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기회를 놓치다
이런 경우, 기회는 대개 우연찮게 찾아오곤 하였다. 차 일만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늘 하던 대로 찌든 때를 사우나에서 벗기고 그가 잠실역 5번 출입구 계단을 막 올라설 무렵, 뜻밖에도 미스 리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그녀를 발견한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비볐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시각쯤이면 그녀는 분명 ‘은혜 미용실’의 문이라는 문은 모두 활짝 열어놓고 청소를 하느라고 바빠야 할 시간이었던 것이다.
미스 리는 사람이 많은 속에서도 차 일만이 가까이 다가가자 먼저 알아보았다.
“출근하시는 길이세요?”
그녀는 눈웃음을 흘리면서 인사말을 건넸다. 차 일만은 얼결에 “녜에……” 하고 고갯짓으로 대충 얼버무리고는, 그런데 이 이른 시간에 도대체 웬
일이냐는 투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구태여 밝히지 않아도 될 말을 사풍스럽게 지절대기 시작하였다.
“아버님 칠순 잔치 땜에 고향 가는 거예요. 언니한테 하루 말미를 얻었어요.”
차 일만은 그녀가 그 외에도 여러 말을 해댔으나 다른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워낙 사람의 왕래가 많은 탓도 있었으나, 그녀가 토설한 그 ‘하루’라는 기회가 마침내 열흘만에 제 발로 찾아왔다는 흥분이 다른 귀를 막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차 일만은 온 몸이 감전된 듯 떨렸다. 알 수 없는 흥분이 잠자던 그의 몸통을 깨웠다. 그렇구나. 사마귀처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보면 정말 기회는 우연찮게 찾아오는 법이로구나. 그는 그 기회가 바로 오늘이라고 직감했다. 그렇다면……. 그는 미스 리와 살갑게 인사할 시간이 없었다. 서둘렀다. 웃옷 속주머니에 들어있는 일 미터 가량의 전화선을 다시 한 번 확인한 그는 곧장 아침 바람을 가르며 ‘은혜 미용실’로 잰걸음을 놓았다.
예상대로 미용실 출입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시계를 보았다. 9시 26분. 염 은옥이가 출근하기에는 이른 시각이었다. 차 일만은 늘 하던 대로 출입문이 빤히 건너다보이는 맞은 편 공터에 몸을 숨긴 채 그녀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따지고 보면 사람들의 목숨이란 질긴 것 같아도 매우 약했다. 생명줄을 놓는 시간이란 5분이면 충분했다. 구태여 목을 칭칭 동여맬 필요까지도 없었다. 한두 바퀴 감고 욱죈 뒤 그 상태로 잠시 뜸을 들이고 있으면 그것으로 족했다. 파닥거리던 몸통이 축 늘어지면 그것이 끝으로,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사람의 목숨은 개보다도 훨씬 못했다. 목이 감긴 채 공중에 동동 매달린 개는 그래도 네 발을 버둥거리며 10분은 용케 버텼다.
열흘이 되면서 강 승길의 채근은 도를 넘고 있었다. 때와 장소도 가리지 않았다. 신경질적이었던 것이 어느새 발악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하우스’ 뒷방에서 토막잠을 자다가 새벽 댓바람부터 한바탕 벼락을 맞고 선잠을 깬 차 일만은 대꾸하기조차 난감했다. 그렇다고 내 생명을 나 몰라라 내던지고, 마구잡이로 달려들어, 생짜로 멱을 딸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냥 ‘날콩’으로 씹을 생각은 하덜 마. 세상에서는 이 ‘돼지’가 다 죽었다고 하지만 아직은 네가 무시해도 되는 ‘날콩’이 아니야.”
그는 전화를 할 적마다 엄포를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기다리던 염 은옥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차 일만은 그녀라는 것을 쉽게 식별할 수 있었다.
그녀는 늘 걷던 모양 그대로 배를 쑥 내민 채 보는 사람들이 조금쯤은 거만하게 느낄 만큼 몸을 곧게 세우고, 또각또각 구두소리를 내며 걸어오고 있었다. 차 일만은 그녀의 모습이 가까이 다가오자 자신도 모르게 호흡이 가빠졌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목숨이 촌각에 달려있다는 것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다른 날과 다름없이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차 일만의 앞을 지나갔다. 미용실에 들어간 그녀는 이윽고 미스 리가 하던 대로 곧 출입문을 비롯한 문이란 문은 모두 활짝 열고 총채로 먼지부터 털어내기 시작하였다.
