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는 없다 <제9회>
코끼리는 없다 <제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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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7-06-11 16:23
  • 승인 2007.06.11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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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강물아, 강물아

왜 실없이 웃고 지랄이냐고, 차 일만이 눈꼬리를 사납게 치떴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뽀글뽀글 볶은 차 일만의 헤어스타일이 꼭 개그맨 같다는 것이었다.

“아니, 도대체 지금 형님 나이가 몇 살이유?”

“왜? 나는 이런 머리 하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어?”

차 일만은 그가 소리내어 웃을 적마다 더 거칠게 술잔을 기울였다.

차 일만은 사흘째 ‘그 일’에서 손을 놓고 있었다. 강 승길의 독촉이 빗발쳤으나,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미용실 건너 편 공터에도 나가지 않았으며, 염 은옥의 출근과 퇴근도 지켜보지 않았다. 따라서 염 은옥의 얼굴을 못 본지도 사흘이나 되었다. 그 사흘 동안 그는 자신을 가두고 있는 우울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었다. 피가 마르고, 살이 빠질 일이었다. 애당초 값도 모르면서 섣불리 쌀자루를 내민 자신이 후회스러웠다. 미스 리가 돌아온 뒤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다. 하루 종일 애꿎게 담배나 죽이면서 아파트 주부들이 들락거리는 것을 지켜보다가 돌아서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로즈 우드의 향기도 맡지 못한 채 저물녘 그냥 돌아설 때에는 자신이 왜 이 짓거리를 하고 있나, 하는 울적함에 휩싸이곤 하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차 일만은 권 상사가 따르는 술을 또 단숨에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러나 자신을 억누르는 그 무언가의 정체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알 수 없는 그 무언가에서 술에 취하면 해방될 것이라는 기대도 무너졌다. 술기가 오를수록 가슴은 더욱 답답해왔다. 그것은 마치 지독한 열병을 앓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었다.

술이 떨어지자 권 상사는 다시 냉장고에서 술병을 꺼내왔다. ‘하우스’가 망하면 남는 건 술병뿐이라는 말은 빈 말이 아니라면서, 그는 다시 자신의 아내가 신봉하는 예수를 안주거리로 꺼내기 시작하였다.

“신이 정말 사람으로 태어날 수가 있다고 믿으슈, 형님은?”

“성경에 그렇게 쓰여 있다며?”

“글쎄, 그렇대요, 나 원 참.”

권 상사는 혀 말린 소리를 지껄이다가 다시 잔을 꺾었다.

차 일만도 권 상사의 아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갈비 집 종업원으로 있을 적에도 뻔질나게 드나들었을 뿐만 아니라 잠시 동안이기는 하였지만 ‘잠수’를 탔을 때에는 권 상사와 함께 그녀의 사글세방에 숨어 의식주까지 의탁한 적이 있었던 탓에 그녀의 생김새는 물론 성품까지도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는 처지였다. 그렇지만 그녀가 ‘예수쟁이’가 되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었다.

“예수를 믿어야 천국에 간다구, 글쎄, 그 에펜네가 이젠 나보구두 대놓구 믿으라는 거유. 내 기가 막혀서…….”

“계수씨가 믿으라면 믿어봐. 여태까지 믿어서 손해 본 건 없잖아.”

“그래서 지가 오늘 아츰엔 그랬쥬. ‘부부는 일심동체이닌께 한 사람만 믿어두 되는 거이 아닌감’ 하구유. 예수두 그건 알 꺼 아니유?”

권 상사는 심각한 얼굴빛으로 말했다. 주름이 양미간에 깊게 잡혔다. 그러나 차 일만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의 등쌀에 떠밀려 결국은 그가 교회에 발을 들여놓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우스’를 걷을 것이라면 몰라도 계속 할 것이라면 아무래도 ‘째보’녀석을 한 번 만나야 하는 거 아니야?”

“내비두세유. 이제 막 ‘학교’에서 나온 그눔이 오죽하믄 이 짓거리라두 해서 밥 먹것다구 하것이유.”

권 상사는 여전히 그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기야 그가 왕년에 ‘째보’와 가졌던 의리로 본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차 일만은 그 점이 늘 탐탁하지 않았으며,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면 ‘째보’가 먼저 인사를 와야 하는 것이 도리였다. 아무리 건달의 세계가 기생 자리 저고리보다도 못하다고 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의리 하나로 밥 먹고 사는 세계가 아닌가.

“아, 내비두시라니께유. 난 ‘깜씨’형님 한 분만 기시믄 그것으루다 ‘닥상’이에유.”

