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철은 역화장실을 무사히 빠져나와 어디로 가야할지 망설여졌다.부산에는 옛 동지들과 부하들이 여러명 있기는 했으나 모두 자기를 배신자라고 따돌릴 테니, 차라리 아무도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내 이런 생각도 들었다.(아니지. 그랬다가 만약 아이들에게라도 붙잡혀서 끌려가게 되면 그런 개망신이 어디 있담. 차라리 내 스스로 곽일을 찾아가서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고 협상을 벌이는 수밖에 없어…)이렇게 마음을 정한 김관철은 남포동쪽으로 발길을 돌려 곽일을 찾아갔다. 곽일은 부산 뒷골목 사회에서 상당한 실력을 쌓고 있는 두목이었다. 그는 김두한과는 서로 계보는 달리하고 있지만 반공청년단 시절부터 친했을 뿐만 아니라 김두한의 일이라면 힘껏 도와주는 의리있는 사나이였다.대담하게도 곽일을 찾아 ‘자연장’에 나타난 김관철을 본 ‘자연장’ 주인 곽일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김형이 갑자기 웬일입니꺼?”곽일이 손을 내밀며 이렇게 말하자 김관철은 허허 웃으며 말했다.“쪽팔리게 부하들에게 달려오는 것보다는 내 발로 이렇게 찾아오는 것이 서로를 위해서 좋을 것 같아 왔소.”김관철의 이 말에 곽일은 소름끼치도록 싸늘하게 웃었다.“하하하, 이거 보통 배짱이 아니군, 그래.”“배짱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찾아온거예요.”“그렇다모 잘못 찾아온기라예. 지금 나하고 당신은 동지가 아닌데?”곽일은 김관철 네놈이 무슨 배짱으로 호랑이의 굴에 제발로 걸어들어왔느냐 하는 그렇게 적의에 찬 표정이었다. 그러나 김관철은 태연자약하게 입을 연다.
“나는 곽형이 나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을 변명하려고 온 게 아니오. 다만 곽형이 나라는 인간을 알기 때문에 한 마디만 하겠소. 나의 억울한 사정을 이해해 주시오. 언젠가는 이 억울한 누명이 벗겨질 게요.”“내는 그간의 사정이 어땠는지는 잘 모르지만도 배신자는 절대 용서할 수 없는기라예! 내는 이미 서울의 김단장으로부터 김관철을 붙잡아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니까네.”“붙잡아달라는…?”‘그렇다니까네. 내는 당신을 붙잡아 서울로 데려가겠소.”곽일의 이 말에 김관철은 제발 재판이 열릴 때까지만 못본척 해달라고 사정을 하며 자기의 입장을 이해하여 달라고 했지만 곽일은 막무가내였다.마침내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김관철은 품속에서 권총을 꺼내어 곽일을 향해 겨누었다.
“난 이제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으니 두려울 것이 아무것도 없다.”김관철은 눈에 핏발을 세우며 울부짖는 사자처럼 으르렁거렸다.“너무 흥분하지 마시지.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그런 장난감같은 권총을 빼들고 지랄하노? 네 뒤를 보시지. 뭐가 니를 겨누고 있는가 똑똑히 보란 말이대이.”곽일의 목소리는 얼음을 깨뜨리는 것처럼 날카로웠다. 김관철이 그 말을 듣고 뒤를 돌아보니 아닌게 아니라 험상궂게 생긴 부하 하나가 김관철을 향해 기관단총을 겨누고 있었다.“마찬가지야. 어차피 나는 살아서 단장 앞에 가진 못할 테니까!”“뭐라꼬? 아니, 그럼…”“그렇소 형도 생각해 보시오. 그동안 모두들 날 배신자라고 오해하고 있고, 단장님도 마찬가지지요. 내가 단장님 앞에 나타나면 시비곡직을 가리기 전에 난 맞아죽고 말거요. 그러나 난 절대로 단장님을 배신한 적도 없고 또 동지들을 배신한 적도 없소. 그래서 나는 언젠가 사람들 앞에서 그 오해를 풀어줄 생각이었소.”
“그럴 생각이라모 우째서 김단장이 감옥에 갇혀있을 때 검사를 찾아가 모두 털어 놓지 않았나 말이오?”“나도 그때 검사를 찾아가 모든 사실을 밝히고 단장님의 결백을 주장하려 했었소. 그러나 경찰의 교묘한 술책에 빠져서 그것을 말할 수가 없었던 거요.”“내가 알기로는 서대문 구치소 소장실에서 대질심문까지 했었다카든데, 그때 왜 모든 사실을 밝히지 않았소?”“아, 그때 나도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모든 걸 밝히려 했었소. 그런데 흥분한 단장님이 들어서자마자 내게 이야기 할 기회도 주지 않고 마구 때리고 차고 하지 않겠소. 그래서 나도 그만 화가 나서 뛰쳐나오고 만거요.”“그렇다꼬 김단장에게 살인미수 누명을 씌울 수가 있느냐 말야!”“그건 내 잘못이오. 나도 그건 시인하지만. 내가 서울로 잡혀 올라가면 영영 배신자로서의 오해를 풀길이 없소.”<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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