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재? 그 자가 왜 설쳐?”“뻔하지요. 그 새끼 요새 서대문 경무대에 자주 드나든다더니 아마 무슨 밀령(密令)을 받은 게 분명해요.”“허, 이놈들! 나라를 아주 깡그리 말아먹을 작정이군. 아무튼 몸 조심하게.”호랑이상의 조병옥 박사는 표정을 마구 일그러뜨리며 거구의 김두한 의원에게 자리를 권했다.“그래, 어디 다친 곳은 없나?”조병옥 박사는 술잔을 권하면서 이렇게 물었다.“제가 그깟 새기들 총에 맞을 것 같습니까? 기관총알이 비오는 듯이 쏟아지는 속에서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뛰어들어가 빨갱이 놈들을 나꿔챘던 전력이 있는 사람인데요.”받은 술잔을 단숨에 주욱 들이켜고 난 김두한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흠, 참 그렇군! 허허허.”조병옥 박사도 덩달아 호탕하게 껄껄 웃으며 말했다.그들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감회가 깊었다. 벌써 얼마만인가. 이들이 이렇게 호젓이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격의없는 대화를 나눈 것이.두 사람은 서로 말없이 술잔만 주거니 받거니 했다.
술을 마시던 두 사람의 눈이 축축히 젖고 있었다.“오랜만이군!”“네, 참 오랜만입니다.”두 사람은 똑같이 추억을 더듬고 있었다.김두한이 오키나와 미군형무소에서 사형을 면하고 풀려나와 귀국했을 때, 조병옥 박사는 김두한을 이 요정으로 데리고 와서 뱀새도록 주거니받거니한 일이 있었다.그때 그 요정집, 그 방인데 어찌 감회가 새롭지 않겠는가. 침묵이 한동안 지나서였다. 조병옥 박사가“자네 요새 인기가 좋은 모양이야.”하고 농담을 했다.“왜요?”김두한은 빙긋이 웃으며 반문하듯 말했다.“그러길래 자객들이 저격하려고 달려드는 것 아냐.”“원 박사님두 ….”두 사람은 허허 하고 헛웃음을 웃어댔다. 그 암울하고 답답한 기분,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려는 소인배들에 대한 울분을 술로 풀려는 듯 그들은 자꾸 자꾸 술주전자를 기울여 부었다.“이봐, 지배인! 기생 들여보네. 아주 이쁜 애루 말야.”조병옥 박사가 밖에 대고 소리쳤다.“네, 알아모셨습니다. 곧 대령하겠습니다.”지배인이 대답하고 물러가자 조병옥 박사는 김두한의 곁으로 다가와 앉으며 손을 잡았다.
“김군, 오늘은 나하고 밤을 새워 술을 마시자구. 나 외로워 견딜 수 없네 그려.”조병옥 박사는 거물 정객답지 않게 눈자위가 붉어져 있었다.“네, 저도 박사님의 심정을 잘 압니다. 그렇지만 염려마십시오. 야당만 단단히 결속한다면 개헌안은 부결됩니다. 자신있어요. 지금 자유당 안에도 반대하는 의원들이 저 말고도 5,6명 더 있습니다.”김두한은 손에 힘을 주며 자신있게 말했다.“알아. 그러나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는 거야. 더욱이 권력과 지위와 이익이 게재된 정치와 정치인은 믿을 게 못돼.”조병옥 박사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그럼 야당에서도 이탈자가 나왔단 말입니까?”김두한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서 물었다. 조병옥 박사가 거듭 한숨만 몰아 쉴 뿐 말이 없자 김두한은 다그치듯“어떤 놈입니까? 내 그 놈을 당장 ….”이렇게 말하는 김두한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술기운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윽고 조병옥 박사가 입을 열었다.그 사람만 나무랄 수 있나. 이 더러운 정치풍토를 원망할 수 밖에.”조병옥 박사는 술잔을 들어 단숨에 주욱 들이켠 다음 잔을 ‘탕’하고 술상 위에 놓았다. 그런 후 빈 술잔을 김두한에게 건네며 말했다.“자, 어서 술 들어!”“예!”김두한 의원은 아무리 마셔도 술이 취하지 않았다. 조병옥 박사가“자네, 자유당에서 암호투표한다는 소리 못들었나?”정색을 하고서 물었다. 조병옥 박사도 술이 오르지 않는지 정신이 말짱했다.“못들었는데요. 그런 정보가 있었습니까?”김두한의 눈이 툭 불거지며 조병옥박사를 쏘아봤다.“응, 이제 곧 의원총회에서 이 문제가 거론될 걸세. 잘 좀 알아보라구.”조병옥 박사의 이 말에 김두한 의원은 금방 흥분하며“그자들 이거 정말 안되겠구만. 그럼 나를 빼돌리구 저희들끼리 속닥속닥한 거 아니에요?”“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잘 좀 살펴 보라구.”“이 새끼들, 아무래도 이 김두한이의 주먹 맛을 한번 보아야겠군.”<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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