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들은 추위에 덜덜 떨다가 결국 얼어 죽고 말았다. 전용해는 피도 눈물도 없는 인물이었다.
1937년이 되면서 전쟁의 광기가 휘몰아쳐왔다. 1937년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켜 조선에도 그 여파가 미쳤다. 일본은 1935년부터 전쟁 물자를 조선에서 동원했다. 중일전쟁이 시작되기 전 조선은 전쟁의 광기에 휩싸였다.
조선인은 불안했다. 그러잖아도 일본인에게 착취를 당하고 있던 조선인은 구원이 필요했다. 백백교는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
몽매한 조선인들에게 구원을 약속했기 때문에 많은 조선인이 전쟁과 일본인의 착취를 피하여 백백교로 몰려들었다.
“우리 교주 대원님은 참 하늘님이시오. 우리 하늘님에게 죄를 짓는 것이 가장 큰 죄악이오. 그러나 우리 하늘님을 받들면 병란도 없고 죽지도 않을 것이오. 재산을 모두 처분하여 교주님께 오시오.”
백백교 교도들은 시골에서 재산은 있으나 무지한 농민들을 끌어들였다.
“재산을 정리하면 어떻게 되오?”
“교주님은 엄청난 농장이 있소. 재산을 많이 바친 자는 평생 일을 하지 않고도 부귀를 누리며 살 수 있소.”
“그 말이 참이오?”
시골의 농민들은 의심이 많았다. 교도들은 농민들이 안심할 수 있도록 온갖 감언이설을 늘어놓아 농민들이 재산을 정리하여 경성으로 올라오게 했다. 농민들이 재산을 정리하여 경성의 백백교 본부로 올라오면 양주에 훌륭한 농장이 있다고 속여서 재산을 빼앗고 가장을 양주로 내려 보냈다. 양주에서는 폐광이나 동굴에 기도처를 마련해 놓고 재산을 바친 농민들에게 기도를 하게 했다.
“백백백… 적적적… 흑흑흑….”
농민들은 재산을 빼앗기고 입교를 한 처지라 무릎을 꿇고 앉아서 기도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기도에 열중하고 있을 때 심봉사자나 북두사자의 명칭을 갖고 있는 벽력사들이 뒤로 다가와 몽둥이로 뒤통수를 후려쳐 살해했다. 경찰이 수사에 나섰을 때 양주군에서만 모두 22구의 시체가 발굴되었는데 여자 시체는 11구였다. 22구의 시체 중에는 어린아이들의 시체까지 있어서 백백교의 잔혹함을 엿보게 했다. 가장이 양주에서 살해되면 가족들은 양평이나 연천에 보내져 살해되었는데 연천에서 40구, 양평에서 40구, 강원도 평강에서 30구가 발굴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백백교도 말로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1936년 하왕십리 395번지에 살고 있는 유인호라는 53세의 부자가 백백교에 가입하여 재산을 헌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재산에 미련이 많은 사람이어서 백백교 간부들이 온갖 감언이설로 전 재산을 헌납하라고 해도 재산을 바칠 듯 하면서도 조금씩밖에 바치지 않았다. 그렇다고 유인호가 백백교에 열성적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유인호는 자신의 딸 유정전까지 백백교에 입교시켜 전용해의 첩이 되게 했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포섭하여 백백교에 끌어들였다. 백백교의 본부가 있는 신당동과 하왕십리는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이었다. 유정전은 전용해의 첩노릇을 하고 있었으나 한낱 노리개에 지나지 않았다. 어느
날 유정전은 친정인 하왕십리의 집에 가서 오빠 유곤룡에게 전용해가 사이비 교주라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내 그럴 줄 알았어. 그 놈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야금야금 빼앗아갈 때부터 수상하게 생각했다고.”
유곤룡이 눈에서 불을 뿜으며 펄쩍 뛰었다.
“교주는 첩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난 노리개라고요.”
