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과학수사파일 제21회
대한민국 과학수사파일 제2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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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7-01-19 13:40
  • 승인 2007.01.19 13: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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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승자의 신원을 확인하라
1983년 사할린 상공에서 소련전투기의 미사일 공격으로 269명 사망, 1987년 북한 공작원의 테러로 미얀마 상공에서 항공기 공중폭발로 115명의 승객이 전원 사망하였다.

항공기사고는 생존자가 거의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 두 사건 모두 사람의 형태는커녕 흔적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지난 1997년, 또 한 건의 항공기 추락사고가 괌에서 발생했다.

탑승자는 총 254명, 이중 생존자는 28명, 희생자는 무려 226명, 신원이 확인된 89명을 제외한 나머지 미확인 시신 중 한국인 시신 121명, 미국인 시신 3명이었다.

정부에서는 국과수에서 DNA감식에 의한 신원확인을 전담토록 했다.

급파된 국과수 연구원들은 미국 측과 DNA감식의 표준화 및 기술협상을 했다.

미국 측에서는 미국인 시신을, 한국 측에서는 한국인 시신을 DNA감식으로 신원확인을 하기로 협의가 이루어져 양국은 협정서에 서명까지 했다.

사건 발생 20일 후인 8월 30일 밤 9시경 미확인 시신 188개 시료가 국과수에 도착했다.

이미 발족시킨 ‘DNA신원확인단’은 시료에서 DNA형을 분석하기 위한 일련의 실험 과정인 DNA분리, 증폭, 전기영동, 판독 등의 과정을 거쳐 DNA형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약 1개월에 걸쳐 완료된 시료의 DNA분석 결과를 미국 워싱턴 국방성 산하의 DNA분석 결과와 비교 검토한 결과는 모두 일치했다.

대형참사의 경우, 신원확인법으로는 사진, 지문, 장신구 대조검사, 혈청학적 검사, 방사선 촬영, 법치학적 검사, 법의부검, 슈퍼임포즈 등이 동원된다.

그러나 당시 시료는 대부분 심하게 훼손되었을 뿐만 아니라, 탄화된 뼈, 살점, 모발 등 극도로 오염된 상태의 시신조각들이었다.

따라서 DNA감식법만이 유일한 신원확인 수단이었다.

대부분의 희생자들이 여름휴가를 즐기려는 가족 단위였기에 가족관계를 비교할 친족들의 선정과 채혈에 상당한 어려움이 따랐다.

자녀의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DNA만 분석하면 신원확인은 완벽하다.

또한 아버지가 없는 경우는 어머니와 형제자매를, 어머니가 없는 경우는 아버지와 형제자매를, 부모가 모두 없는 경우는 사촌 또는 이종사촌의 혈액을 채취해야 한다.

국과수 연구원들은 혈흔, 살점 등과 같이 세포핵이 있는 세포에서는 여섯 종류 이상의 핵 DNA 분석법과 뼛조각, 치아조직과 같이 세포핵이 없는 경조직에서는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법 등을 적용하여 가족관계의 성립 여부를 판단했다.

유해 시료의 DNA분석을 완료하고, 희생자 유가족의 가계도 작성, 채혈자의 명단을 확정하여 혈액을 채혈, DNA형을 검출했다.

드디어 11월 1일부터 신원이 확인된 실종자의 명단을 미국 측에 통보하면서 유해는 괌으로부터 외무부 당국자를 통하여 유가
족들에게 인도되었다.

최종 미확인 시신 121구 중 67구의 신원이 확인되었고, 확인되지 않은 유해에 대해서는 유가족들의 합동장례로 비극적인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무서운 직업
세상에 천태만상의 직업이 있다. 그중에 나는 지극히 평범한 실험실에서 과학기구 등을 다루며 실험에 열중하는 직업을 가졌다.

종종 학교동문 등의 모임이 있을 때마다 사회자는 나를 이렇게 소개한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무서운 곳에서 일하는 사람”

나는 그런 소개말이 싫지 않지만 그렇다고 어깨가 으쓱해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그러려니 나도 모르게 수용한다.

그와 같은 소개는 적절한 표현으로 들렸고, 내가 무슨 일을 하길래 그렇게 무섭다고 하는지 새삼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
기도 한다.

무엇 때문에 나는 그들로부터 무서운 일을 하는 사람으로 통하는 것일까?

간혹 과학수사 자문을 받기 뒤해 방문객이 찾아오곤 한다.

그러나 만나서 대화를 나누다 보니 긴장도 풀리고 마음이 편해진다고 한다.

사람들은 나를 만나기 전에는 체구도 우람하고, 우락부락하며 무언가 중압감을 느낄 것 같은 그런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나는 그들의 말이 솔직하고 진실하게 들린다. 그저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은 아닐 것으로 생각된다.

실험실 생활만 35년이다. 대학에서 10년, 범죄현장에서 25년이란 세월 동안 실험실에서 일해왔다.

세상에는 그 전문성에 따라 천태만상의 실험실이 있다.

그러나 유독 나의 실험실은 사람의 마음을 마구 뒤흔들어 놓는다.

우울하고, 침통하며 때로는 한심스러우며 가슴이 찡하기도 한다.

한편 보람과 기쁨도 함께 가슴으로 밀려오는 희한한 실험실이다.

늘 변화무쌍한 공간이다. 그래서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며 사명감도 남다른 모양이다.

나는 범죄현장에서 불의의 잔재들을 대상으로 갖가지 실험 방법을 거쳐 증거를 찾는다.

한 방울의 피, 한 올의 털, 한 개비의 담배꽁초 등 모든 것이 내겐 하찮게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감정물들은 우리 사회의 어둡고 음울한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래서 마음이 괴롭고 씁쓸한 기분을 느낄 때가 많다.

하지만 금세 밝은 마음으로 되돌아올 수도 있다.

이런 업무에 워낙 오래 종사하다 보니 인내심은 물론 감정의 조절 능력까지 키워진 것 같다.

천만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유독 나만 그렇진 않을 것이다. 이런 업무를 하는 선배, 동료, 후배 연구원들도 똑같은 과정을
겪었거나 한참 진통을 겪느라 애를 쓰고 있음에 틀림없다.

스스로 밝은 마음의 소유자가 되기 위해서 말이다.

“열 사람의 범인을 놓칠지언정 무고한 한 사람을 범인으로 몰아서는 안 된다”는 명제가 곧 우리의 실험실에서 결정된다는 중대성 때문에 무서운 일을 하는 사람 그리고 무서운 직업으로 통하는 게 아닐까.

나는 그런 무서운 일을 업으로 하면서 수천의 범죄사건에서 정의를 추구하며 결백한 사람의 혐의를 벗겨 인권을 보호함으로써 건강한 사회환경의 일익을 담당하는 한 사람이다.

따라서 정의롭지 못한 인간의 삶에 어떤 병태도 이겨낼 수 있는, 무섭지만 신선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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