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는 없다 <제5회>
코끼리는 없다 <제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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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7-05-14 15:37
  • 승인 2007.05.14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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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강물아, 강물아 <제5회>

“여기 처음 오셨죠?”

염 은옥이 빗을 든 채 나서며 물었다.

차 일만은 그렇다고 고갯짓으로 대꾸했다.

“어떤 스타일을 원하세요?”

“그냥 적당히, 커트만 해주세요.”

차 일만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자신이 저승사자로 왔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을까. 그는 그녀가 자신의 머리를 만지기 시작하
자 눈을 감았다. 가깝게 다가온 그녀의 몸에서는 깊은 숲속에서나 맡을 수 있던 달콤하면서도 싱그러운 로즈 우드 향기가 났다. 그것은 이 민아가 늘 사용하던 향수였기 때문에 그도 쉽게 식별할 수가 있었다.

강 승길은 아침부터 천둥치듯 고함을 질러가며 채근을 해댔다. 그까짓 하찮은 일 하나를 빨리 끝내지 못해서 자신을 골탕 먹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차 일만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런 경우에는 각자의 사정이 다른 법으로, 이미 예상을 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원청자’들이란 대개 이처럼 일을 서둘다가도 잘못되었다는 것을 눈치 채게 되면 제일 먼저 ‘하이방’을 놓을 위인들이었으며, ‘오리발’ 내밀기에 급급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다가 일이 잘못되어 냄새 맡은 ‘짭새’들에게 발꿈치라도 물리는 날이면 ‘피박’에 ‘광박’까지, ‘따따불’로 그 책임을 몽땅 뒤집어 쓸 사람은 결국 자기 혼자뿐이라는 것을 차 일만은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이미 익히 알고 있는 터였다.

염 은옥의 손길은 빠르고도 부드러웠다. 스프레이로 머리카락을 축인 뒤 빗으며 가위질을 해대는 솜씨도 예사롭지가 않았다. 손가락이 머리를 훑어 내릴 적마다 차 일만은 자신도 모르게 진저리를 쳐대곤 하였다.

“숱이 참 많네요. 흰 머리도 없고…….”

“그래요?”

로즈 우드 향에 취한 차 일만은 잠시 고향 풀밭에 누운 느낌이었다. 그 향기는 자신이 왜 이곳에 왔는가, 하는 목적까지 잠시 망각하게 만들었다.

그는 선생님이 묻는 말에 고분고분하게 대답하는 어린 학생처럼 그녀의 질문에 대꾸하고 있었다.

이 민아를 처음 만난 곳은 한남동에 자리 잡고 있는 S나이트클럽이었다. 그녀는 그곳의 많은 여자 가운데에서 뛰어날 만큼의 출중한 미모는 아니었다. ‘화장발’이 먹히는 그곳 세계에서는 오히려 평범한 얼굴에 속했다. 그러나 갓 ‘학교’에서 나온 차 일만은 웬일인지 그녀에게 마음이 끌렸다. 그렇지만 그녀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몇 번의 만남이 있은 뒤에도 그녀는 마음을 열지 않고 망설이는 눈치였다.

“건달과는 사랑하기 싫은데…….”

“왜?”

“열심히 사랑하면 뭘 해. 사랑할 만하면 또 ‘빵’에 들어가 버리는 걸.”

“…….”

“들어가는 ‘놈’들은 차라리 들어가 앉아 있으니까 속이 편할지 모르지만, 속 터지는 건 결국 우리들뿐이잖아. 안 그래?”

이 민아는 씁쓸하게 웃었다. 웃으면서, ‘달라는 놈한테는 못견뎌’ 하고는 속옷을 벗었다. 그러나 차 일만은 그녀의 몸을 안으면서도 그녀를 가졌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밤새껏 질펀하게 놀다가도 그녀는 어느 순간 차갑게 돌변하곤하였다.

“나, 사랑하지 마. 나를 사랑하면 언젠가는 실망하게 될 거야.”

