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끼
새벽바람은 찼다. 4월로 접어들면 꺾일 때도 되었는데 옷깃으로 파고드는 꽃샘추위의 기세는 누그러들 줄을 모르고 있었다. 더구나 황사주의보까지 내려져 새벽부터 부황이 들린 듯 누런 색깔을 띠고 있는 하늘은 행인들의 어깨를 움츠러들게 하고 있었다. 파장 무렵 먼저 잠실의 권 상사네 ‘하우스’를 빠져나온 차일만은 찬바람을 맞자 진저리를 몇 번 쳐대었다. 웬 놈의 바람이 새벽부터 지랄이야. 인근의 사우나로 종종걸음을 놓으면서 그는 연신 투덜거렸다. 조금만 더 죽치고 앉아 있으면 개평은 따 놓은 당상이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오죽하면 ‘꽁지 돈’ 회수까지도 다음으로 미루고 나온 판국이 아닌가. 그만큼 어젯밤 걸려온 강승길의 호출
은 그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계약금이 천만 원짜리인데, 한 번 뛰어보지 않을래?”
강승길은 그가 지금 어떤 곤경에 처해있다는 것을 이미 간파하고 있다는 투였다.
“요즘 힘들다며? 그렇다고 ‘하우스’에서 아이들 코 묻은 돈 몇 푼씩 얻어먹고 산다면 그게 어디 말이 되겠나, 그래도 왕년에는 한 번 ‘떴다’하면 산촌초목이 벌벌 떨던 깜씨인데 말이야…….”
그는 사람을 추켜세우는 데에는 여전히 일가견이 있었다.
‘소공동 프라자 호텔 커피숍이야, 오전 열 시.’ 차일만은 대꾸할 말을 잃은 채 그가 전화를 끊을 때까지 일방적으로 듣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사우나탕 안에서도, 사우나탕을 나와서도 차일만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부동산 경기를 타고 건설 회사를 차려 잘나간다는 소문이 자자한 그가 젊은 아이들 등쌀에 그나마 나이트클럽 상무 자리에서도 밀려나 이제는 겨우 ‘하우스’의 뒷방이나 차지하고 있는 자신을 갑자기 찾을 일이란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오직 그가 감지할 수 있는 것이란 “이런 일엔 너를 따를 자가 없어. 네가 딱 적격이야.” 하는, 전화를 끊기 직전에 강승길이가 뱉어낸 말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잘하면 요즘처럼 ‘궁짜’가 끼어있는 판국에 돈 천만 원이 굴러들어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게 모습을 드러낸 강승길은 ‘현역’에 있을 때와 달리 머리가 많이 벗겨져 있어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차일만을 발견한 그는 여전히 그 큰 몸통을 느리게 움직이며 사람 좋은 웃음을 얼굴 가득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차일만은 잘 알고 있었다. 행동이 늘 느린 듯 보이지만 정작 빨라야 될 때는 누구도 감히 따를 자가 없을 만큼 재다는 것과 그 웃음 뒤에 감추어져 있는 살기를…….
“우리 몇 년 만에 보는 거지?”
“글쎄요……. 한 삼 년은 되는 것 같습니다.”
“벌써 그렇게 되었지?”
강승길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그는 이미 소식을 들어 알고 있다는 듯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는 식의 인사말은 생략하였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그는 곧 ‘그 일’을 꺼내놓기 시작하였다.
“상대는 여자야. 여자니까 더 쉽지 않겠어?”
강승길의 얼굴에는 어느새 그 사람 좋아보이던 웃음기가 사라졌다. 금테 안경 속에서 차갑게 번득이는 뱀눈이 예전의 돼지 형을 다시 연상케 하였다.
“기간은 삼 개월. 묻어버려. 땅 속에 묻으면 만사 오케이야. 안 그래?”
“그래도 어떻게…….”
차일만은 착잡했다. 아무리 상대하기 쉬운 여자라지만, 그것은 살인이었다. 잘못하면 평생 어두운 ‘학교’에서 썩을 수도 있는, 사람을 죽이는 일이었던 것이다. 사우나탕에서, 또 이발소에서 혹시 그런 일일지도 모르겠다고 어림짐작은 하였으나 막상 ‘그 일’이 그런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갑자기 가슴이 떨려왔다. ‘현역’에 있을 때 이따금 채무자를 겁주기 위해 발가벗겨 구덩이 속에 집어넣고 파묻어버리겠다고 삽질은 한 적이 있었고, 또 ‘나아바리’를 침범한 다른 조직원에게 칼질을 하여 다리병신을 만들어버린 적은 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살인은 한 적이 없었던 차일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나마도 그때는 단독이 아니라 여러 명이 함
께 ‘다구리’로 행하였던 것이 아닌가. 하지만 강승길은 이미 차일만이가 받아들인 것으로 기정
사실화하고 있었다.
“착수금 일천만 원, 중도금 오천만 원, 일이 끝난 뒤의 잔금 일억 사천만 원. 어때? 이만하면 구미가 당기는 일이지?”