유정전이 울면서 자신의 기구한 처지를 하소연하자 유곤룡은 상황이 심각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즉시 아버지 유인호에게 가서 백백교를 빠져나오라고 요구했다. 유인호는 아들의 말에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그는 아들이 재산 때문에 백백교 교주 전용해를 험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놈을 이리로 유인을 해와라. 아버지가 내 말을 믿지 않으니 아버지 앞에서 그놈의 가면을 벗겨야겠다.”
유곤룡이 동생 유정전에게 말했다.
“오빠, 배신을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요.”
“아버지가 전 재산을 바치겠다고 거짓말을 해라. 그러면 놈이 제 발로 찾아올 것이다.”
유곤룡은 유정전에게 단단히 당부를 하고 신당동으로 돌려보냈다. 전용해가 신당동 본부로 들어오자 첩 유정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님께서 주연을 마련하고 교주님을 청하십니다.”
유정전이 절을 하고 전용해에게 아뢰었다.
“네 아버지 유인호가 나를 청해? 무슨 일로 나를 청한다는 말이냐?”
전용해가 의심스러운 눈길로 유정전을 살폈다. 유정전의 아버지 유인호는 돈을 바칠 듯 하면서도 바치지 않은 구렁이와 같은 늙은이였다. 유인호의 재산은 10만원이 넘는다.
“새해가 되지 않았사옵니까? 하늘님이신 교주님께 인사도 드리고 땅문서도 바친다고 합니다. 교주님께 의탁하여 큰 벼슬 얻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아무렴 나를 믿는 자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전용해가 한껏 거드름을 피웠다. 돈을 바치겠다고 해서 그런지 유정전이 아름다워 보였다. 전용해는 마침내 문봉조와 말단 간부 몇을 데리고 유정전의 집으로 향했다. 유정전의 집에는 재산을 바친다는 유인호는 보이지 않고 백백교를 좋아하지 않는 유곤룡이 술상을 준비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처남이로구만. 처남이 재산을 바치겠다고 했는가?”
전용해는 재산을 바치겠다는 유정전의 말에 속아 유곤룡을 보자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습니다. 제가 아버님을 설득하여 전 재산 10만원을 바칠 것입니다. 우선 한 잔 드십시오.”
유곤룡은 전용해에게 술을 계속 권했다. 문봉조와 전용해를 수행한 벽력사들은 다른 방에서 술을 마시게 했는데 독한 술이었다.
“아버님은 어디에 갔는고?”
“돈을 마련하러 잠시 출타하셨습니다. 술을 드시고 계시면 돌아오실 것입니다.”
유곤룡은 매우 치밀한 사내였다. 그는 전용해에게 술을 권하면서도 밖으로 나와 다른 방에 있는 문봉조 등에게도 술을 권했
다. 문봉조를 비롯한 벽력사들은 대취했다.
“왜 이렇게 밖을 돌아다니노?”
유곤룡이 문봉조 등에게 술을 권하고 돌아오자 전용해가 의심스러운 눈길로 물었다. 유곤룡은 가슴이 철렁했다.
“아버님께서 돌아오시나 보았습니다. 교주님, 한잔 더 드십시오.”
유곤룡이 다시 술을 권했다. 전용해는 의심하지 않고 계속 술을 마셨다.
“교주님께서는 첩이 얼마나 되오?”
유곤룡은 전용해가 술이 취하자 비로소 시비를 걸었다.
“뭣이?”
전용해의 굵은 눈썹이 꿈틀했다.
“당신은 수많은 첩을 거느리고 살고 있으니 의자왕이 부럽지 않고 진시황이 부럽지 않을 것이오.”
유곤룡이 비웃음기를 가득 담고 말했다.
“이놈! 죽고 싶으냐?”
전용해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그의 눈에서 무서운 살기가 쏟아졌다.
“뭣이 어째? 우매한 농민들을 속여 재산을 팔아 바치게 하고 여자들을 첩으로 거느리거나 살해해서 죽였다는 것을 다 알고 있다! 네놈이야말로 죽일 놈이야!”
“네 이놈!”
