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치하에 백백교 감언이설에 속아 처참한 죽음…
일제치하에 백백교 감언이설에 속아 처참한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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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7-02-28 14:52
  • 승인 2007.02.28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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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전 세계 최대 살인사건 백백교

형사들은 일단 본서인 동대문경찰서장에게 보고했다. 동대문경찰서장은 총독부에 보고를 하고 일본 육군대신을 지낸 조선총독 미나미 대장은 경무국에 철저하게 조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14개의 형사대를 조직하여 일제히 백백교에 대한 수사에 들어가 불과 한 달 만에 백백교 간부 150여명을 검거하기에 이르렀다. 백백교의 지부, 사업장, 수련원, 개간지에 형사들이 급파되었다. 조선은 발칵 뒤집혔다. 서울의 각 경찰서들은 백백교 간부들의 진술에 의해 양주, 강계, 양평 등에서 수십 구의 시체들을 발굴했다. 김서진 문봉조 등 백백교의 간부들도 속속 검거되었다. 그러나 백백교의 교주 전용해는 검거되지 않고 있었다. 전용해의 밀정 정삼례는 양주에 도망쳐 숨어 있다가 형사들에게 잡혀왔다.

일본 경찰은 이순문을 신문하기 시작했다. 이순문은 전용해의 비서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백백교의 비밀을 누구보다도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이순문에 의해 백백교의 지부 간부들의 집주소가 낱낱이 밝혀졌다.

“전용해를 검거하라!”

경찰은 연고지에 형사대를 파견하여 추적에 나섰다. 전용해는 경찰이 수사에 나서고 있는데도 며칠 동안 경성부 안에서 유유히 돌아다니며 도피자금을 마련한 뒤에 행방불명이 되었다가 살인마 벽력사 이경득이 살고 있는 양평군 단월면 행소리로 내려갔다. 그러나 그 집에는 하루밖에 머물러 있지 않고 다시 이한영의 집으로 옮겼다. 이한영은 양평 지부의 책임자로 전용해에게 많은 돈을 바쳐 첩까지 하사받은 인물이었다.

“대원님, 어서 오십시오.”

이한영은 백백교의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었다는 것도 모르고 전용해를 극진하게 맞이했다. 이경득은 그때까지도 체포되지 않고 전용해를 뒤따르고 있었다.

“네 첩을 방에 들여라.”

전용해는 이한영이 술상을 차려 올리자 그에게 하사했던 첩인 장자봉, 장손희, 장해순을 불러들여 술을 따르게 했다. 그녀들은 모두 20대의 꽃다운 여인들이었다.

“너는 물러가라.”

전용해는 이한영을 물러가게 한 뒤에 첩들에게 술을 따르게 하고 수청을 들게 했다. 세 여인은 전용해의 명령에 억지로 옷을 벗고 성의 노리개가 되었다. 이한영이 아침에 그 방에 들어가 보자 세 여인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목이 졸려 죽어 있었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이한영은 경악했다. 경찰의 추적은 그동안에도 계속되어 양평의 단월면까지 형사대가 내려와 수사에 나섰다. 이경득은 행소리의 집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고 전용해는 다시 이삼득의 집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전용해는 이삼득의 집에 나타난 후에 행방이 묘연해져 경찰의 맹렬한 추적에도 꼬리가 잡히지 않았다.

1937년 4월6일 양평군 단월면 행소리 속칭 비솔고개라고 불리는 산봉우리 부근에서 나무를 하던 마을 주민이 끔찍한 시체를 하나 발견하고 단월면 주재소에 신고를 했다. 주재소 순사들이 달려가 보자 시체는 오른손에 나이프를 쥐고 있었고 오른쪽 뇌가 반쯤 손상되어 있었다. 의사가 부검을 하
자 나이프로 뇌동맥을 끊어서 죽은 것으로 밝혀졌다. 일본 경찰은 이 시체를 희대의 살인마 전용해가 자살한 시체라고 결론짓고 사건을 종결했다.

전용해의 죽음에는 여러 가지 의문이 남아 있다. 전용해와 같은 희대의 살인마가 스스로 뇌동맥을 끊어 자살했다는 사실이 수긍이 가지 않는다. 일
부에서는 장자봉, 장손희, 장해순 등 세 명의 첩을 살해당한 이한영의 복수에 의해 죽음을 당했을 가능성이 더 많다고 추정하고 있으나 전용해가 죽었기 때문에 진실은 영원히 밝혀지지 않았다.

