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액검출의 고충
느닷없는 전화였다. ○○경찰서 조사계에 근무하는 K형사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그는 나에게 자문을 구했다. 나는 무슨 사건이냐고 물었다.
“강간사건입니다. 피해여성은 P라는 남자가 강간을 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P는 강간한 사실이 없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연구소로 피해여성과 P를 직접 데리고 가면 됩니까?”
“아닙니다. 데리고 오지 마십시오. 이곳에 그 두 남녀를 데리고 오면 안 됩니다.”
“그러면 증거물은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채취하면 됩니까?”
“증거물은 근처 병원에서 의료 종사자가 채취하도록 해야 합니다. 반드시 제 3자를 입회시키는 것도 중요합니다.”
K형사는 성관계를 가진 지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채취해도 별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의사의 말을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병원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병원에서는 주로 성관계 직후 채취한 질 분비물에서의 정자의 여부를 현미경으로 관찰합니다. 따라서 시간이 조금이라도 경과한 다음에는 정자가 이미 파괴되어 현미경으로 관찰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국과수에서는 비록 시간이 경과되어 정자가 파괴되었더라도 파괴된 정자의 머리, 또는 꼬리 등의 관찰이 가능합니다. 만일 정자가 완전 파괴되어 소실된 경우라도 정액의 검출이 가능하며 혈액형 판정도 가능합니다.”
K형사는 용의자 P씨의 정액도 증거물로 채취해 가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정액보다는 혈액을 채혈해 오는 것이 실험에 더욱 용이함을 알려주었다.
K형사와의 전화 통화는 이렇게 끝났다. 거의 퇴근시간 무렵, 전화가 또 걸려왔다.
“오전에 전화했던 K형사입니다. 박사님 말씀대로 증거물을 병원에서 채취해 지금 접수를 완료했습니다.”
나는 증거물의 종류가 제대로 모두 갖추어졌는지 확인차 물었다.
“증거물은 무엇 무엇을 가져왔습니까?”
“박사님 말씀대로 피해여성의 질 분비물, 피해자의 혈액, 그리고 상대남성의 혈액을 가져왔습니다.”
“예, 완벽하게 가져오셨습니다. 이제 곧바로 그 증거물을 대상으로 먼저 혈액형을 검사한 다음, DNA 분석을 실시하면 강간 여부가 정확히 드러납니다. 아무 염려 마시고 돌아가십시오.”
“그런데 박사님,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피해자의 혈액은 왜 필요합니까?”
“만일 강간이 틀림없다면 피해여성의 질 분비물은 항상 상대남성의 정액 분비물과 혼합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그 증거물을 대상으로 혈액형을 검사하더라도 피해자의 혈액형이 혼합되어 검출됩니다. 이때는 피해자의 혈액에서 혈액형을 검사한 다음 피해자의 혈액형을 배제시켜야 가해남성 정액의 혈액형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DNA분석도 똑같은 원리입니다. 피해자의 질에서 질편평 상피세포가 떨어져나오기 때문에 피해자의 혈액으로부터 혈액형 검사는 물론 DNA분석에서도 혼합된 유전자형이 검출되기 때문에 가해남성의 정확한 DNA형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강간, 간통, 윤간 등 성범죄의 경우 반드시 피해자의 혈액을 함께 준비해 감정의뢰해야 합니다.”
나의 설명이 너무 장황하고 복잡하게 길어졌다. K형사에게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려니 말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는 그동안 구사요원들에게 강의할 때마다 빼놓지 않고 설명해왔다. 그래서 대부분의 수사형사들도 많이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도 왜 피해자의 혈액이 필요한지 모르는 수사요원들도 간혹 있다.
결국 이 사건은 의뢰된 3명의 혈액을 대상으로 DNA분석을 수행, P씨의 강간 사실을 명확히 입증하여 사건을 명쾌히 해결한 사례이다.
수사와 생명인 감식과 감정
나는 1995년 3월 전국 12개 지방경찰청 감식요원 교육소집에 강사로 초빙되어 과학수사에 관한 강의를 한 바 있다.
강의 내용은 강력사건현장에 유류되는 증거물인 혈흔, 정액, 타액, 모발 등의 채취 및 보존, 그리고 운반요령 등에 관한 주의사항과 생물학적 감정인 혈액형 등 검사의 중요성이었다. 또한 최첨단 감정기법인 DNA분석법 및 유전자자료은행의 중요성 등을 강조하는 개괄적인 내용을 소개했다.
