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적한 김두한 기생 초선이를 찾아가는데 …
울적한 김두한 기생 초선이를 찾아가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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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3-10-06 09:00
  • 승인 2003.10.0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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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동사무소나 면사무소에 가서 증명떼어 보셨디요? 이 증명 하나 떼는데 도장이 몇 개나 찍혀 나옵데까? 모르긴 해도 여닐곱개 내지 열개는 찍혀야 나올 거입네다. 그래요. 이렇게 수속이 복잡하면 일에 지장이 많디요. 나랏일도 이와 마찬가디야요. 뭘 하나 할라믄 까다로운 법이라는게 있어개지구 여기 저기 거치다 보문 시일이 넘어버려 국정에 지장이 많다 이거야요. 기래서 복잡하고 비능률적인 법을 간단하고 능률적인 법으로 고치자 이겁니다. 이게 바로 우리 자유당에서 주장하는 개헌안의 취지야요. 알갔습네까. 이제?”장경근의 말재주는 비상했다. 김두한의원은 부아가 치밀었지만 참고 있었다.장경근의원의 말이 듣고보니 그럴 듯했기 때문이었다.“그럼, 다시 낭독을 계속하겠습니다.”원내총무 이재학이 개헌안의 요지를 다시 낭독해 나갔다. 그런데 그 개헌안요지 속에서 대통령 중임제 철폐 조항이 있었다.

“잠깐!”김두한의원이 이재학의원의 낭독을 중단시켰다.“그 초대 대통령에 한해서는 차한에 부재한다 하는 뜻이 뭐요?”그러자 장경근의원이 재빨리 뛰어들어 보충설명을 했다. “초대 대통령에 한해서 ‘차한에 부재’라 함은, 즉 국부 이승만 대통령에 한해서만 이 중임제 금지조항에서 제외된다는 뜻이야요.”“중임제 금지조항에서 제외하다니, 그럼 죽을 때까지 대통령을 해먹을 수 있다 그런 말이오?”“말하자믄 그런 뜻이지요. 초대 대통령에 한해서만 종신토록 대통령을 지낼 수 있도록 길을 터놓는 것이야요.”“이봐, 장경근의원!”회의장 안이 쩌렁쩌렁 울렸다. 김두한의원의 얼굴이 시뻘겋게 닳아오르고 있었다. 김두한의원 뿐이 아니었다. 그 밖의 몇몇 의원들도 술렁거렸다. 마침내 김두한의원이 장경근의원을 향해 육두문자로 소리쳤다.“너 이리 좀 가까이 와!”“예? 왜 그러십네까? 김의원?”장경근의원의 표정은 금세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표정이 새파랗게 질린 건 장경근의원만이 아니었다. 의장석에 앉아 있는 이기붕의장을 비롯해서 그를 둘러싸고 있는 참모들이 모두 질려서 벌벌 떨었다. 김두한이 아예 반말로 나왔다.“너 동경제국대학 나왔다지? 무슨과 전공이야?”김두한의원의 이 안하무인격인 말에 장경근의원은 몹시 비위가 상하고 크게 모욕을 느꼈다.“그렇시다. 와이마르 헌법이 전공이요!”장경근의원은 내친 걸음이라 배짱을 내밀고 깔보는 투로 대답했다.“동경제국대학에서 와이마르 헌법을 전공했다는 작자가 민주주의를 망쳐?” 김두한의원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무서운 눈길로 장경근의원을 노려봤다. 그런가 했더니“이새끼!”하는 소리와 함께 어느새 날았는지 김두한의원의 몸은 공중에 붕 떠 있었다.“으윽!”어디를 어떻게 때렸는지 장경근의원이 비명을 지르며 벌러덩 나가떨어졌다.장내는 삽시간에 수라장으로 변했다.그러나 아무도 성난 사자처럼 날뛰는 김두한의원을 말리려 들지 못했다.“김의원! 이게 무슨 짓이야…?”이기붕의장이 모기소리만하게 한 마디 하고는 그대로 졸도해 버렸다.

가뜩이나 허약한 몸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의장님! 왜 이러십니까?”“아, 의장각하!”놀라서 멍청히 서 있던 참모들이 우르르 단상으로 몰려갔다.“잘들 해 봐!”김두한의원은 좌중을 한번 쓰윽 훑어보며 뼈있는 말을 내뱉고는 홱 돌아서서 나와버렸다.김두한의원은 그 길로 청진동에 있는 초선이의 집으로 갔다.김두한의원은 기분이 울적하고, 마음을 걷잡을 수 없이 외로울 때면 가끔 초선이의 집을 찾곤 했다.초선이는 퇴기였다.

퇴기라 해도 나이가 많은 것은 아니었다. 아직 서른도 채 못되는 퇴기라는 칭호가 그녀에겐 어울리지 않을 만치 앳되고 아름다웠다. 김두한의원이 들어서자 초선이 반기며“아이고, 영감님. 오늘은 어디서 바람이 불었길래 저희집에까지 왕림하셨나이까?”초선이는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모르면서 김두한의원을 안으로 모셨다.전에 같으면 ‘이이고 단장님!’ 했을 터인데 오늘은 ‘아이고 영감님!’ 으로 호칭이 바뀌어졌다. 김두한이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론 그를 부르는 호칭이 어느새 ‘영감님’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처음엔 김두한도 ‘영감님’이라는 칭호가 어색하고 생소하더니, 이젠 하도 들어서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다.그래 잘 있었나?”김두한의원은 피로한 몸을 아랫목 안석에 기대며 초선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초선이는 김두한의원의 정부이자 친구이기도 했다. 아무리 불쾌한 감정이 가슴 가득이 응어리졌다가도 초선이를 만나게 되면 봄눈 녹듯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소셋물 가져올까요?”“아니, 술상부터 가져오라구.”그런데 김두한의원이 초선이의 집을 찾아와 술상을 받고 있는 동안, 의원총회가 열리고 있던 자유당 중앙당사에는 초상을 당한 집처럼 어수선하고 표정들이 어두웠다.

자유당 국회의원 중에도 일부 반골들은 얄미운, 장경근이 잘 얻어터졌다고 고소해했지만, 대부분의 의원들은 폭력을 쓴 김두한을 단단히 벌줘야 한다고 떠들어대었다. 아무튼 그날 김두한의원의 주먹에 얻어터진 장경근의원은 앞이빨이 두 대나 부러지고 터진 입술을 다섯 바늘이나 꿰매는 중상을 입었었다.“에이, 고약한 사람같으니라구. 아무데서나 주먹을 휘두르다니.”까무라쳤다 깨어나서 병원에 입원까지 했던 이기붕의장은 여느 때와 달리 강경하게 나왔다. ‘눈에는 눈으로’라는 성경귀절을 생각해 낸 이기붕의장은 그의 측근을 시켜 이정재를 불러오라고 일렀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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