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는 없다 <제4회>
코끼리는 없다 <제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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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7-05-07 17:25
  • 승인 2007.05.07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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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강물아, 강물아

새벽으로 넘어가면서 ‘하우스’는 더욱 긴장이 감돌았다. 막판 끗발을 올리기 위해 꾼들은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따금 바깥 동정을 맡은 ‘망’들
이 들어와 한속을 달래기 위해 소주 한 두 잔씩 걸치고 나가느라 부산을 떠는 것 외에 ‘하우스’는 조용했다.

뒷방으로 물러난 차 일만은 소파에 비스듬히 누운 채 눈을 감았다. 그러나 잠은 오지 않았다. 염 은옥의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석 달 안에 꼭 죽어야 할 운명의 여자…. 시계 바늘은 어느새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때였다. 권 상사가 곁으로 다가왔다.

“형님, 뭐 기분 나쁜 일이라두 있었수?”

새벽인데도 그의 목소리는 또랑또랑하였다.

“없어.”

“그럼 뭐, 나 모르게 다른 일을 꾸미고 있는 거유?”

차 일만은 뜬금없는 그의 물음에 갑자기 침을 맞은 듯 마음이 뜨끔하였다. 이 자식이 무슨 냄새라도 맡았나. 하지만 차 일만은 눈을 뜨지도 않은 채 대꾸했다.

“다른 일은 무슨…….”

“그런데 왜 갑자기 ‘꽁지’를 철수하는 거유?”

권 상사는 집요했다. 그 물음에 차 일만이 대꾸를 않자 몇 번씩 되물었다. 하긴, 한물 간 퇴물이 ‘하우스’에서 ‘꽁지’까지 그만둔다면 무슨 곡절이 숨겨져 있다는 것쯤은 누구나 짐작할만 한 일이었다. 차 일만은 이참에 그에게 확실한 이유를 밝혀두는 것이 혹시라도 뒷날 도움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이젠 이 짓거리도 싫증이 나서 그래. 희망이 없어. 그래서 ‘꽁지’ 걷어서 변두리에 나가 앉아 분식집이라도 해보려고 해. 왜, 어디가 떫어?”

그건 사실이었다. ‘그 일’을 끝내면 그는 이런 일 따위에서는 완전히 손을 씻고 변두리에 나가 앉아 코흘리개들을 상대로 분식점을 차릴 요량이었다.

“떫긴요. 나는 혹시 내가 형님한테 섭섭하게 해드린 거라도 있었나 했죠 뭐.”

“짜아샤, 니가 섭섭하게 했으면 내가 가만히 있을 놈이냐?”

차 일만은 옛날에 늘 하던 버릇대로 주먹을 쥐어 그의 배를 가격하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그도 역시 옛날 하던 대로 아프다고 엄살을 떨었다.

“아무튼 딴 데로 자리를 옮기려는 것이 아니라면 됐수.”

“‘꽁지’ 안한다고 괄세하진 마.”

“그건 걱정두 하지 마슈. 내가 누구 땜에 이만큼이라두 자리를 잡았는데……. 내가 그래두 의리 하나 빼면 시체 아니유?”

권 상사는 비로소 굳었던 얼굴을 폈다. 그럴 때의 그는 천상 옛날 ‘총 나간다, 칼 나간다’하던 시절로 돌아간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때는 정말 흉허물 없이 속마음을 주고 받았었는데……. 그러나 차 일만은 입을 다물었다. 사마귀처럼, 이번 일이란 무덤 속에 들어갈 때까지 영원히 함구해야 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먹이 사슬

박 의원이었다. 발신자 번호를 확인한 황 회장은 순간 자신의 치부를 들킨 것 같은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어디야?”

“예, 운동 나왔습니다.”

얼떨결에 대꾸해놓고 황 회장은 스스로 판단해도 임기응변치고는 제법 그럴 듯하게 둘러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체력은 국력 아닌가. 열심히 해두게. 암, 출사하려면 먼저 건강부터 챙겨야지. 정치란 사람 골병들게 하는 것이거든.”

