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마크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호이트만은 마크를 총으로 쏴 죽였다.
이어서 마크의 숙모와 이모를 총으로 사살했다. 뇌속에서 이상한 울림이 계속 울려왔다. 그것은 종탑에 올라가 사람들을 향해 총을 난사하라는 울림이었다.
호이트만은 종탑으로 올라갔다. 종탑에서는 텍사스 대학의 캠퍼스가 한 눈에 내려다보였다. 11시 48분이었다. 이때 텍사스의 오스틴 경찰서에는 살인사건이 접수되고 있었다.
살인사건이 발생한 곳은 텍사스 대학이었다. 신고한 사람은 살인마가 라이플총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경찰은 즉시 전 경찰에 비상출동을 지시했다.
그 시간 대학교의 종탑에 올라간 호이트만은 종탑에서 캠퍼스를 내려다보며 라이플총을 난사했다. 호이트만이 총을 난사하기 시작한지 20여분 만에 15명이 현장에서 총을 맞고 죽었다. 텍사스는 발칵 뒤집혔다. 기동타격대가 출동하고 저격수들이 동원되었다. 주경찰은 헬리콥터에 저격수를 태우고 종탑을 비행하면서 호이트만을 사살하려고 했다. 그러나 호이트만이 맹렬하게 응사했기 때문에 헬리콥터는 종탑으로 접근할 수 없었다. 텍사스 대학의 종탑 근처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대학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기동타격대의 저격수는 종탑의 계단을 통해 호이트만에게 접근했다. 호이트만은 전쟁을 하듯이 맹렬하게 저항했으나 마침내 3명의 저격수들에게 사살되었다. 7월31일 밤 어머니를 살해한 시간부터 종탑에서 사살되기까지 호이트만은 무려 21명의 죄 없는 사람들을 살해했고 28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전대미문의 이 사건에 미국은 경악했다. 매스컴은 대대적으로 이 사건을 보도하고 종탑 근처를 지나가다가 느닷없이 날벼락을 맞은 피살자의 가족들은 통곡했다. 호이트만의 사체는 부검되었다. 의사들이 뇌를 절개하자 자두 알만한 크기의 종양이 좌뇌에서 발견되었다. 법의학자들은 뇌의 종양이 호이트만의 신경을 자극하여 대량의 인명을 살상한 것으로 추정했다.
제6화 성모와 창녀의 시대Ⅰ
성의 욕망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서양에서는 성경을 토대로 인류 역사를 기술하기 때문에 창세기에서 하느님이 아담을 창조하고 아담의 갈빗대로 이브가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이브는 에덴동산에서 뱀의 유혹에 넘어가 무화과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원죄―욕망을 갖게 되었고 그로 인해 출산의 고통을 알게 된다.
종교적인 관점이 아닌 과학적인 관점에서는 이와 약간 다르다.
인류는 약 600만 년 전에 지구상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6만 년 전에 유인원에 가까운 인간의 모습으로 존재했다.
이때 인간의 수명은 고작 20세 이하였다. 인간들의 욕망 역시 종족을 보존시키기 위한 단순한 본능에 지나지 않아 후배위로 교미를 했다.
이어서 인류는 장족의 발전을 하여 호모 파베르(노동을 하는 인간), 호모 사피엔스(생각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즐기는 인간)로 발전했다.
성적인 욕망은 호모 루덴스 시대에 와서 비로소 이루어졌다. 인간의 섹스도 후배위에서 정상적인 체위로 바뀌었다. 이것은 인간의 암컷, 여자가 수컷인 남자를 받아들일 때 공격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버리고 욕망, 혹은 쾌락을 함께 하는 존재라는 인식을 바탕에 깔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후 인간의 욕망은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인류는 나날이 발전했다. 여자들은 동굴에서 아이를 낳아서 키우고 남자들은 밖에서 사냥을 했다. 씨족사회가 부족사회로 바뀌고 부족사회가 봉건 군주국가로 발전했다. 이때부터 남녀는 결혼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짝짓기의 욕망을 합리적으로 해결했다. 그러나 욕망은 일대일의 것이 아니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더 많은 욕망을 위해 다른 부족들의 여자들을 빼앗았다. 모계사회에서는 여자가 남자들을 지배했으나 부계사회에서는 남자가 여자들을 지배했다. 고대의 많은 전쟁에서 여자들은 한낱 전리품으로 취급되었다.
