로의 행동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더욱 대담해진 조서로는 유씨의 치마를 벗겨내고 설익은 과일을 따듯 조심스럽게 옥문을 어루만졌다. 간간이 터져 나오는 유씨의 신음은 조서로의 귓가를 자극하며 본능에 충실하도록 이끌었다. 이렇게 두 사람의 사통은 이뤄지게 되었고 유씨가 조서로를 잊지 못해 그리워하다 머리를 기르고 환속하여 서로의 어머니 집을 내왕하며 음희의 진맛을 느끼게 되었다. 이들의 행동을 눈치 챈 서로의 어머니가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을 막았고, 유씨의 어머니는 딸을 서둘러 나이 많은 이귀산에게 시집보냈다. 서로를 그리워한 나머지 조서로는 이귀산의 집을 매일같이 드나들었다.
이귀산이 나이 늙어 그 아내를 몹시 사랑하였고, 조서로가 아내의 친척이 된다고 하여 매일같이 찾아와도 의구심 없이 후히 대접하였고, 혹은 침실로 맞아들여 술자리를 벌이고서 아내로 하여금 술을 권하기도 하고 좋은 말(馬)을 주기도 했다.
이귀산이 출타하면 두 사람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떨어지지 않았고, 그러한 행동이 잦자 더욱 대담해진 이들은 이귀산이 사랑채에 머물 때도 거리낌 없이 사통하였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이들의 간통은 발각되어 유씨는 의금부에 투옥되게 되었다.
사헌부의 국문결과를 보고받은 세종은 명하기를,
“우리 동방이 예의로서 나라를 다스렸으니, 그 유래가 오래다. 대대로 벼슬하여 온 세족(世族)의 집에서는 이같은 행실을 잇지 않았다. 지신사는 그 직분이 왕명의 출납을 맡았으니, 그 임무가 지극히 무겁거늘, 이제 그 죄가 강상(綱常)을 범한 것이다. 그러나 공신의 적장(嫡長)인지라 형을 가할 수 없거니와, 유씨는 대신의 아내로서 감히 음탕한 짓을 행하였으니, 가히 크게 징계하여 뒷사람을 경계하라.” 하였다.
이귀산을 기만하고 조서로와 간통한 유씨는 3일 동안 ‘자녀(姿女)’의 표찰을 달고 저자거리에 세워져 행인들의 조롱과 돌팔매질을 당하는 욕을 본 뒤 참수되었다. 조서로는 개국공신의 적장(嫡長:정실에서 난 맏아들과 맏손자)이므로 그 형을 면한다는 것이 세종의 결정이었다.
같은 죄를 범하고도 남자와 여자의 형벌은 이토록 큰 차이를 두었으니, 조선의 성차별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며 여성들의 생활환경은 더욱 척박했다. 이 자녀안은 1894년(고종 31년) 갑오개혁으로 철폐되었지만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이 사회적 풍속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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