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은 흐느껴 울었다. 그는 의외로 수줍은 말투로 울지 말아요, 하고 말했다.
“옆방에 또 사람이 있나요?”
그의 말씨는 너무나 공손했다. 여자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내가 너무 조용하게 말했기 때문에 여자들은 정말로 그가 돈만 빼앗고 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자들이 몇이나 있지?”
“둘이에요.”
“모두 그 방으로 가.”
사내가 여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여자들은 울면서 사내를 옆방으로 안내했다. 옆방에는 두 명의 간호사가 자고 있다가 날벼락을 맞았다. 여자들은 정신이 없었다. 그녀들은 모두 소리를 죽여 울고 있었다. 코라손 아무라오는 사내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다. 말투는 조용하고 수줍어하는 투였으나 눈빛에는 광기가 있었다. 게다가 그에게서는 술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그는 기숙사에 여자들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넌 내 아내를 닮았어.”
사내가 글로리아 데이비만에게 말했다. 그녀는 스물 두 살이었다. 코라손 아무라오는 사내가 한 눈을 팔고 있는 사이에 침대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옷을 벗어!”
사내가 글로리아 데이비만에게 지시했다. 글로리아 데이비만은 애처로운 눈으로 사내를 쳐다보았다. 여자들이 보는 앞에서 글로리아 데이비만은 사내에게 강간을 당했다. 코라손 아무라오는 사내가 여자를 강간하는 것을 모조리 지켜보았다. 그것은 짐승같은 짓이었다. 코라손 아무라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사내가 글로리아 데이비만에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다리를 내 등 뒤로 감을 수 없을까요?”
사내는 수줍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글로리아 데이비만이 어떻게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사내가 짐승같은 일을 끝낸 것은 수분도 걸리지 않아서의 일이었다.
“너희들은 여기 꼼짝 말고 있어.”
사내는 발가벗긴 글로리아 데이비만을 밖으로 끌고 나갔다. 글로리아 데이비만은 울면서 끌려 나갔다. 사내가 여자들의 방으로 되돌아 온 것은 한참이나 지나서의 일이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코라손 아무라오는 침대 밑에 있었으나 숨이 막히는 것같았다. 아직까지는 사내가 그녀가 숨어 있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여자들은 그녀가 침대 밑에 숨은 것을 알았으나 사내에게 말하지 않았다. 사내에게 말을 하고 싶어도 입에 재갈이 물려 있어서 말을 할 수 없었다. 두 번째 여자가 끌려 나갔다. 사내는 여자를 끌고 나가서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코라손 아무라오는 그 동안에 자신의 손발을 묶은 줄을 풀었다.
끌려 나간 여자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코라손 아무라오는 팔다리가 쑤시기 시작했다. 침대 밑바닥에 엎드려 있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끌려 나간 여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애들이 모두 강간을 당한 것일까?’
그것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일이었다. 그녀는 낯선 사내에게 강간을 당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글로리아 데이비만이 강간을 당하는 것을 본 그녀는 사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마지막 간호사가 사내에게 끌려 나간지도 30분이 훨씬 지났다. 창이 희미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거리를 지나가는 차량의 소음도 멀리서 들려왔다. 사방은 기이할 정도로 조용했다. 그녀는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침대 밑에서 기어 나왔다. 방밖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복도며 리빙룸 쪽이 조용했다. 사내는 떠난 것일까. 그렇다면 여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수많은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오고 갔다.
코라손 아무라오는 복도로 나왔다. 다음 순간 그녀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시카고 경찰은 살인사건 신고를 받았다. 다급한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들은 즉시 제프리 마나에 있는 간호사 기숙사로 달려갔다. 경찰은 1층 리빙룸에서 1명의 여자가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2층의 방에는 7명의 여자들이 죽어 있었다.
“맙소사!”
