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분이 넘지 않는 그 시간 동안 그의 행위는 늘 그런 식이었다. 일방적으로 초콜릿을 빨았고, 일방적으로 씹어 먹고, 일방적으로 헐떡거렸다. 상대의 처지는 상관하지 않고 늘 혼자 춤을 추어댔다. 혼자만의 신명난 춤사위가 끝나면 그것으로 그의 휴식도 끝나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현지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날 잡아 잡수’하고 가만히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김 국진 이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것은 오피스텔을 나온 황 회장이 태진개발 빌딩 15층에 있는 회장실에 막 도착했을 때였다.
“아무래도 일차 시도가 실패로 끝난 모양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격앙되어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황 회장은 짜증이 났다. 도대체 그런 일 하나도 제대로 매듭을 짓지 못하는 주제에 회사 일을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결국 골프장에 나가있던 그를 불러
들였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고?”
김 이사가 들어서자마자 그는 닦달을 해댔다. 어디서 낮술이라도 한 잔 걸친 듯 얼굴이 불콰해진 김 이사는 변명을 늘어놓기에 급급했다.
“그렇지 않아도 불안하여 감시를 붙였었는데, 방금 그런 전갈을 받았습니다. 이 바보 같은 놈이 글쎄 쳐들어갔다가 칼도 한 번 뽑아보지 못하고 그냥 물러나왔다
지 뭡니까. 물론 사연이야 있겠지만, 그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김 이사는 그것이 결코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황 회장은 소태 씹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어쩌면 이 일이 생각처럼 쉽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때렸다. 그렇다면 정말 큰 일이 아닌가. 그는 마침내 다른 방도를 끄집어내기 시작하였다.
“꼭 그 길밖에는 없는 거야?”
그가 묻자, 김 이사는 처음엔 질문의 의도를 쉽게 파악하지 못하는 듯 했다. 한참 뒤에야 황 회장의 진의를 파악한 모양으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왜 없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오면서 그 일을 이젠 의논드릴 때가 되었다고 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럼, 다른 선을 하나 더 붙일까요?”
“첫 선이 일을 그르쳤다면 그렇게 해야 되는 거 아니야?”
황 회장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자금 문제가…”
“그건 걱정하지 말라고 했잖아.”
황 회장은 단호했다. 두어 번 빨던 담배를 비벼 끄고 김 이사를 건너다보았다. 그의 눈빛을 확인한 김 이사는 알겠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실패한 첫 선은 어떻게 할까요? 제거할까요?”
“아니야. 아직은 내버려둬. 한 번 실패의 쓴 맛을 본 놈이니까 이번엔 오히려 실수를 하지 않을 수도 있어.”
“그렇다면?”
“걱정하지 마. 나는 어느 쪽이든 성공하는 놈에게 당근을 줄 작정이니까.”
내말 명심해. 누가 나서건 죽이지는 말라고 해. 그는 건다짐을 받고 김 이사를 되돌려 보낸 뒤 비로소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이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어디 있다고, 그는 발아래 펼쳐진 창밖의 풍경을 내려다보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빈 집에서
그날도 북적거리던 ‘하우스’는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이렇다 할 ‘물건’도 없었으며, 며칠째 발길을 끊은 ‘일꾼’들의 모습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따금 권 상사가 데리고 있는 ‘망’들이 얼굴을 디밀었지만, 그들도 별 볼 일이 없음을 금세 감지하고는 돌아가 버렸다. 담배 연기와 땀 냄새가 사라진 ‘하우스’에는 권 상사만이 청승스럽게 술병을 끼고 앉아 지키고 있었다. ‘째보’가 새롭게 ‘하우스’를 차렸다더니 ‘일꾼’들이 모두 그쪽으로 자리를 옮긴 게 아니냐고, 차 일만이 들어서면서부터 걱정을 늘어놓았으나 권 상사는 태평이었다. “가겠다는 놈들을 몽둥이로 막을 거유?” 혼자 마신 술이 벌써 꽤나 되는 듯 그는 얼굴이 불콰한 채 차 일만을 보자 소주잔부터 건넸다.
“일찌감치 잘 왔수, 형님.”
권 상사는 마치 차 일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투로 반겼다.