서양의 고대 문명 발상지에는 유녀(遊女)들이 많았다. 이들은 대부분 창녀들로서 많은 남자들과 자유롭게 교접을 했다. 권력자들은 많은 여성을 거느렸고, 여성들이 낳은 자식들은 군사력이나 노동력으로 활용되었다. 여성은 단순히 생산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영웅 시저는 희대의 탕아였다. 그가 소아시아와 갈리아 원정을 마치고 돌아올 때 사람들은 ‘로마인들이여, 여자들의 몸을 단정히 하라. 희대의 색마, 간통의 명인, 대머리 시저가 돌아오고 있다’하고 외치고 돌아다녔다. 시저는 한때 황제의 치아(稚兒 : 남창) 노릇을 한 적도 있었다. 그가 소년이었을 때 얼굴에 화장을 하고 여자의 옷을 입고 황제의 페라치오를 했다는 것이다.
로마시대나 그리스시대 모두 정절에 대한 관념은 없었다. 로마와 그리스 모두에 호화로운 목욕탕 문화가 발전했고 이것은 섹스의 욕망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로마 황제 클라우디스의 후처인 황후 메사리나는 다음증(多淫症) 환자로 유명했다. 황후 메사리나는 황제 한 사람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녀는 황실 주위의 많은 남자들과 정사를 벌였다. 황제는 늙고 병들어서 그녀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이 무렵 사람들은 하루에 섹스를 5, 6회 이상을 해야 정상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16세기까지 거의 불문율처럼 여겨지고 있어서 르네상스 시대의 속담에 1회는 시식(試食)―맛보기에 지나지 않고, 2회는 신사의 예의, 3회는 숙녀의 의무, 4회는 아내의 권리라는 말이 널리 퍼졌다.
정숙한 여자로서 규범을 지키기 위해서는 하루에 6회로 성교를 제한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린 여왕도 있었다.
현대의 남자들이 들으면 기절할 노릇이다.
이 무렵에 여자들의 욕망은 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럽의 염부전(艶婦傳)에 소개된 한 귀부인이 다음과 같은 불만을 터트리는 부분이 있다.
“우리 주인은 풍류에 있어서는 무적의 강자라고 큰 소리를 치지만 사실은 하룻밤에 네 번밖에 하지 못해요.”
하룻밤에 네 번의 섹스를 하는 남자, 그러한 남자에게 귀부인은 불만을 터트리고 있다. 유럽에서 성에 대한 욕망은 광기처럼 번지고 있었다. 로마 황실의 타락은 그 영향권에 있던 유럽으로 빠르게 번졌다.
박해받던 가톨릭이 전면에 등장하여 로마는 교황시대로 바뀌었다.
교황이 전 세계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그는 자연스럽게 많은 부와 권력을 소유하게 되었다.
부와 권력을 소유하게 되자 교황들이 타락하게 되었다. 로마의 많은 교황들이 매독과 성병으로 죽고 남창을 하는 교황들도 있었다.
부인과 첩을 둔 교황, 부인들과 간통한 교황이 속출했다.
로마의 타락은 유럽에 그대로 전파되었다. 르네상스시대에 유럽은 가톨릭이 지배하고 있었다. 중세 유럽의 귀족들은 장자에게 상속권이 있었는데 그들은 귀족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세습 받아 행사했다.
또 하나의 권력기관은 가톨릭의 사제와 수도승들이었다. 가톨릭의 수도승들은 막강한 교회법을 휘두르며 권력의 상층부에 있었다.
장자가 아닌 차남이나 기타의 다른 자식들은 권력의 핵심에 도달하기 위해 기꺼이 수도자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에 신앙심과는 거리가 멀었고 청빈한 수도자의 길을 걷는 것을 거부했다.
이러한 함량 미달의 귀족 자제들이 수도회로 들어왔기 때문에 수도원은 타락의 온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1563년 오스트리아 베네딕도회의 수도원 쇼텐에서는 9명의 수도사가 2명의 본처, 7명의 첩, 8명의 자녀들을 두고 있었다. 가르스텐의 수도사 18명은 12명의 본처, 12명의 첩, 19명의 자식을 두고 있었다.
