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15만명이 평화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항도 마산의 3월 15일 아침이었다. 내 표를 달라고 아우성치며 투표소에 들어가겠다하여 두들겨 맞고 나오는 사람, 멋모르고 대들었던 민주당원이 들어가지도 못하고 매만 맞고 나오는 등 3인조가 무엇인지 짝을 찾아 헤매는 순박한 시골 부인, 이것이 이른바 3·15부정선거의 마산 풍경이었다. 이리하여 데모를 하려다가 사전에 들켜 실패한 마산 학생들은 3월 15일을 맞이하여 데모를 해보겠다는 기운이 돌고 있었다. 그 날은 마침 휴일이고 하여 조직적으로 나오지 못하고 제각기 자기 집에서 나와 마산 시청 앞에 모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15일(화요일) 아침 이전에 이미 꾸며진 계획이 아니고, 극도의 부정선거에 흥분되어 그냥 어디서든지 모이기만 하면 해볼 기세였는데 민주당에서 선거 포기 선언이 있자, 학생들은 민주당 사무실 앞에 모여 민주당에서 하는 태도를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었다.
마산에서도 결국 전국 학생들과 호흡을 같이 하여 투표일인 15일 데모를 일으켰다. 이것이 제1차 마산사건이었다. 괴한들이 나타나 야당의 참관인을 강제로 몰아내고 부정 선거를 자행하기 시작하였다. 오후 3시경 민주당 당사 앞에 모여 있던 수천명의 군중들이 정남규 경남도 민주당 의원을 선두로 하여 ‘협잡 선거 물리치자’고 외치면서 데모에 나섰다. 그런데 그 자리에 갑자기 나타난 괴한으로부터 무수히 곤봉 세례를 받자 이에 응수하여 군중들은 괴한과의 투석전을 벌였다.이것이 바로 마산 사건의 첫 전단을 끊은 찰나였다.4월 11일 목요일 제2차 데모가 벌어졌다. 제1차 마산 사건은 관계 당국의 조사나 각종 조사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완강한 태도와 현지 경찰의 포악한 강압때문에 그 진상을 밝히지 못하고 시일만 질질 끌어오던 중 11일 다시 데모가 터졌다.제1차 사건은 실상 경찰이 발표한 것보다도 사상자가 훨씬 많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연행자에 대한 고문이 너무 심했고, 또한 행방불명자도 부지기수였다.
또한 행방불명된 자는 거의 경찰이 학살했을 것이라는 추측으로 민심이 흉흉했다. 3·15사건 이후 부산에 있는 ‘국제신보’ 기자 2명과 자동차 운전사 및 자동차가 남성동 파출소에서 잡히고, 기자와 운전사는 파출소에 감금당하여 3시간이나 구타당하고 자동차는 적성품이란 명목으로 압수당하여 경찰에서 사용했다.두 기자는 경찰이 얼마나 구타를 했는지 견디다 못해 바닥에 쓰러졌다. 그곳에 마침 여자가 끌려 들어와 누워있었는데 어떻게 자빠지다 보니 그 여자의 무릅 근처에 쓰러지게 되었다. 그꼴을 본 경찰이“이 자식, 자빠져도 떡판에 자빠진다더니 이 경황에 계집은 왜 덮어 누르는 거야?”하고 욕질을 해댔다. 한편, 마산고교 2학년 김무신(18세)은 15일 오전 7시 30분경 재판소 옆에서 구속되었다. 그리고 그는 몸이 엉망진창이 되도록 구타 당했다. 취조할 때에도“누구의 선동에 의하여 데모를 하게 되었습니다.”하면 안때리고 ‘정의에 불타서…’ 운운하면 구타당했다.
또 마산 상고 2학년 김학열(19세)은 데모에 참가하지도 않고 시험 공부를 하고 있다가 정용이란 친구에게 15일 밤 8시에 시청 앞에서 데모가 있으리라는 말을 전해 주었다는 이유로 16일 등교하여 시험을 치르고 있는 도중에 형사에 의해 붙잡혀가 감금되었고,“네 말을 듣고 다른 놈이 데모에 참가하였으니 그 놈의 죄를 너도 같이 져야 한다.”고 하면서 몸에 멍이 들도록 심하게 구타당했다. 또한 마산 고교 1년생인 서기홍(18세)군은 새양복을 찾으려고 나갔다가 데모에 참가하여 호국단 노래를 부르면서 평화적인 시위를 하다가 경찰에 붙잡혀 “아저씨, 형님“하고 부드럽게 말하면 덜 때렸다고 말했다. 식사는 꽁보리밥에 나무젓가락 하나로 여러 끼니를 먹어야 했다.이와 같은 체험자들의 말이 퍼지자, 마산 시민들의 마음은 오직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었다. 이처럼 민심이 흉흉한 때에 마침 마산 해안에서 한 낚시꾼에 의하여 시체가 걸려 나왔는데 그것은 1차 사건 때 행방불명이었던 마산 상고 김주열(전북 남원이 집인 김군은 마산에 유학중이었음)의 무참하게 학살된 시체이어서 시민들의 분노는 극도에 달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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