술병은 금세 바닥이 나곤 했다. 그럴 적마다 권 상사가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또 술병을 꺼내왔다. 차 일만도 이젠 자신이 어지간히 취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숨을 쉴 적마다 코끝에서 단내가 났으며,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자꾸만 커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권 상사가 권하는 술잔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 시상에 지 서방 믿으믄 그것으루다가 되었지, 뭐 빤다구 또 예수는 믿는데유, 믿길…….”

잠시 잊고 있었던 권 상사가 다시 그 문제를 물고 늘어지려는 무렵, 차 일만의 휴대폰 벨이 울었다. 강 승길이었다. 발신인 번호를 확인한 순간 차 일만은 잠시 떠났던 그 무엇이 다시 엄습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술 먹고 있어?”

“…….”

“자알 하고 있구만. 지금이 어느 땐데 한가하게 술타령이야!”

“…….”

차 일만은 할 말이 없었다. 그를 이해했다. 한 달이 다 경과하도록 아직까지 그따위 일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그러나 그 ‘그따위 일’이란 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을 ‘돼지형’은 이해하지 못하리라. 그는 변명 한 마디 못한 채 강 승길의 힐책을 뭇매를 맞듯 고스란히 듣고 있었다.

“너는 목숨이 몇 개씩 되냐?”

“…….”

차 일만은 술기운이 모두 달아나는 느낌이었다. 그가 당혹스러운 빛을 보이자 권 상사가 어느새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손으로 돼지를 그려 보이며 얼굴을 찡그렸다.

“저쪽에서 다른 줄을 대면 너는 그때부터 낙동강 오리알 신세야. 사람이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펴야지, 지금이 그렇게 술이나 빨고 있을 만큼 한가한 때인 줄 알아!”

“…….”

“내일 아침 열시에 플라자로 나와.”

씨바……. 사람이 뭣 같이 사니께 이젠 안면 몰수하고 못 잡아먹어서들 난리구만, 개좃두 아닌 것덜이……. 혼자서 씨근벌떡거리다가 그래도 성을 못 참겠던지 그는 말릴 틈도 없이 소주병을 병째 입에 꽂고 나발을 불었다. 그러나 차 일만은 술맛이 그만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내일 아침 열시 플라자 호텔 커피 숍. 그는 강 승길을 만나야 한다는 게 벌써부터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하였다.


# 만남, 그리고 이별

“죄송합니다…….”

차 일만은 어눌하게 입을 열었다. 어떻게 꺼내어야 할까. 약속장소로 오면서 입속으로 수없이 되뇌었던 말이었다. 그러나 막상 뱉어내고 나자 속이 후련했다.
“그러니까 다시 무르고 싶다?”

예상했던 대로 강 승길은 뱀눈을 사납게 치켜떴다. 독기가 오른 그의 눈동자가 어느새 벌겋게 충혈되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형님.”

차 일만은 잠시 미적거리다가 흰 봉투를 꺼내어 강 승길 앞으로 슬그머니 밀어놓았다. 그것은 어젯밤 권 상사와 술을 마시면서 내내 고민했던 것으로, 그 속에는
한 달 전 이곳에서 그로부터 건네받았던 것과 똑같은, 일백만 원짜리 자기앞수표가 열장 들어 있었다. 그러나 강 승길은 그것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너, 나를 ‘물’로 보냐?”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감히 형님을…….”

차 일만은 고개를 꺾었다. 이런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그 일’에서 자유로울 수만 있다면 고개가 아니라 무릎이라도 꿇으라면 꿇을 작정이었다.

이 세계에서는 ‘가오’가 첫째이지만 그는 ‘가오’ 따위는 문제될 게 없다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강 승길은 냉정했다. 그는 한 마디로 그의 간청을 잘랐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야. 다시 주워 담을 수 있겠어?”

설탕을 두 스픈 넣은 다음 커피 잔을 치켜든 강 승길은 다시 커피를 후우, 하고 한 차례 분 뒤 비로소 입술에 갖다 대었다. 커피를 다 마시는 동안에도 그는 그와 같은 행동을 몇 번 더 반복했다. 그것은 분기가 솟구칠 때면 해오는 그의 습관이라는 것을 차 일만은 이미 익히 알고 있었다.

“차돌이 바람 들면 석돌보다도 못하다는 옛말이 그른 말은 아니구만.”

강 승길의 얼굴에서는 찬바람이 일었다. 사람 좋은 웃음이나 너스레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동정이냐?”

“그건 아니구요…….”

차 일만의 대답은 여전히 어눌했다.

“그렇다면 사랑이냐?”

강 승길은 비아냥거리듯 입술을 실룩거렸다.