전용해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유곤룡은 전용해보다 더 먼저 일어나서 냅다 발길질을 했다. 전용해가 유곤룡의 발길에 얻어맞고 억하는 신음소리를 내뱉으면서 술상과 함께 나뒹굴었다. 유곤룡은 재빨리 밖에 대기하고 있던 친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유곤룡은 유정전의 말을 듣고 친구들에게 참나무 몽둥이를 들고 대기시켜 놓았던 것이다. 유곤룡의 신호가 떨어지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친구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전용해를 향해 몽둥이를 휘둘렀다.
“아이쿠, 하늘님 살려라!”
전용해가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그러나 전용해도 용력이 비상한 사내였다. 그는 유곤룡의 친구들에게 몽둥이로 얻어맞고서도 후닥닥 일어나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저놈 잡아라!”
유곤룡이 몽둥이를 들고 뛰쳐나가면서 소리를 질렀다. 다른 방에서 술을 마시던 이경득 등도 혼비백산하여 마당으로 뛰쳐나왔다. 그들은 몽둥이를 든 유곤룡의 친구들과 필사적으로 싸웠다. 전용해와 이경득 등은 혼란한 틈을 노려 달아나고 몇몇 말단 간부들이 잡혔다. 유곤룡은 전용해와 이경득을 뒤쫓았으나 그들은 이미 하왕십리 보통학교 쪽으로 달아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유곤룡과 친구들이 잡은 것은 백백교의 말단 간부 셋이었다.
“이놈들이라도 파출소로 끌고 가자.”
유곤룡은 전용해의 말단 간부들을 사로잡아 하왕십리 파출소로 끌고 갔다.
“뭐야?”
파출소 소장이 유곤룡과 백백교 졸개들을 보고 물었다. 그들은 이미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이놈들이 죄 없는 백백교의 교도들을 살해했습니다. 수십 명의 교도들을 죽인 살인마들입니다.”
유곤룡이 흥분하여 소리를 지르자 파출소 소장은 벌컥 화를 냈다.
“뭐야? 너희들이 지금 장난하는 거야?”
소장은 수십 명을 죽였다는 유곤룡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오잇! 너희들이 수십 명을 죽였나?”
소장은 얼굴에 웃음기를 가득 띠고 밧줄에 묶인 백백교 말단 간부들을 쓸어보았다.
“수십 명은 안 되고 20명쯤 됩니다.”
백백교 말단 간부들의 말에 소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파출소에 있는 순사들도 바짝 긴장했다.
“이놈들이 전부 미쳤나? 패거리로 몰려와서 무슨 짓거리야? 네놈들이 대일본제국 경찰을 희롱하는 거야?”
소장이 겁이라도 주려는 듯이 허리에 찬 일본도를 번쩍 들어서 책상을 후려쳤다. 유곤룡은 태연했으나 사람을 죽인 백백교 간부들은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었다.
“사, 사실은 이분 말씀대로입니다.”
“뭐야?”
“수십 명을 죽인 것이 사실입니다.”
백백교의 말단 간부들이라고 해도 무지몽매한 빈민층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파출소 소장이 화를 내면 낼수록 자신들의 죄를 털어놓기에 바빴다. 처음에는 20명쯤에서 수십 명으로, 수십 명이 수백 명으로 변했다. 소장은 시간이 흐를수록 황당했다.
2∼3명을 살해한 살인자들은 보았으나 5명 이상을 살해한 살인범조차 본 일이 없었다. 그런데 백백교 교도들은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의 교도들을 살해했다고 자백하고 있는 것이다. 소장은 반신반의하면서 심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자백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뭐야?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소장은 동대문경찰서에 보고했다. 그러나 동대문경찰서에서도 백백교의 그와 같은 살인행각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장의 보고를 무시할 수 없어서 즉시 동대문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을 하왕십리 파출소에 파견했다. 동대문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은 즉각 경성부 신당동에 있는 교주 전용해의 집을 급습하여 이순문과 첩 10여명을 검거했다. 형사들이 밤을 새워 그들을 취조한 결과 백백교 교주가 수백 명을 살해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놈들의 자백이 사실이라면 너무나 무서운 일이다.”
형사들은 공포에 떨었다. 백백교 말단 간부들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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