이것은 당시의 오스트리아 교회 조사관들이 조사한 뒤에 상부에 올린 보고서에 기록된 내용이다.
16세기 중엽 로마 가톨릭은 이처럼 부패해 있었다. 수도원이나 수녀원들은 거대한 사창가처럼 변하고 말았다. 수녀원들은 귀족들의 공인된 매춘 장소였다.
수도사들은 전통적으로 금욕과 청빈하게 살면서 기도 생활을 했었다. 그러나 16세기에 이르러 로마의 가톨릭이 타락하면서 유럽의 수도원들도 타락의 온상이 되었다.
수녀원의 화장실에는 아이들이 버려지고 갓난아기의 시체를 벽속에 넣고 흙을 바르는 일도 있었다. 물론 로마 가톨릭 전체가 이토록 타락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당수의 수녀원들에 있는 수녀들은 ‘상반신은 성모(聖母)고 하반신은 창녀(娼女)’라는 말이 파다하게 나돌았다. 이와 같은 일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기록이 있다.
1589년, 베네딕도회의 성마르게리타 수도원에 14세의 마리안나 테레바가 입교하게 되었다.
그녀의 모친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딸이 천주교에 입교하여 훌륭한 수녀가 되기를 바랐다.
마리안나는 어머니의 소원대로 3년 동안의 수습 기간을 거쳐 바르지니아 마리아라는 수녀명을 얻고 그때부터 기도와 봉사생활을 하면서 청빈하게 지냈다.
그녀의 나날은 기도와 봉사생활의 연속이었다.
1896년 마리아는 수녀원에서 약간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그것은 수녀가 되려고 하는 수녀학교 여학생들의 사생활을 감시하는 일이었다. 그녀는 기도와 자신의 직무에 성실하게 봉사하여 칭송을 받았다.
그녀는 언제나 가난한 병자들을 도왔고 불행에 빠진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했다. 사람들은 그녀의 눈이 동정녀 마리아처럼 성스럽게 반짝인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어느날 그녀는 저녁 기도를 마치고 자신의 방 창으로 수녀원 옆에 있는 오스트리아의 귀족 오시오가(家)의 정원을 내다보고 있었다.
정원을 내다보는 일은 가끔 있었으나 꽃이나 아름다운 정원수들을 보는 것이 고작이었고 사람을 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사람이 정원에 있다고 해도 하인들이었다. 그녀가 내다보고 있는 정원에서는 젊은 남자와 여자가 정원수 아래서 다정하게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으로 생각했으나 관심을 갖고 보자 남자와 여자가 껴안고 호색적인 유희를 즐기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에게 기묘한 자세로 안긴 채 듣기에 민망할 정도로 자지러지는 신음을 내지르고 있었다. 자세히 보자 남자의 손이 여자의 드레스 안에 들어가 있었다.
“세상에…!”
마리아는 경악했다. 그러한 일은 처음 보는 일이기도 했으나 상대방 여자가 수녀원에 적을 두고 있는 여학생이라는 사실 때문에 더욱 놀랐다. 여
학생은 수녀학교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신앙심이 철저했던 마리아는 분노와 수치심으로 얼굴이 붉어졌다.
남녀의 교접은 짐승같은 짓이라고 배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세차게 뛰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녀가 보고 있는 사이에 젊은 남자와 여자는 점점 대담해져 드레스를 벗고 음탕한 짓을 벌이기 시작했다. 여자의 희디흰 나신과 남자의 하얀 엉덩이를 뚜렷이 볼 수 있었다.
그것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기묘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리아는 그들을 보고 있는 사이에 온 몸이 나른해져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런 짓은 묵과할 수 없어.’
1896년 마리아는 수녀원에서 약간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그것은 수녀가 되려고 하는 수녀학교 여학생들의 사생활을 감시하는 일이었다.
그녀는 기도와 자신의 직무에 성실하게 봉사하여 칭송을 받았다.
그녀는 언제나 가난한 병자들을 도왔고 불행에 빠진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했다. 사람들은 그녀의 눈이 동정녀 마리아처럼 성스럽게 반짝인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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