황 회장은 그가 어제 가졌던 골프 회동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여기면서도 공연히 마음이 조마조마 하였다. 그가 어떤 사람
인가. 그가 힘을 써준다면 공천쯤은 식은 죽 먹기보다도 쉽다는, 당내에서도 알아주는 실력자가 아닌가. 황 회장은 자신이 쩔쩔 매는 것쯤은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는 이어서 다음에 또 골프 라운딩을 부탁한다는 말과 출사를 위해서는 사생활을 깨끗하게 정리해둬야 한다고 일러주고는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었다. 황 회장은 곁에 있던 김 현지가 얼음물을 건넸으나 받지도 않은 채 서둘러 바지를 꿰어 입었다. 그의 눈빛은 조금 전까지 그녀의 몸 위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던 그런 눈빛이 이미 아니었다. 먹이를 향해 돌진하는 맹수와 같이 돌변해 있었다.

사생활이라……. 그는 문득 염 은옥의 뱃속에 들어있는 아이가 떠올랐다. 그 아이가 왠지 자신의 창창한 앞길을 방해할 걸림돌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오피스텔을 빠져나온 황 회장은 골프장 건설 현장에 가있는 김 이사를 곧 호출했다.

준비할 사이도 없이 졸지에 당한 날벼락이었다. 살모사처럼 독이 오른 황 회장의 목청이 고막을 때렸다. 그러나 김 이사는 건설 수주를 받기 위해 마침 자리를 함께 하고 있던 강 승길에게 그 불화살을 돌렸다.

“벌써 일주일이 지났어. 일주일이면 아이가 얼마만큼 크는 줄 아는가?”

“또 그 말씀입니까. 그 일이라면 걱정 마십시오. 석 달 안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꼭 해결이 날 겁니다.”

“만약 그때까지 해결이 나지 않는다면?”

김 이사는 눈을 사납게 치떴다.

“그때까지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땐 제가 직접 나서겠습니다.”

강 승길은 선선히 대답했다. 그의 얼굴은 어느새 굳어 있었다. 사람 좋은 웃음이나 헤실헤실 흘리고 있을 계제가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
다. 오늘은 꼭 공사 계약서에 사인을 받아가려고 아침부터 부랴부랴 찾아왔는데……. 차 일만, 이 자식이 그까짓 일 하나를 처리하지 못해서 내 얼굴을 구겨놔! 그는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닫힌 문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옛말은 조금도 틀린 데가 없는 말이었다. 아침 미행을 마친 차 일만은 곧장 ‘은혜 미용실’로 향했다. 아이들이 모두 학교에 간 이 때쯤은 아파트 단지가 온통 비어버린 듯 한가했다.

며칠 동안 궁리한 끝에 내린 결과였다. 아무리 곰곰이 따져보아도 장소는 미용실만한 곳이 없을 듯싶었다. 한가한 오전 무렵을 택해 사마귀처럼 그곳을 집중적으로 노리고 있다 보면 기회는 제 발로 찾아올 게 분명했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커트를 빙자한 첫 내방은 탐색전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심호흡을 한차례 한 뒤 그는 이윽고 미용실 출입문을 밀었다. 미용실은 역시 그가 예상한 대로 한가했다. 그가 들어서자 소파에 앉아 있던 염 은옥과 미스 리가 일어서며 반갑게 맞이했다.

“커트나 할까 하는데…….”

차 일만은 미스 리가 권하는 의자에 앉으며 쑥스럽다는 투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러나 그는 사방을 눈여겨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실내는 생각
보다 넓은 편이었으며, 인테리어도 비교적 현대식으로 깔끔하게 마감되어 있었다. 네 개의 의자가 놓인 가운데에는 큰 거울이 방안의 전경을 비추고 있었고, 맞은 편 벽면에 서있는 서랍장에는 매직기, 드라이기, 세팅 롤 등과 각종 가발을 비롯한 전기 모자 등 소도구들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으며, 소파 앞에 놓인 테이블에는 겉면이 가죽으로 된 성경책과 잡지가 아무렇게나 누워 있었다. 또 염모제와 클리닉 제품, 스타일링 제품 등이 놓인 옆 벽장 아래로는 출입하는 작은 방이 있는 듯 꼭 닫히지 않은 쪽문이 하나 보였으며,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글자가 음각된 목판 아래 놓인 꽤 큰 화면의 텔레비전에서는 아나운서가 주부들과 건강에 관한 대담을 나누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살펴본 염 은옥은 이미 낯선 얼굴이 아니었다. 일주일 동안 줄곧 따라붙었던 탓일까. 이웃집 여자 같이 낯익었다. 이 민아를 많이 닮은, 그린 듯 곱게 쌍꺼풀 진 눈망울과 배를 내민 채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입가까지도 웬일인지 정겹게 느껴졌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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