차 일만은 청소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사방이 터져 있는 길거리에서, 그것도 출입문이 활짝 열려있는 곳에서는 일을 벌일 수 없다는 게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하늘도 모르게……. 자칫 방심했다가 목격자라도 나타난다면 그때는 정말 용빼는 재주 없이 골로 직행할 수밖에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으며, 그럴 경우에는 ‘학교’에서 족히 15년은 썩어야 다시 민간인 얼굴을 구경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마침내 미용실 문이 닫혔다. 하나, 두울, 세엣. 차 일만은 심호흡을 한 뒤 이윽고 침착하게 출입문을 밀었다. 순간, 그의 손은 어느새 속주머니의 전화선을 움켜쥐고 있었다.
“어머, 또 오셨어요? 웬일이세요, 이 아침부터?”
그가 거침없이 들어섰으나 염 은옥은 아무 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그를 반겼다.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아침 햇살을 받아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 그러나 그때 그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으며, 맡지 말아야 할 것을 맡고 말았다.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리고 그녀의 얼굴에 가득 핀 웃음 속에서 싱그러운 로즈 우드 향기를 맡는 순간, 차 일만은 전화선을 잡았던 자신의 손아귀에서 금세 맥이 풀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실패를 의미했다.
이런 일을 단행할 경우에는 얼굴을 보지 않고 저지르는 게 불문율이었다. 무작정 달려들어 불문곡직 일을 끝냈어야 했다. 아무리 강심장을 가진 초짜라고 하더라도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얼굴에 달려들어 사정없이 목을 조인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이건 그가 예전에 일삼던 때리고 부수는 일 따위하고는 근본이 달랐다. 무너지듯 소파에 주저앉은 차 일만은 자신도 모르게 된 숨을 내쉬며 이마에 솟은 땀을 찍어내었다.
“지난 번 커트가 맘에 들지 않아서 오셨어요?”
“…….”
“그럼, 파머를 해드릴까요?”
“…….”
“파머는 서비스로 그냥 해드릴 게요.”
그날따라 염 은옥의 몸에서는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로즈 우드 향기가 짙게 풍겼다.
빌어먹을……. 차 일만은 어쩔 수없이 의자에 옮겨 앉았다. 파머는 전혀 예상치 않았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어쩔 수 없다고 자위했다.
파머하는 시간은 꽤나 길었다. 그동안은 염 은옥과 단 둘이었다.그러므로 그 ‘꽤나 긴 시간’은 따지고 보면 모두가 기회였다.
그러나 그는 끝내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 그녀가 머리를 매만지는 동안 그는 자신이 어떤 주술에 마비된 듯 다른 생각은 일체 할 수가 없었다.
차 일만이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뜻밖에도 그녀의 어머니가 강아지를 안고 미용실에 나타난 때였다.
“웬일이야, 엄마가?”
“미스 리가 없다고 해서 내가 동무나 해줄까 하고 나왔지.”
가까운 거리에서 보는 그녀의 어머니는 늘 끼고 다니는 두꺼운 성경책만큼이나 실다운 데가 있어 보였다. 말씨나 행동에서 어딘지 모르게 발밭은 요즘 사람들과는 다른 의연함이 풍겨 나왔다.
뽀글뽀글 볶은 머리가 개그맨처럼 웃겼으나 그는 웃지 않았다. 파머를 끝내고 거리로 나온 차 일만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왜 그녀 앞에 서면 자신의 마음이 자꾸 약해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잘나가던 시절의 ‘깜씨’가 아니라는 것쯤은 벌써부터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까지 자신이 약해져 있을 줄은 미처 몰랐던 일이었다. 값도 모르면서 쌀자루부터 내민 게 잘못이라는 불안감이 자꾸만 그의 뇌리를 때렸다.
대낮부터 ‘하우스’로 향하면서 그는 연신 한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한 번 실수는 병가지상사라고 하지만,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그녀의 어머니에게까지 ‘쪽’이 팔린 이상 일은 더욱 어렵게 꼬인 게 분명했다.
골목 안으로 꺾어들면서 그는 문득 강 승길을 떠올렸다.
이 소식을 들으면 그는 과연 무엇이라고 말할까. ‘남의 사정 보다가 갈보난다’고, 이러다가는 어쩌면 정말 자신이 그의 손에 의해 ‘골’로 갈지도 모르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비로소 그의 마음 한 구석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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