처음에 도착한 경찰은 시체의 참혹한 모습을 보고 밖으로 뛰쳐나와 구토를 했다. 잇달아 도착한 경찰의 감식반들도 사방에 낭자한 핏자국과 시체들을 보고 경악했다. 젊은 여자들이 8명이나 죽어 있다는 것은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도 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은 이러한 엽기적인 살인이 인간의 짓이라고 믿기가 어려웠다. 글로리아 데이비만은 1층 리빙룸의 소파에 엎드려서 죽어 있었다. 시체에는 옷이 하나도 걸쳐져 있지 않았다. 사인은 교살이었고 등에 수십 군데의 칼로 찔린 자국이 있었다. 수잔 팰리스는 교살된 뒤에 손과 발이 잘려져 끔찍하게 죽어 있었다. 또 다른 간호사는 심장과 목, 그리고 왼쪽 눈이 칼에 찔린 시체로 발견되었다. 다른 다섯 명의 간호사들도 한결같이 손과 발이 묶인 채로 살해되어 있었다.
‘이건 미치광이 유령이 저지른 짓이 분명해.’
경찰은 그렇게 생각했다. 시카고는 발칵 뒤집혔다. 7월13일 밤에서 7월14일 새벽 사이에 일어난 이 살인사건은 시카고 텔레비전을 통해 미국 전국에 알려졌다. 다행히 기적적으로 코라손 아무라오라는 필리핀계의 긴호사가 살해되지 않고 살아 있었다. 그녀는 살인마의 인상착의를 경찰에 진술했다. 무엇보다도 살인마가 몇 번이나 뉴올리언스로 가야한다는 말을 했다는 것과 팔에 문신이 있다는 단서를 제공했다. 경찰은 팔에 문신이 있는 사내를 집중적으로 수배했다.
살인마가 팔에 문신이 있다는 것과 뉴올리언스로 가야 한다는 말을 했다는 사실이 일제히 텔레비전에 보도되었다. 경찰은 보도가 지나치게 앞서 간다고 생각했으나 언론의 자유를 억압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간호사들 중에 한 여자가 그 텔레비전을 보았다. 그녀는 2주전에 데이트한 남자가 팔에 문신이 있었다고 진술했다. 사내의 이름은 리차드 스펙, 이혼한 아내가 있으며 자신이 근무하는 병원에서 맹장염 수술을 받기 위해 실려 왔다고 말했다. 경찰은 리차드 스펙이 해운회사를 통해 스펙이 뉴올리언스로 가는 선편을 물어봤다는 사실을 밝혀냈고 직업소개소에서 그의 사진까지 구할 수 있었다. 그의 사진은 텔레비전에 보도되었다.
스펙은 삼류 호텔에서 자신의 사진이 텔레비전 뉴스에 보도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자신의 손목을 잘라서 자살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병원에 실려 갔고 의사의 신고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시카고의 대량살인사건은 하룻밤에 일어난 사건 중에는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사건으로 꼽힐 것이다. 그렇다면 스펙은 왜 이렇게 잔인한 사건을 저지른 것일까. 스펙은 마약류를 복용하고 있었고 사건 당일에는 술까지 마시고 있었다. 그러나 마약과 술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러한 대량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은 충분한 설명이 안 된다. 우리는 세계적으로 악명을 떨친 여러 사건에서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 잠재하고 있는 악마의 존재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악마가 저지른 일이라는 말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피해자들 입장에서도 이 사건은 많은 교훈을 남겼다. 피해자들이 밤 12시가 되었는데도 문을 잠그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러한 살인마가 침입하는 계기를 만들어준 것이다. 피해자들이 문을 노크할 때 신분만 확인했더라도 이러한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코라손 아무라오가 효과적인 대처를 하였기 때문에 그녀는 살해되지 않았고 살인마 스펙을 빠른 시일 내에 검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끝>
12 화죽음을 부르는 욕정
살인을 제어하는 것은 이성이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살인에의 충동을 자제한다. 그러나 사회가 고도로 발달하고 개인주의가 심화되면서 살인을 억제하는 이성의 기능이 오히려 상실되어 가고 있다. 상대적인 빈곤과 박탈감은 대사회적인 분노로 발전하고 자신의 것을 빼앗은 자들에 대한 복수심을 갖게 된다. 특히 신세대들의 자유분방한 성생활, 브레이크를 밟지 않는 애정행각은 항상 위험을 수반하고 그들의 탈선은 살인을 억제하는 이성이 기능을 상실하여 살인사건이 더욱 빈번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199×년 5월 하순. 인구 1000만이 살고 있는 서울에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명동의 한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마친 23세의 청년 이정수(가명)는 계단을 내려서자 빗발이 뿌리는 어두운 골목을 우두커니 내다보고 있었다. 밤 12시가 지난 시간인데도 명동의 골목에는 많은 젊은이들이 짝을 지어 돌아다니고 있었다.