“…….”
“누구의 사주인가는 묻지 마. 그건 내 소관이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물론 알고 있겠지? 어떤 불상사가 일어난다 할지라도 입에 ‘쟈크’를 채워야 한다는 것. 사실 너를 선택한 이유 중의 하나도 바로 그 점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야.”
차일만은 강승길이 또 케케묵은 인천 송도 사건을 떠올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S나이트클럽 백 사장 린치 사건. 십여 명이 떼거리로 몰려가 지금까지도 폐인이 되어 휠체어를 끌고 다니도록 두들겨댔으나 결국 그 사건은 차일만이 함구함으로써 경찰에서도 어찌 할 수 없이 그의 단독 범행으로 사건을 마무리 하였으며, 그를 구속 수감시키는 것으로 일단락 시켰던 일이었다.
“작은 액수가 아니야. 이억이 걸린 일이야.”
그래, 이억이야. 차일만은 잔에 남아있던 커피를 한꺼번에 목구멍으로 넘겼다. 목젖을 타고 넘어가는 커피가 뜨거웠으나 그는 뜨거운 줄도 몰랐다. 그의 말대로 이억은 구미가 당기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기회는 날마다 오는 게 아니야. 듣자하니 계수님과도 헤어졌다며?”
그는 안쓰럽다는 투로 차일만을 건너다보았다.
“어차피 정식으로 머리 올리고 산 처지도 아닌데요 뭐.”
그 소문은 또 어떻게 들었을까. 차일만은 그가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걸 새삼 느끼며, 문득 아내를 떠올렸다. 이민아……. 마지막 ‘학교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나왔을 때 그녀는 그의 머릿속에 모습만을 남겨놓은 채 이미 어딘가로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소문에 의하면 영업을 뛰던 나이트클럽에서 ‘물주’를 하나 물고 잠적했다는 것이었다. 그 소식을 듣자 그는 피식 웃고 말았다. 아우들이 찾자고 성화를 부렸으나 그는 만류하였다. 어차피 깨진 쪽박을 찾아서 뭐해. 그는 그녀의 행복까지는 빌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원망하지도 않았다.
“이번 일을 깨끗하게 처리하고 다시 새 출발을 해. 돈만 있으면 그까짓 것들은 길거리에 널려 있으니까, 신경 끄고…….”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인 강승길은 이번엔 양복 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내 건네주며 여자에 대한 신상 정보를 조곤조곤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문제는 그 년이 필요 없는 아이를 뱃속에 가지고 있다는 거야.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의 아이를 꼭 낳고 말겠다는 심사는 무슨 억하심정인지, 원. 어쨌든 그 년 고집이 목숨을 재촉한 꼴이야.”
차일만은 사진을 자세히 훑어보았다. 사진 속의 여자는 아무 것도 모르는 듯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입을 살짝 벌리고 웃는 얼굴이 고왔다. 이름은 염은옥. 나이는 서른세 살. 미용실 운영. 그렇지만 아무리 뜯어보아도 강승길의 말처럼 그렇게 고집불통으로 보이지는 않는 얼굴이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갸름한 얼굴선이 연약해 보이는 여자였다. 석 달 안에 죽어야 할 여자라서 그런가, 어딘지 모르게 자꾸만 불쌍하다는 느낌이 드는, 그런 생김새였다.
“이유는 그것뿐인가요?”
“어디 그것뿐이겠냐? 그렇지만 그건 우리가 알 필요 없지 않아?”
그럴 테지……. 어디 이유가 그것뿐이겠어. 물어보나마나지. 남자와 여자 사이라는 것이 좋을 때는 죽고 못 살다가도, 정이 떨어지면 원수지간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차일만은 알겠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왜, ‘현역’을 부르시지 그러셨어요? 이런 일은 아무래도 그쪽 아이들이 제격일 텐데. 형님도 아시다시피 저야 이젠 한물간 퇴물이잖아요…….”
“그래서 더욱 네가 적격이라는 거야. 걔네들은 겁대가리가 너무 없어서 잘못하면 오히려 일을 그르칠 수가 있어. 또 주둥이가 헤퍼서 일이 터지면 감당하기도 힘들구. 거기다가 걔네들은 ‘짭새’들이 늘 눈독을 들이는 요주의 인물들이잖아.”
그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끄며 힘을 주어 말했다.
“이억은 모두 제몫입니까?”
차 일만은 다시 사진을 자세히 훑어보았다.
“물론이지.”
강승길은 시원스럽게 대꾸했다.
빌어먹을……. 차일만은 어금니를 힘껏 물었다. 그래 해보는 거야. 한 번 ‘햇가닥’해서 까짓 ‘꽁지’ 생활 청산하구, 멋들어지게 살아보는 거야. 차일만의 눈앞에는 갑자기 빳빳한 지폐 뭉치가 떠올랐다. 어디선가 갑자기 돈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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