술이 취하면 그녀는 곧잘 무슨 말인지 차 일만이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혼잣말처럼 지껄여댔다. 이유를 물어도 그녀는 그냥 웃을 뿐, 밝혀준 적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차 일만은 지금까지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었다. 그녀가 유독 돈에 이악스러웠다는 것이다. 그녀가 돈을 밝힌다는 소문은 업소 안에서도 유명했다. 그 흔해빠진 일수도 찍지 않을뿐더러 섣불리 팁을 주지 않았다가는 사생결단을 하자고 덤비는 통에 단골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차 일만이 그 이유를 물으면, 그녀는 망설이지도 않고 어린 아이처럼 웃으며 시원스럽게 대꾸해 주곤 하였다.

“빨리 벌어 가지고 은퇴해서 분식집이라도 낼려고 그런다, 왜? 어디가 떫어? 화무십일홍이라는 말도 몰라? 하긴, 가방끈이 짧으니 모를 수밖에…….”

가위를 연신 재게 놀리면서 염 은옥이 다시 물었다.

“이 부근에 사세요?”

“아니요.”

“그로옴?”

“그냥 지나다가 들렸습니다. 커트할 때가 된 것 같아서.”

비로소 눈을 뜬 차 일만은 거울을 한 번 힐끗 쳐다보았다. 거울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거울 저편에는 어느새 텁수룩하였던 머리카락이 잘려나간 자신의 모습과 자신의 머리칼을 손질하고 있는 염 은옥의 얼굴이 함께 보였다.

그녀의 입가에 엷은 웃음기가 묻어있는 것까지 거울은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거울 속의 차 일만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꼭 무엇을 감추고 있는 듯 그 얼굴에는 긴장한 빛이 감돌았다. 사람의 얼굴에는 7천 가지의 표정이 있다는데, 그렇다면 자신의 얼굴을 염 은옥은 어떻게 읽었을까.

커트는 30여 분만에 모두 끝났다. 미용실을 빠져나온 그의 기분은 그러나 웬일인지 찜찜했다. 작전대로 ‘코는 뚫었으나’ 그런 기분이 도통 들지 않았다.

거리로 나설 때까지도 온몸을 감싸고 있던 로즈 우드의 향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상스럽게도 그 향기는 지워버리려고 해도 쉽게 지워지지가 않았다. 그는 비로소 이번 일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기도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고, 우리가 피할 산성이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오니, 우리를 지켜 주시옵소서. 이제 어떠한 악의 세력에도 우리 은옥이가 미혹되지 않게 하시고, 오직 말씀만을 붙들고 살아갈 수 있도록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뱃속에 든 아이가 세상에 태어날 시간이 이제 석 달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그동안도 지켜 주셨사오니, 앞으로도 무탈하게 하시고, 아무쪼록 순산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애비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태어나지만, 그 아이가 오직 건강하게 자라나 우리 가족의 기쁨이 되기만을 소원하오니, 주님이 붙잡아 주시옵소서. 주님, 앞으로 혼자 살겠다고 고집하는 딸아이의 마음을 주장하여 주시사 좋은 배필을 만날 수 있도록 예비하여 주시고, 가정을 꾸리고 사는…….”

왜 이럴 때는 눈물부터 쏟아지는 것일까. 염 은옥의 어머니는 알 수가 없었다. 오늘은 울지 말아야지, 하고 왔지만 기도를 할 적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새벽부터 나와 앉아 그녀가 기도하는 제목의 대부분은 도무지 밝은 날을 볼 것 같지 않은 딸내미의 앞날이지만, 그럴 때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가 눈앞에 떠올라 더욱 눈물을 질금거리게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애비 없이 태어날 아이의 슬픔도 딸내미가 안고가야 할 몫이라고 자위하고 있었다. 또 그런 행실을 한 자식을 기른 자신의 죄도 적지 않다고 절감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앞날이 구만리 같은 딸내미가 그것으로 인해 겪어야 할 일을 생각할 때면 암담할 수밖에 없었으며, 자꾸만 눈물이 저절로 쏟아져 내리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렇게 한 차례 울고 나면 마음이 뻥 뚫린 것처럼 시원해지곤 하였다.

“주님, 주님이 예비하신 뜻이 어디 있는지 저희들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이 슬픔과 아픔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나중에는 큰 기쁨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한 욥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게 하시고…….”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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