‘제기랄. 어떤 놈들은 돈이 많아서 기집년들과 팔짱끼고 돌아다니는데 나는 이게 뭐야?’
이정수는 어두운 골목을 응시하다가 배알이 뒤틀린다는 듯이 침을 칵 뱉었다. 그의 시선은 여자들의 탐스러운 둔부와 가슴께로 자꾸 쏠리고 있었다.
‘저것들은 자정이 되었는데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왜 싸돌아 다녀? 이 시간에 집으로 돌아갈 리는 없고 여관에 들어가서 한바탕 놀아나겠지.’
이정수는 그렇게 생각했다. 골목 앞을 지나가는 여자와 남자가 여관의 침대에서 나신으로 뒤엉켜 그 짓을 하는 상상을 하자 강렬한 욕망이 일어나면서 하체가 뻐근해 왔다.
‘제기랄. 돈도 없으니….’
돈이 있으면 나이트클럽에 가서 여자들과 부킹을 하여 한바탕 춤을 출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돈이 없었다. 이정수는 택시를 타고 집근처인 홍은동에서 내렸다. 아버지는 이미 잠들었을 것이고 어머니가 거실에 앉아 졸면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선뜻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는 여자들과 관계를 하고 싶었다. 여자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체가 팽팽하게 일어나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르바이트를 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수중에 돈이 없었다. 돈이 있어야 나이트클럽에 가서 여자들과 부킹을 하거나 미아리 텍사스촌이라도 찾아가는데 수중에 돈이 떨어져 있었다.
환경미화원인 아버지가 버는 돈에서 용돈을 타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아버지는 늙고 쇠잔하여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는 것을 힘들어했다. 나이 때문에 조만간 퇴직을 하게 될 것이다.
그의 집은 홍은동 고갯길에 있었다. 큰길에서 주택가 골목으로 10분쯤 걸어 올라가야 했다. 길이 가파르기 때문에 집까지 이를 때는 숨이 가빠
서 어릴 때는 평지로 이사 가자고 부모를 조른 일도 있었다.
그는 골목길을 느릿느릿 걸어 올라가다가 주택의 옥탑방을 쳐다보았다. 욕망이 점점 거세어지고 있었다. 옥탑방은 불이 꺼진 채 조용했다. 옥탑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3층 주택 외부에 설치되어 있어서 계단을 올라가도 누군가에게 들킬 염려는 없었다. 이정수는 빠르게 사방을 둘러보았다. 누구의 집인지 알 수 없었으나 옥탑방에 올라가서 돈을 훔쳐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새벽 1시가 되어서인지 골목에는 인적이 전혀 없었다.
그는 발소리를 죽이면서 3층 옥상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그러나 3층 옥상에 이를 때까지 인기척은 전혀 없었다. 옥탑방의 출입문은 잠겨 있었다. 그는 출입문 옆의 창문을 밀어보았다. 창문은 의외로 쉽게 열렸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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