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정액 검출의 고충
느닷없는 전화였다.
OO경찰서 조사계에 근무하는 K형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나에게 자문을 구했다. 나는 무슨 사건이냐고 물었다.
“강간사건입니다. 피해여성은 P라는 남자가 강간을 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P는 강간한 사실이 없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연구소로 피해여성과 P를 직접 데리고 가면 됩니까?”
“아닙니다. 데리고 오지 마십시오. 이곳에 그 두 남녀를 데리고 오면 안 됩니다.”
“그러면 증거물은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채취하면 됩니까?”
“증거물은 근처 병원에서 의료 종사자가 채취하도록 해야 합니다.
반드시 제 3자를 입회시키는 것도 중요합니다.”
K형사는 성관계를 가진 지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채취해도 별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말을 의사에게서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병원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병원에서는 주로 성관계 직후
채취한 질 분비물에서의 정자를 현미경으로 관찰합니다.
따라서 시간이 조금이라도 경과한 다음에는 정자가 이미 파괴되어
현미경으로 관찰되지 않을 때가 있지요. 때문에 정액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국과수에서는 비록 시간이 경과되어 정자가 파괴되었더라도
파괴된 정자의 머리, 또는 꼬리 등의 관찰이 가능합니다.
만일 정자가 완전 파괴되어 소실된 경우라도 정액의 검출이 가능하며 혈액형 판정도 가능합니다.”
K형사는 용의자 P씨의 정액도 증거물로 채취해 가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정액보다는 혈액을 채혈해 오는 것이 실험에 더욱 용이함을 알려주었다.
K형사와의 전화 통화는 이렇게 끝났다. 거의 퇴근시간 무렵, 전화가 또 걸려왔다.
“오전에 전화했던 K형사입니다. 박사님 말씀대로 증거물을 병원에서 채취해
지금 접수를 완료했습니다.”
나는 증거물의 종류가 제대로 모두 갖추어졌는지 확인 차 물었다.
“증거물은 무엇을 가져왔습니까?”
“박사님 말씀대로 피해여성의 질 분비물, 피해자의 혈액,
그리고 상대남성의 혈액을 가져왔습니다.”
“예, 완벽하게 가져오셨습니다. 이제 곧바로 그 증거물을
대상으로 먼저 혈액형을 검사한 다음, DNA 분석을 실시하면
강간 여부가 정확히 드러납니다. 아무 염려 마시고 돌아가십시오.”
“그런데 박사님,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피해자의 혈액은 왜 필요합니까?”
“만일 강간이 틀림없다면 피해여성의 질 분비물은 항상 상대남성의 정액 분비물과
혼합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그 증거물을 대상으로 혈액형을 검사하더라도
피해자의 혈액형이 혼합되어 검출됩니다. 이때는 피해자의 혈액에서
혈액형을 검사한 다음 피해자의 혈액형을 배제시켜야 가해남성 정액의 혈액형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DNA분석도 똑같은 원리입니다. 피해자의 질에서 질편평 상피세포가 떨어져 나오기 때문에
피해자의 혈액으로부터 혈액형 검사는 물론 DNA분석에서도 혼합된 유전자형이 검출되기 때문에
가해남성의 정확한 DNA형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강간, 간통, 윤간 등 성범죄의 경우 반드시
피해자의 혈액을 함께 준비해 감정의뢰해야 합니다.“
나의 설명이 너무 장황하고 복잡하게 길어졌다.
K형사에게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려니 말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는 그동안 수사요원들에게 강의할 때마다 빼놓지 않고 설명해 왔다.
그래서 대부분의 수사형사들도 많이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도 왜 피해자의 혈액이 필요한지 모르는 수사요원들도 간혹 있다.
결국 이 사건은 의뢰된 3명의 혈액을 대상으로 DNA분석을 수행,
P씨의 강간 사실을 명확히 입증하여 사건을 명쾌히 해결한 사례이다.
제6화 누나를 범하다
어느 날 밤, 20대 여성이 자신의 방에서 목 졸려 숨진 채 발견되었다.
피해자는 여행사에 근무하는 K양이었다.
수사요원은 현장사진을 일일이 보여주면서 나에게 사건 정황을 설명했다.
