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식범의 잔혹한 소행
1980년대 들어서면서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물질 만능주의, 쾌락주의 등이 만연하면서 우리의 도덕과 윤리 또한 부패하기 시작했다.
존속범죄란 자신 또는 배우자의 직계존속에 대해 범행을 저지르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범인은 교묘한 방법으로 살해를 꾀한다. 최근 경제의 어려움과 실업자 수의 증가 등으로 갖가지 반인륜적인 사건인 존속살인, 보험살인, 심지어는 가장이 일가족을 살해하는 가족의 범죄가 급증하고 있다.
재력가로 알려진 학교법인 이사장 K(73세)씨가 한밤중에 자신의 집 안방에서 흉기에 찔려 숨진 사건이 발생했다. 부인과 장남의 신고로 현장에 도착한 수사요원들은 현장감식을 실시했다. 사건수사본부는 6층 가족들이 기거하는 주택을 사용했다. 사건현장인 안방에는 다량의 피가 흘러 있었고, 피해자의 특이한 반항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안방과 연결된 목욕탕 창문 주변과 장남 K씨 (41세)의 방 창문틀에서 혈흔이 발견되었다. 수사요원들은 건물 구조로 보아 사건현장인 6층에 침입하려면 출입구 경비실을 통과하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다는 점을 중시, 내부 소행에 의한 범행을 배제하지 않았다.
피해자는 목 부위가 예리한 흉기로 약 10cm 가량 찔려 동맥과 정맥이 절단돼 과다출혈로 사망한 것으로 부검에 의해 밝혀졌다. 수사요원들은 노련한 살해 수법으로 보아 전문 살해범에 의한 청부살인의 가능성에 관해서도 수사를 벌였다.
사건 당시에는 부인과 장남이 함께 있었다. 그런데 사건 당시 없어진 금품이 없는 점으로 보아 재산에 얽힌 원한에 의한 범행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 피해자의 주변 인물과 면식범에 초점을 맞추어 수사를 전개했다.
수사요원들은 사건 발생 후 피해자의 장남인 K씨에 대해서도 범행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그의 일거일동을 주시했다. 한편 K씨가 아버지 모르게 회사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과 회사의 경영 부실로 수십억에 달하는 채무를 졌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따라서 수사요원들은 아들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고, 범행을 입증할 수 있는 물증 및 정황증거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다.
마침내 수사요원은 K씨의 어머니에게 아들의 범행 가능성을 암시해주며 수사에 협조를 구했다. 어머니는 즉시 가족회의를 열어 장남 K씨에게 아버지를 죽였는지 솔직히 말하라고 다그쳤다. 이때 아들은 당황해하며 돌발적인 행동을 보였다. 가족은 이를 담당 수사요원에게 알렸고, 수사요원이 도착한 후 가족 앞에서 범행사실을 모두 자백하기에 이르렀다.
수사요원은 K씨의 자백에 따라 범행 시에 입었던 옷과 흉기를 인근 빌딩 쓰레기 적치장에서 찾는 데 성공했다. 연구소에서는 의뢰된 증거물인 초록색 점퍼와 면장갑 등의 감정을 시작했다. 감정 결과는 점퍼 우측 팔 부위, 주머니 부위, 가슴 부위, 다리 부위 및 좌측 소매 끝 부위 그리고 면장갑 한 짝의 앞뒷면에서 다량의 혈흔이 검출되었고, 혈액형도 피해자와 동일한 B형으로 판정되었다.
존속범죄로 인한 피해는 한 개인의 불행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족 전체의 파멸을 부르며 사회 병리현상으로 어두운 그림자를 남긴다. 따라서 어릴 때부터 따뜻하면서도 철저한 가정교육으로 건전하고 원만한 정신건강 배양에 온갖 정성을 기울여 존속범죄와 같은 파렴치한 범죄 없는 건강한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해야 할 것이다.