1937년 2월에 밝혀진 백백교 사건은 3년 동안이나 조사와 재판이 계속된 끝에 1940년 5월5일에야 1심 판결이 나왔다.

검찰은 발굴한 시체를 일일이 부검해야 했다. 그러나 부검비가 100원이나 되었기 때문에 막대한 예산이 소용되어 약 200구 밖에 부검을 할 수 없었다. 부검비만도 일본 경찰은 1만2,000원이나 들였다. 2심은 1941년에 판결이 났는데 이순문, 이경득, 문봉조, 김서진을 비롯하여 백백교 간부 11명과 호상꾼 김차옥, 백학은, 고양이, 밀정 정삼례 등에게 사형이 선고되어 백백교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살인귀들은 14명이 되었다.

1930년대 수많은 조선인들이 백백교의 마수에 걸려들어 비참하게 죽음을 당한 것은 일제 치하에서 생활의 터전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백백교가 집중적으로 파고든 것은 글자조차 모르는 하층민들이었다. 조선의 소작농들은 일본인 지주들로 인해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다. 1년 내내 농사를 지어도 가을철에 수확을 하게 되면 일본인들이 몽땅 가져가고 소작인에게 남는 것은 석 달도 견디기 어려운 벼곡식 약간뿐이었다. 조선인들
은 겨울이 지나 춘궁기가 되면 양식이 떨어져 풀죽을 쑤어먹어야 했고 일본인들에게 딸을 팔거나 종노릇을 해야했다.

그것은 가난한 조선인들 대부분이 마찬가지였다.

찬바람이 불면 길거리에 굶어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낙엽처럼 뒹굴었다.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인들의 착취에 견디다 못해 유리걸식을 하면서 눈보라가 몰아치는 신천지인 만주로 떠났다. 문이순도 가족들을 데리고 만주로 떠나려고 했다. 조선에서는 도저히 아내와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때 백백교가 구원의 손길을 뻗쳐왔다. 문이순은 백백교를 믿으면 불로장생하고 일을 하지 않아도 부자가 된다는 감언이설에 속아 백백교에 입교하여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 <끝>



<제2화> 드럼통속의 알몸시체Ⅰ

1913년 6월 8일, 안나 그라노프는 부푼 꿈을 안고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를 향해 열차를 타고 가고 있었다. 1913년은 제정 헝가리가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1년 앞두고 무거운 전운에 휩싸여 있었다. 그러나 36세의 노처녀, 귀족의 저택에서 요리사로 일을 하고 있는 안나 그라노프에게 전쟁 따위는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녀는 미지의 남자에게서 부다페스트에서 만나자는 전보를 받고 오로지 그에 대한 상상으로 머릿속이 가득차 있었다. 물론 서신은 그녀가 먼저 보냈다. 베라스키라는 남자가 구혼광고를 냈고, 그녀는 그 구혼광고에 응하여 서신을 보냈던 것이다.

…나는 금발의 머리에 푸른 눈을 갖고 있소. 그대는 붉은 장미꽃을 머리에 꽂으시오. 그러면 우리는 서로를 쉽게 알아볼 것이오.

미지의 사내가 그녀에게 보낸 전보였다. 안나 그라노프는 그 전보를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었다. 6월이었다. 열차는 부다페스트를 향해 짙푸른 초원을 쉬지 않고 덜컹대며 달리고 있었다. 열차의 차창으로 야생화가 만발한 초원과 그림처럼 아름다운 집들이 지나갔다.

‘나도 결혼해서 저런 집에 살 수 있을 거야.’

안나 그라노프는 행복한 상상에 잠겨 있었다. 부다페스트는 고색창연한 도시였다. 그날 오후 늦게야 부다페스트역에 도착한 안나 그라노프는 장미꽃을 머리에 꽂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부다페스트역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안나 그라노프양?”

그때 그녀의 뒤에서 굵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안나 그라노프는 등을 돌렸다. 금발머리에 푸른 눈, 그리고 깨끗한 양복을 입은 핸섬한 사내가 서 있었다. 안나 그라노프는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녀가 상상 속에서 기대한 남자보다 훨씬 잘 생긴 사내였다.

“네.”

