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는 없다 <제15회>
코끼리는 없다 <제15회>
  •  
  • 입력 2007-07-23 16:15
  • 승인 2007.07.23 16: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2장 위험한 사랑(4)

# 사랑의 시작


밤이 깊었다. 문병객들이 떠나간 병실이 조용해졌다. 환자 곁에서 종일 시중을 들던 보호자들도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차 일만도 마찬가지였다. 염 은옥은 잠이 든 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소등이 되어 있었으나 병실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불빛이 그의 얼굴 윤곽을 희미하게 드러내 주고 있었다. 고집스러워 보이는 콧날 아래로 보이는 턱에는 하루 만에 어느새 수염이 검게 돋아나 있었으며, 어깨를 중심으로 상체를 감고 있는 붕대에는 아직도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고마운 사람……. 염 은옥은 생각할수록 그가 고마웠다. 보잘 것 없는 자신의 목숨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덤벼들던 그 용맹성이 생각할수록 가슴을 설레게 했다.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작심하고 덤벼들던 그 두 사람에 의해 자신은 부지불식간에 당하고 말았을 게 분명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임에 틀림없었다.

염 은옥은 문득 이런 사람이라면 그까짓 과거를 문제 삼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어두운 과거는 과거일 뿐, 지금은 밝고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것은 누구보다 자신이 증명할 수 있었다. 어쩜 이런 사람을 자신에게 붙여주시다니,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주여’ 소리를 연발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잠시 다녀올 데가 있다고 나갔던 권 상사가 다시 봉지를 안고 들어왔다. 그는 들어서면서부터 염 은옥을 향해 우스갯소리를 던졌다.

“거, 그렇게 들여다보믄 우리 형님 얼굴에 ‘빵꼬’나것소.”

염 은옥은 자신도 모르게 차 일만의 곁에서 떨어졌다.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형수’라는 그 소리가 꼭 싫은 것만은 아니었다. 낯설기는 했으나 그 소리를 들을 적마다 어느새 자신이 정말 차 일만의 아내가 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곤 하는 것이었다.

“뭣 좀 잡수셨수?”

“아니요.”

“그러믄 안 되지유. 형수님두 형수님이먼서두, 아기가 있잖어유. 이럴 때일수록 아기를 생각하셔야지…….”

권 상사는 혀끝을 차며 봉지 속에 담긴 것들을 탁자위에 꺼내놓았다. 김밥이 담긴 일회용 용기 몇 개와 우유 두 통, 그리고 스낵 종류들이었다. 그는 나무젓가락을 건네며 얼굴 가득 웃음꽃을 피웠다.

“꿈나라에 간 형님은 그 나라에서 실컷 잡수실테니까 냅둬버리구, 우린 우선 이거라두 먹구 시장기를 달래야 할 거이 아닌감유?”

너스레를 떨던 권 상사가 먼저 김밥을 입안에 넣고 우적우적 씹기 시작했다. 염 은옥도 김밥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보니까 경황 중에 자신이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먹은 게 없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렇다구 짜이식덜이 당장 쳐들어오는 것두 아닐 터이니…….”

“정말 또 쳐들어올까요?”

염 은옥은 짭짜름한 김밥이 구미에 맞았다. 그녀는 또 김밥을 집어 올렸다. 벌써 김밥을 담았던 용기가 다 비어가고 있었다.

“아까 형님 이야구 못들었남유? 그 눔덜은 이 지구 끝까정 쫓아오구두 남을 지독한 놈덜이라니께유.” 권 상사는 말을 이었다. “그러나 걱정 말아유. 우리 형님이 어떤 분이신디, 지까짓 것덜이…….”

염 은옥은 다시 차 일만을 한 차례 돌아다보았다. 파마한 머리가 풀어져 이상한 모양이기는 했으나 환자복 사이로 보이는 근육질의 몸매가 바위처럼 단단해 보였다.

얼마가 지났을까. 권 상사가 다시 거쿨지게 입을 열었다.

“우리 형님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시남유?”

“아니요, 아무 것도…….”

염 은옥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오늘밤 시간두 넉넉하니께, 우리 형님이나 실컷 씹으믄서 날밤 한 번 벗겨 봅시다여. 워떠유?”