범인은 정관수술자
1989년 7월 어느 날 밤, 인적 없는 야산에서 유부녀가 강간 살해되었다. 그로부터 시체는 약 5일 후에 발견되었다.
담당 수사요원은 즉시 연구소에 피해자의 질 분비물을 채취, 정액 검출 유무를 검사했다.
연구원들은 사람 정액에 다량 함유되어 있는 산성인산효소 검출법에 의해 정액을 검사한 결과 정액이 검출되었음을 증명했다. 그 다음 질 분비물을 슬라이드글라스에 표본을 만들어 현미경 400배에서 정자의 존재 유무를 관찰했다. 눈이 아프도록 들여다보며 정자를 찾아보았지만, 정자의 온전한 형태는커녕 정자의 손상된 머리 또는 꼬리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정자는 체외로 배출되는 즉시 현미경으로 관찰할 경우, 정자의 머리, 목 부분, 결합부분, 꼬리부분 등이 본래의 모양 그대로 발견된다. 그러나 약 30여 분이 경과되면 그 형태가 변형되기 시작해 머리와 꼬리부분이 따로 떨어지거나 또는 파괴된 모양으로 관찰된다. 더구나 여성의 질 분비물에는 질편평 상피세포와 그 외 정상세균 등이 혼합되어 있어 정자를 증명하는 데는 항상 어려움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 다음은 정액에서 혈액형을 검출해 내는 시험이다. 이 사건 증거물은 피해여성의 질 내에서 채취된 것이므로 질 분비물과 정액은 서로 혼합된 상태였다. 이때 정액만을 순수하게 따로 분리할 수 없기 때문에 혈액형은 그대로 혼합된 증거물에서 판정한다. 또한 정액은 사건 당시의 강간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남편의 정액인지 알 수가 없다. 따라서 혹시라도 부정확한 혈액형이 판정된다면 오히려 엉뚱한 방향으로 수사를 진행시켜 혼선을 빚을 수 있다.
정자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감정 결과를 통보받은 수사요원은 곧바로 연구소로 찾아와 나에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을 묻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강간살인 사건이며, 정액은 검출되는데 정자가 발견되지 않는 것이 이상합니다. 그리고 피해자는 사건 전날 남편과 성관계가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는데, 그때부터 현재까지 약 6일이 경과했기 때문에 정자의 발견이 불가능한 것인가요?”
나는 한 마디로 시원스런 답변을 해주기가 어려웠다. 다만 교과서적인 내용을 말해줄 수밖에 없었다.
정자의 생존기간은 여성의 질 내에서 약 36시간 또는 그 이상 생존하며, 35~42시간 후면 정자의 일부가 변형 또는 소실되며, 약 80시간 후면 정자가 검출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죽은 여성의 질 내에서는 시체의 보존상태에 따라 생체보다 더 오랜 기간 동안 정자가 발견된다. 단 부패된 시체에서는 정액, 정자가 모두 부패되기 때문에 정자의 검출이 어려워진다. 또한 정관수술이나 무정자증, 그리고 성관계 후 약 72시간이 경과되면 정자는 아예 발견되지 않는다. 이런 경우 범죄 용의자가 혹시 정자가 없는 무정자증의 사람일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수사요원은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고는 연구소를 떠났다. 그리고 3일 후에 전화가 걸려왔다.
“박사님! 이 사건의 범인은 남편으로 밝혀졌습니다. 평소 부부간에 가정불화가 심했으며, 결국 남편이 아내를 죽이고 강간살인으로 위장했다고 범행사실을 모두 자백했습니다. 남편은 바로 정관수술자라는 것도 확인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미궁으로 빠질 뻔한 사건이 해결되었다니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수차례에 걸쳐 자문을 해온 수사요원에게 나름대로 도움이 된 것 같아 비록 현장에서 함께하는 동료는 아니지만 너무도 흐뭇했다. 성범죄 사건에서 중요한 단서인 정자의 검출 여부에 여러 가지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도 결과를 간과할 수 없는 단서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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