건달은 술을 마실 때 대개 안주거리로 오징어 다리처럼 자신이 걸어온 추억을 훈장처럼 되씹는 게 보통이었다. 옛날 옛적 혈기 왕성하던 시절의 아슬아슬한 순간들을 떠올리며, 그것도 ‘다구리’ 맞아 몇 달씩 병원 신세를 지던 기억은 잊어버리고, 오직 이겼던 것만 골라 굿거리장단에 춤을 추듯 입에 게거품까지 물어가며 떠들어대기 십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날 웬일인지 그보다는 뜻밖에도 예수를 안주거리로 삼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천국과 구원과 회개와 사랑…. 그가 과
연 구정물에 푹 젖어있는 우리 죄를 모두 도화지처럼 하얗게 지워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형님, 거 아무래두 ‘구라’ 치고는 ‘쌩구라’ 같지 않우?”
“그래도 ‘먹물’들이 죽기 살기로 믿는 걸 보면 뭔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야.”
씨바…. 권 상사는 얼굴을 찡그린 채 재떨이에 가래침을 뱉었다. 그는 철새 같은 ‘일꾼’들은 차치하고, 먼저 꼭 예수한테 사기를 당하고 있는 것 같은 그의 아내를 어떻게 말려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차 일만도 그에 대한 해답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차 일만은 권 상사가 술잔을 앞에 두고 예수 운운 할 적마다 두꺼운 성경책을 끼고 새벽마다 교회로 가던 염 은옥이의 어머니가 떠올랐다. 정말 천국이 있다면 자신이 염 은옥을 죽인다는 것은 오히려 그녀를 도와주는 셈이 되지 않는가.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술잔에 얼비쳐 그는 권 상사가 내민 술잔을 단숨에 비워버렸다.
“오늘 ‘꼭지’가 헤까닥 돌 때까지 우리 혁대 풀어놓고 한 번 마셔볼까?”
“까짓꺼 그럽시다요, 형님. ‘일꾼’들이 없다구 해서 ‘하우스’가 뭐 바람에 녹이 스는 것두 아니구, 땅 속으로 꺼지는 것두 아니니께, 걱정 붙들어 매놓구 오늘 술이나 한 번 푸지게 까봅시다요.”
차 일만의 제의를 권 상사는 손바닥까지 쳐가며 반겼다. 형님, 이거이 우리 얼마만이유. 시에미 죽구 첨 같은디… 그는 신바람이 난다는 듯 얼굴 가득 웃음까지 헤프게 흘려가며 떠들었다.
건달은 원래 술을 취하도록 마시지 않는 게 불문율로 되어 있다시피했다. 술이 취하면 자연히 감정이 커지고, 커지다보면 예정에도 없는 사고를 저지를 수 있기 때문이고, 거기다가 평소와는 달리 몸이 마음처럼 움직여주지 않아 까딱 잘못하다가는 ‘피라미’들에게도 깨질 공산이 큰 탓이었다. 그만큼 건달들에게는 방심이란 금물이었다. 그러나 권 상사와 마주 앉은 그날의 술자리는 달랐다. 물론 며칠째 빈 집처럼 되어버린 ‘하우스’ 가 이유였다. 그러나 권 상사나 차 일만에게는 꼭 그것만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누구를 위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암튼 ‘위하여’를 외친 권 상사가 단숨에 잔을 비운 뒤 목 뒤로부터 턱까지 초승달처럼 그어진 칼자국을 한차례 쓸어내렸다. 그가 건네주는 잔을 받으면서 차 일만은 왠지 그날만큼은 정신을 잃을 때까지 취하고 싶다는 마음이 일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그 무언가에서 해방될 수 있다면 ‘삼수 갑산’에 갈망정 그날은 꼭 그렇게 하고 싶었다.
“꼭 ‘빵깐’ 같구만.”
“어디가요?”
“‘하우스’ 말이야.”
차 일만은 담배를 빼어 물었다.
그때였다. 권 상사의 휴대폰 벨이 울렸다. 혁수라는 이름을 가진 ‘일꾼’이었다. 그가 ‘하우스’의 동정을 묻는 모양이었다. 권 상사는 술 취한 어투로 대충 설명해 주고는 덤덤하게 폴더를 접었다. 예수에서 아내로 이야기가 옮기던 그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빛이었다.
“본래가 ‘일꾼’들이란 철새 같은 놈들 아니유.”
술잔을 비우고 잔을 다시 건네던 그가 차 일만을 건너다보다가 갑자기 소리내어 웃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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