스낵 봉지를 뜯으면서 그가 물었다. 이번엔 염 은옥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권 상사는 거침이 없었다. 이야기를 하는 도중 이따금 과자를 우적우적 씹으면서 웃었다. 그러나 염 은옥은 웃지 않았다. 웃을 수 있는 계제가 아니었다. 이야기
하나도 허투루 흘려버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귀를 바투 세웠다.

“외로운 사람이에유. 형님이나 나나. 외로움이 얼마만큼 지긋지긋한 것인중 형수님은 아세유? 이 시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것이에유.”

밥이 없어서 외로웠고, 밥을 해결하기 위해 싸웠다. 싸우다보니까 형편이 엇비슷한 또 다른 싸움패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들과 어울리게 되었고, 밥그
릇을 따지게 되었고, 그러다보니까 또 똑같은 무리들과 밥그릇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힘겨루기를 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들에게 지지 않기 위해서는 사생결단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살다보니까 자신들의 주변에는 온통 비슷비슷한 무리들이 들끓게 되었고, 사람들은 이를 일러 ‘조직’이라고 칭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뒤로 빠졌지만 차 일만도 한 때는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아니라는 이야기이지요?”

염 은옥은 과거를 문제 삼고 싶지 않았다. 현재가 중요했다. 미래와 연결되는 통로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가 아닌가. 그녀는 또 귀를 세웠다.

권 상사는 다시 귀성스럽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돈 몇 푼에 팔려서 봉천동에 쳐들어갔던 일이 있었지유. 한창 신나게 뿌시다 보니께 앞장 서 있어야할 형님이 보이질 않는 것이지 뭐것시유. 그래서 이거이 무슨 일이다냐, 하구 난 다 팽개치구 냅다까라 뛰었지유. 형님을 찾으러……. 그랬는디 우리 사랑하는 형님께서 어디 기셨는지 아세유? 글씨, 초등학생 하나를 붙들구 함께 울구 있지 뭐것시유. 낭중 물어보니께, 그 아이의 집을 뿌셔서 미안해서 그랬다나 뭐라나……. 암튼 그 뒤루 집 뿌시는 일에서 형님은 영원히 ‘찌’ 당했시유.”

염 은옥은 다시 차 일만을 돌아다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 저 사람이 그런 면이 있는 사람이로구나. 아이의 슬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 그녀는 공연히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런 사람이라면 자신의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까지도 충분히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을 사람으로 여겨졌다.

권 상사는 차 일만의 어릴 적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물론 그것은 그가 직접 체험한 일이 아니어서 얼마만큼의 가감이 있을 수 있다고 염 은옥은 전제하고 들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에서도 그의 사람됨은 충분히 살필 수 있었다.

“아버지가 아마 일찍 돌아가셨는강 봐유, 아버지 이야구 하는 걸 못들은 걸 보믄. ……암튼 형님은 엄마 이야구를 잘 했시유. 술이라두 한 잔 걸치거나, 아님 텔레비에서 엄마 이야구가 나오믄 자기두 엄마가 생각난다믄서 이야구를 풀어놓군 했쥬. 이건 지 추측인디, 암만봐두 형님 엄마가 재혼을 하지 않았나 싶으유.”

권 상사는 또 과자를 우적우적 씹기 시작했다.

염 은옥은 잠자코 권 상사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이번에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염 은옥이가 가장 알고 싶어 하던 것이었다. 여자들의 이야기.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해서도 차 일만은 대체적으로 담담한 편이었다. 나이 사십이 넘도록 이렇다 할 연애 한 번 제대로 못해봤다는 게 좀체 믿기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권 상사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기로 하였다.

“근래 들어와 살림을 차렸던 여자가 있기는 했었쥬. 형님두 그 여자를 끔찍이 아꼈시유. ‘이 민아’라구, 술집에서 알게 된 여자인디, 제법 얼굴뙈기는 반반하니 고왔어유. 한 눈에 사내들이 홀리게끔……. 어찌 보믄, 형수님을 많이 닮은 얼굴이었시유. 아, 그런디 ‘학교’에서 나와 보니께 글시, 발쎄 내빼뻔지구 없두라구니께유.”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참기 어렵다는 투로 권 상사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음호에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