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에서의 두 사내의 눈물
법정에서의 두 사내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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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4-09-13 09:00
  • 승인 2004.09.1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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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이 흘린 피에 보답하자”격투를 벌인 학생들이 몇 개의 몽둥이를 빼앗아 그 몽둥이를 휘둘렀다. 약 30분간 폭력을 휘두르던 깡패들은 뒤늦게 호루라기를 불며 나타난 경찰이 도착하자 약속이나 한듯 도망쳐 버렸다. 깡패들이 도망쳐버린 뒤에 도착한 경찰은 흩어져 흥분을 삭이고 있는 학생들 한테 덤비며 경찰봉으로 닥치는 대로 때리기 시작했다. 그런가 하면 현장에서 취재를 하던 세명의 신문사 사진기자가 카메라를 빼앗기는 등 죽도록 구타를 가했다.이렇게 회오리 바람이 일고간 천일극장 앞 도로에는 돌멩이며 몽둥이, 쇠갈고리가 무수히 깔린 위에 피를 흘리고 신음하는 학생들이 50여명을 헤아렸다.학우들의 신음소리를 들은 학생들의 눈은 살기를 띠고 있었다. 8시경이 되자, 현장을 수습한 학생들은 부상당한 학우들을 둘러메고 피로의 기색도 없이 다시 애국가와 교가를 부르며 8시 30분경 교정에 도착하였다.

교정에 이르자 그 때까지 학교에 남아 학생들을 염려하고 있던 유진오 총장 이하 교수들이 교정에 나와 학생들의 상처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학생들은 너나 없이 울었다. 울면서 총장과 교수들에게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교정에까지 따라 들어온 수백명의 시민들도 복받쳐오르는 감격에 못이겨 만세를 부르며 박수를 보냈다.후에 알려진 이야기지만 깡패들의 습격으로 인하여 한상철이라는 학생이 피살되어 고려대생들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결국 4·19의거를 일으키게 된 계기가 되었다.이윽고 이튿날인 4월 19일 아침이 밝았다. 역사에 길이 남을 이 날 아침, 서울 시내는 흥분에 싸여 있었다. 오전 9시 30분경 서울대학교 각 단과대학생 1만여명은 노도와 같이 국회의사당을 향해 진출하기 시작했다. 그런가 하면 연대·고대·동국·성균관·중앙·건국 등 전 대학생이 궐기하여 서울 중심가로 물밀듯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한결같이 정·부통령 선거의 무효를 주장하면서 목메인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국회 의사당이 있는 태평로를 향하여 동에서, 서에서 밀려오는 노도와 같은 학생들의 대열에 시민들은 박수갈채를 보내며 성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제 시민들의 눈에도 경찰은 무서운 존재가 아니었다. 한편 일부의 학생 대열은 이승만 대통령과의 담판을 요구하면서 경무대를 향하여 달려가기 시작하였다. 해무청 앞에 설치된 바리케이드를 뚫고 경무대에 이르자, 경찰들은 일제히 학생들에게 총격을 가하면서 마지막으로 발악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학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돌진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총탄에 쓰러진 학우들의 시체를 둘러메고 빗발치는 탄우속으로 전진했다.총탄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학생들은 죽음을 초월하고 있었다. 조국의 민주주의 소생을 위하여 자유와 정의에 목숨을 건 이들 학생들은 정녕 성난 사자들이었다.경찰의 총격은 학생들의 처절한 죽음을 보고도 멈추지 않았다. 아무리 성난 사자일지라도 총칼 앞에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

학생들은 눈물을 머금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 때 총에 맞아 죽은 학생은 10여명에 이르렀고, 수십명이 부상당하였다. 학생들은 이제 독재의 불법, 부정을 함께 절규하던 학우의 시체를 차에 싣고 부상학생들을 앞세운 채 시내를 시위하며 정부의 만행을 눈물로 호소했다.이와 같은 상황은 내무부 앞에서도 벌어졌다. 을지로 입구에도 젊은 사자들의 붉은 피가 뿌려졌다. 구호에 나선 의과대학생들은 급조한 구급차들에 적십자 표지를 그려붙이고 연달아 각 병원으로 달리면서 부상당한 학우들의 치료에 모든 힘을 다하였다.한편 흥분한 군중들은 서울신문과 반공청년단 본부를 불지르고 수많은 파출소와 자유당 본부를 파괴하고 소방차를 태워버렸다. 시민들은 학생들의 그런 파괴 행위를 보며 애석하게 보기는 커녕 속시원하게 생각하고 있는 눈치였다. 이윽고 오후 3시가 되어서였다.겉잡을 수 없는 사태에 정부는 드디어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밤이 깊어서야 시내는 일단 질서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동안에 희생된 군중의 수는 무려 1백1명 부상자는 4백56명이나 되었다.이 날 데모에 나선 학생들에게 무차별 사격으로 자유당 정권 연장과 부정, 불법을 은폐하기에 급급했던 정부측 발포명령자는 내무부장관이었던 홍진기와 서울시 경찰국장 유충열 및 경무대 경호관 곽영주 일당이었다.아무튼 전국을 휩쓴 이 날의 민중의 항거와 시위는 전국 중요도시에 선포된 계엄령으로 다시 찾은 정적속에 음산한 느낌만 깊게 하였다.그러나 야당의 장면 부통령은 정부의 만행을 규탄하면서 정식으로 부통령을 사임하였다. 그러자 국민의 열화와 같은 비난과 규탄 앞에 이기붕 국회의장도 부정선거를 인정하고 부통령 당선의 사퇴를 고려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고집스럽게 계속 집권의 꿈을 꾸고 있었다. 모든 책임을 무조건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에게 떠넘기며“자유당의 총재직을 사임하고 대통령으로 나라일에 전념하겠습니다.”고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수많은 의로운 피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윽고 4월 25일 삼엄한 계엄하에도 불구하고 대학 교수단의 데모가 일어났다. 이 나라 최고 지성의 상아탑속에 그들의 날카로운 판단의 외침은 거리에 울리기 시작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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