시체는 뒤쪽으로 팔다리가 묶이고 손수건으로 재갈이 물려졌으며,
하의 면바지는 지퍼가 아래까지 내려진 채였다. 강간 흔적은 없어보였고
시체는 이불에 덮여 있었다.
사망 시간은 당일 새벽 2시경으로 추정됐고, 피해자 오른쪽 허벅지에 15cm,
왼쪽 허벅지에 3cm 정도의 상처가 있었다.
피해자의 손가방과 현금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원한 또는 치정에 의한 살인사건이 아닌가 싶었다.
특이한 것은 방문 안쪽으로 잠금 고리가 이중으로 잠겨 있었고,
남측 창문은 너무 작아 범인의 침입구로 단정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살인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 수사요원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피해자와 남동생은 같은 주택 2층 방 2개에 세를 들어 자취하고 있었다.
범행 당시 피해자의 옆방에는 숨진 K양(22세)의 남동생(19세)고
친구 2명이 술을 마신 후 자고 있었으나 그들은 간밤에 아무런 소리를 듣지 못했으며,
아침에 누나 방을 노크했지만 반응이 없어 그대로 학교에 갔다고 진술했다.
수사요원들은 사건 정황으로 보아 면식범에 의한 소행으로 추정되었지만
현장 부근의 불량배, 우범자를 상대로 본격적인 탐문수사에 들어갔다.
수사요원은 범행현장에서 채취한 음모, 머리카락, 피해자의 질 액과 혈액 등을 증거물로
의뢰했다. K양은 지난해 여행사에 입사, 성실한 생활을 했으며,
만나는 남자는 없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연구원들은 신속하게 현장 증거물에 대한 감정을 시작했다.
현장의 음모, 머리카락 등은 모두 혈액형이 피해자와 동일한 O형으로 증명되었고,
정액이 검출되었으나 질액과 혼합된 상태에서 O형의 혈액형으로 반응을 보였다.
현장 증거물에서는 범인의 음모 또는 머리카락이 발견되지 않았다.
검출된 정액은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누구의 것인지는 판단이 불가능했다.
수사요원들은 피해자의 주변 인물인 동료 직원, 거래처 사람들,
그리고 주변 불량배의 탐문수사, 심지어는 50여 가구의 특별 호구조사까지 실시했다.
그러나 별다른 성과가 없어 수사는 답보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수사요원들은 고심 끝에 수사를 다시 원점으로 되돌려 사건 상황을 재분석했다.
이 사건은 방문이 안으로 잠겨 있었고 외부에서의 침입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내부 소행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 것으로 판단,
동생과 동생의 친구들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수사팀들은 피해자의 남동생과 그의 친구들의 머리카락과 팬티 등을 임의 제공받아
증거물로 감정을 의뢰했으나 혈흔이 발견되거나 특별한 단서가 될 만한 것이 증명되지 않았다.
다만 범인의 정액으로 추정되는 O형의 혈액형은 피해자의 남동생과 일치할 뿐,
범인으로 단정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 후에도 동생의 고향집에서 플래스틱 과도와 과도를
싼 종이를 압수, 감정을 의뢰해 왔으나 역시 혈흔이 검출되지 않았다.
결국 뚜렷한 물적 증거가 없는 가운데 유력한 용의자로
심증이 가는 피해자의 남동생에게 범행 사실을 끈질기게 추궁한 끝에
마침내 범행일체를 자백 받았다.
피해자의 남동생은 사건 당일 친구 2명과 잠을 자다 일어나
화장실로 가면서 불이 켜져 있는 누나 방으로 향했다.
성욕이 발동한 그는 누나를 강압적으로 눕히고 강간을 시도했다.
옆방에 친구들이 깰 것을 우려해 손수건을 피해자 입속에 넣었는데
목이 눌려 숨을 쉬지 못한 누나가 순간 질식사해 버린 것이다.
누나가 숨진 것을 안 남동생은 당황한 나머지 누나의 손과 발을 묶어 놓고
과도로 숨진 누나의 허벅지를 쩔렀다. 그리고 누나의 방을 나와 위쪽 덧문에서
문고리를 이중으로 잠그고 강도의 소행으로 위장했다고 진술했다.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상상을 초월한 남매간의 반인륜적인 사건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글 : 최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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