안나 그라노프는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전보를 보낸 베라스키입니다. 당신은 정말 아름다운 분이군요.”

베라스키가 안나 그라노프의 손을 잡고 정중하게 키스했다. 사실 안나 그라노프는 미인이라기보다는 추녀에 가까운 편이었다. 안나 그라노프는 황홀했다. 그녀는 베라스키의 안내를 받으며 부다페스트를 관광했다. 베라스키는 그녀에게 팔을 내밀었고 그녀는 귀부인들처럼 베라스키의 팔짱을 끼고 유서 깊은 부다페스트 거리를 구경했다. 베라스키는 그녀와 나란히 걸으면서 비단결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안나 그라노프에게 결혼을 하고 싶다고 프러포즈를 하고 반지를 끼워주었다. 안나 그라노프는 기꺼이 프러포즈에 응했다. 거리에서는 많은 여자들이 베라스키의 팔짱을 끼고 걷는 그녀를 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의 집은 친코타라는 마을에 있습니다.”

베라스키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한 뒤에 그렇게 말했다. 친코타는 부다페스트에서 40리나 떨어져 있는 마을이었다.

“저는 괜찮아요. 당신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상관이 없어요.”

안나 그라노프는 행복에 잠겨 베라스키를 따라 친코타의 농가를 향해 갔다. 농가는 캄캄하게 어두웠다. 안나 그라노프는 베라스키를 따라 친코타의 농가로 들어갔다. 집은 허름했으나 아늑한 편이었다. 베라스키는 자신의 직업이 양철공이라고 말했다. 농가 옆에는 베라스키가 일을 하는 작업장도 있었다. 작업장에는 커다란 드럼통이 일곱 개나 있었는데 여섯 개는 봉인이 되어 있었고 한 개는 뚜껑이 열려 있었다.

“이 드럼통을 무엇에 쓰죠?”

안나 그라노프가 베라스키에게 물었다. 봉인된 드럼통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가슴이 섬뜩했다. 마치 등 뒤에 유령이 서 있는 것처럼 일시에 냉기가 뻗쳐오면서 전신으로 소름이 돋았다. 안나 그라노프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필요 없는 것을 놓아두는 거요.”

베라스키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안나 그라노프는 거실로 돌아와 베라스키가 따라주는 와인을 한 잔 마셨다. 확실히 베라스키는 그녀를 귀부인처럼 대해 주고 있었다. 안나 그라노프는 잠시 후에 베라스키와 신방을 꾸민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방망이질을 하듯이 세차게 뛰었다. 36세가 된 그녀에게 그 동안 남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일을 하는 저택의 남자 주인들은 그녀가 어른이 되기 전부터 걸핏하면 드레스 자락을 걷어 올리고 짐승같은 짓을 되풀이했다. 어릴 때는 그런 일들이 고통스러웠으나 어른이 된 뒤에는 오히려 그녀 쪽에서 그런 일들을 기다리기까지 했다.

“우리는 곧 결혼을 할 사이니까….”

베라스키가 그렇게 말하면서 안나 그라노프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안나 그라노프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목을 끌어안고 매달렸다.

1916년,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 살고 있는 대장장이 이스토반은 전쟁 중의 부다페스트에 있느니 시골로 내려가기로 결심했다. 그의 아내도 전쟁 때문에 뒤숭숭한 부다페스트보다는 교외가 좋겠다고 말했다. 대장장이 이스토반은 아내와 상의한 뒤에 법원에서 경매로 나온 농가를 한 채 샀다.

친코타라는 마을에 있는 농가였다. 농가는 부다페스트에서 40리나 떨어져 있는데다가 허름했으나 단장만 하면 얼마든지 좋은 집이 될 수 있을 것같았다. 이스토반 부부는 만족했다. 집 뒤에는 커다란 포플러나무도 몇 그루 있었고 작업장도 있었다.

“이런 집이 어떻게 경매로 넘어갈 수 있죠?”

부다페스트에서 친코타로 이사를 오던 날, 짐도 정리하지 않고 이스토반의 아내 모르나가 물었다. 그녀는 부다페스트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운치 있는 농가가 마음에 들어 행복했다.

“법원 주사 말로는 집주인이 몇 년째 세금을 내지 않았대. 그래서 주인을 찾았더니 행방불명이래. 세금 때문에 경매에 넘어간 모양이야.”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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