먼저 감식과 감정이란 무엇인지, 그 차이점과 우리나라 감정업무에 관한 실태에 관해서 설명해 보았다.
감식이란 아직 감정단계에 이르기 전인 범죄현장에 대한 사진촬영, 지문 채취, 범행과 관련된 증거물의 수집, 증거 가치의 판단 및 1차적인 예비검사를 실시하는 것이다. 즉, 범죄의 특징을 분석하기 위한 광범위한 현장의 검사와 식별을 말한다.
감정이란 특수한 경험 및 전문지식에 속하는 법칙 또는 원리를 응용하여 구체적 사실의 진위 여부를 과학적으로 식별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범죄수사 또는 재판의 사실인정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감정인은 법원에 대하여 사실 인정의 자료를 증언하거나, 서류로 작성하여 제출하는 제 3자를 의미한다. 그는 법원이 명하기도 하고, 수사과정에서 검사 또는 사법경찰관이 위촉하기도 한다.
감정인은 그 감정의 결과가 사람의 생명, 자유, 명예, 재산 등 인권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므로 어떠한 사태에도 대응할 수 있는 학문, 지식, 경험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므로 감정인이 감정업무에 임할 때는 철저하고도 확실한 과학적 확증에 입각하여 최선을 다해야 한다.
감정인의 일정한 자질 요건은 다음과 같다.
먼저 과학적인 양심을 가지고 정직, 정확, 공명정대하게. 그리고 신속하게 감정업무를 처리해야 한다. 감정인이 과학적인 실험에 의한 감정 결과는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신앙과도 같다. 또한 “열 사람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한 사람의 무고한 사람을 범인으로 몰아서는 안 된다”는 법 정신에 충실해야 한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감식 전문가 또는 감정인을 교육시키는 정규교육과정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느 감정분야든 감정기술을 곧바로 교육시키는 교육기관은 없으며, 일반대학 및 대학원에서 각 전공별 순수 기초학문을 익히고 학사, 석사 또는 박사과정을 마친 사람들이 국과수에서 실시하는 소정의 시험을 마치고 채용된다. 채용 후 1~2년간 순수 기초학문을 바탕으로 실제 증거물 감정에 응용이 가능하도록 감정에 필요한 기초연구 및 감정실험 등의 반복훈련을 통해 독자적으로 감정할 수 있도록 다양한 능력계발에 힘쓴다. 최소한 1년 이상은 연구 및 감정업무 훈련을 요하며, 때로는 해외 연수교육을 통해 첨단 감정기법들을 도입 개발하여 감정업무에 응용한다.
나는 그들에게 초동수사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현장감식에 임하는 수사요원들이 지켜야 할 사항에 대하여 언급했다.
범죄현장에 도착하는 수사요원은 무수히 많은 상황에 접한다. 이때 수사요원들의 민첩한 행동과 현장처리 능력은 사건해결의 성패를 좌우함은 물론 성공적인 기소 여부를 결정한다.
범죄현장은 용의자의 식별을 위한 증거가 마련되는 출발점이며 범행 중에 생긴 범죄 흔적 등이 남아 있는 장소이다. 범죄현장에 도착하는 수사요원의 임무는 계급의 고하를 막론하고 범죄의 경중과도 관계없이 똑같다. 범죄현장에는 반드시 증거물이 남게 마련이다. 따라서 용의자의 식별 또는 후일 현장검증을 위해서 어떠한 증거물도 파손 또는 변동시켜서는 안 되며,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범죄현장에 타 물건을 더 옮겨놓은 실수를 범해서도 안 된다. 무엇보다도 수사요원은 현장에 경솔하게 접근하지 않아야 한다. 행동은 침착하고 신중해야 한다. 피의자 심문 중에 생긴 잘못은 정정될 수도 있지만 현장보존과 증거물의 부주의한 취급으로 인하여 사건해결의 큰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범죄현장에 임하는 수사요원의 현장처리 수행능력에 따라 사건해결의 성공여부가 결정되며 이것은 가장 중요한 초기 과정이다.
또한 범죄현장 상황의 변동에 따른 시간의 기록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후일 용의자 진술의 진실 여부를 가리고, 다른 관련 사실과의 전후관계를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발견자가 최초 범죄를 신고한 시간, 범죄현장에 도착한 시간 등 시간의 기록은 치밀해야 한다. 정확한 시간의 기록은 수사요원의 범죄해결 과정에서의 치밀함과 진실성이 입증되며, 법정에서 증언 등 그 신빙성이 인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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