순간, 차 일만은 깜짝 놀랐다. 그것은 지금까지 자신이 깨닫지 못하고 있던 것이었다. 아, 사랑……. 그것이 정말 사랑이라는 걸까. 차 일만은 갑자기 큰 파도에 휩쓸린 듯 자신의 가슴이 출렁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자신으로서는 제어할 수가 없는, 난생 처음 느껴보는 환희였으며 전율이었다.

“너, 지금 영화 찍고 있냐? 아니면, 소설 써?”

“…….”

“짜아식, 노름방 뒷전에 앉아 구린내 맡고 있더니만, 이젠 아주 ‘썩통’이 다 되어버렸군.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도 못하는 것을 보니…….”

강 승길은 가소롭다는 투로 혀끝을 찼다. 그리고는 보다 더 낮고 작은 음성으로, 꼭 옛날 ‘다구리’ 들어가기 전처럼 귓속말을 속삭였다.

“목아지 내놓을 각오는 됐지?”

차 일만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것은 이미 짐작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다시 확인시켜 주는 순간 차 일만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네가 포기했다고 해서 그 여자가 사는 것이 아닌 줄은 알고 있지?”

‘이젠 목아지’ 딸 게 둘로 늘었구만……. 강 승길은 더 말을 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비로소 알아차린 듯 했다. 헛기침을 한 차례 뱉어낸 그는 굳은 얼굴로 마
침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자, 이것으로 나는 너와의 인연은 끝낸다! 그러니까 너도 그동안 나와 가졌던 모든 인연은 오늘로 싹 잊도록 해라. 내 말이 무슨 뜻인 줄 알지?”

차 일만은 일어선 그를 다급하게 붙잡았다. 그렇지만 이상스럽게도 입술이 쉽게 열리지 않았다. 마음 속엔 할 말이 많은데 왠일인지 입술 밖으로는 튀어나오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결정을 한 이상 그는 미적거리지 않는 성미였다. 생각보다는 행동이 빠른 그였다. 아마도 유예 기간은 며칠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차 일만은 꺼내놓았던 흰 봉투를 다시 거두어들이며 이젠 희망이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이별은 칼처럼 무서웠으며, 늘 아픔을 동반했다. 특히 보복을 예고한 이런 이별은 죽음이라는 두려움까지 동반하고 있었다. 강 승길은 자신의 ‘가오’를 세우기 위해서라도 유예기간이 끝나는 대로 ‘아이’들을 보낼 게 틀림없었다. 벌떼처럼 달려들 그 ‘아이’들은 때로는 정면에서, 또 때로는 측면이나 등 뒤에서 자신의 목을 노릴 것이다. 밤낮의 구별도 없이, 실패하면 성공할 때까지, 끊임없이 피를 찾아 모여들 부나비들……. 누구보다도 그들의 속성을 잘 알고 있는 차 일만은 갑자기 낯선 곳에 혼자 떨어진 미아가 된 느낌이었다.

그러나 웬일일까. 차 일만은 그런 속에서도 자신의 문제보다는 자꾸만 염 은옥이가 걱정되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그 큰 배를 내밀고 또각또각 걸어갈 그녀가 큰걱정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커피숍을 빠져나온 그는 해장국집을 찾아 호텔 뒷골목으로 꺾어들었다. 위장이 굵은 사포로 긁어대는 것처럼 아프고 쓰렸다. 모두가 어젯밤 늦도록 퍼마신 술 때문이었다.


# 아주 작은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

뱃속의 아이가 건강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은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었다. 병원에 갈 때마다 한 달에 한 번씩 꼭 듣는 소리였으나, 염 은옥은 그 소리가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녀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그 소리를 들을 적마다 그녀는 늘 감사한 마음이었다. 주여, 주여……. 그녀는 눈물까지 질금거리며 두 손을 모으는 것이었다. 그러나 꿈 이야기를 할 적에는 태도가 돌변했다.

“어젯밤 말이야…….” 그날도 다른 때와 달리 미용실까지 따라 나와 앉은 어머니는 아침식탁에서 마치지 못한 그 꿈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이었다. “누군지는 나도 몰라. 그런데 암튼 너를 죽이겠다고 자꾸만 칼 들고 쫓아다니는 거야.”

한 번 입을 열면 어머니는 염 은옥이가 눈짓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머리를 손질하러 온 손님이 있어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 어쩌다가 미스 리가 말곁을 달아주면 음성은 더욱 커졌다. 누굴까, 그 사람이……. 어머니의 눈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의사 선생님이 아이는 건강하게 잘 있다니까.”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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