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0호>주먹천하
<제480호>주먹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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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3-07-10 09:00
  • 승인 2003.07.1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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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사람의 공명심이 이토록 처절하고 가혹한 사건을 저질렀다는 것은 도무지 자유당 시절이 아니고서는 꿈같은 일이었다.이 사건이 이승만 정권의 압력으로 흐지부지되고 말았으나 4·19혁명후 그 유가족들은 그냥 있지 않았다.1960년 5월 11일 유가족 70여명은 사건 당시의 신원면장 박영보를 산채로 화장하여 분풀이를 했다.어쨌든 당시 국회에서 조사단을 구성하여 사건 진상이 폭로되기 시작한 것인데 거창을 비롯한 함양, 산청, 문경, 함평 등 각처의 양민학살 사건이 꼬리를 물고 폭로되었다. 그리하여 국회조사단이 최종적으로 보고한 양민 피해 통계는 다음과 같다.경남=2,892명, 경북=2,200명, 전남=524명, 전북=1,028명, 제주=1,878명이다.히틀러는 아이히만으로 하여금 6백만의 유태인을 학살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한국의 과잉 충성 군상들은 동족을 6백여명이나 살해하고서도 관직에서 천하를 호령한 적이 있으니 과연 생각할수록 민족의 악몽이 아닐 수 없다.히틀러도 동족을 학살했다고 들은 일이 없는 우리는 당시의 사건 책임자들이 아이히만에 못지 않은 살인자로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정·부통령 직선실시

거창양민 학살 사건이 있은지 몇개월이 지나서였다.그동안 온갖 말썽 끝에 개헌에 성공한 이승만 박사 세력은 1952년 8월 5일 전국 일제히 실시한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여러 차례 내각책임제를 주장하는 여론이 지배적이었으나 온갖 비정상적인 방법을 총동원하여 세칭 부산정치 파동을 비롯한 많은 사건을 연출한 끝에 이를 보기좋게 물리치고 같은해 7월 4일 발췌개헌안 통과에 성공함으로써 같은 해 7월 18일에 정·부통령 선거법을 공포하기에 이르렀다.그리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1952년 8월 5일 직선제에 의한 정·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그동안 가짜 민의에 의해서 갖가지 정치 연극을 꾸며 온 「자유당」으로서는 이제야 진짜 민의에 의해서 국민총선에 부쳐 대통령과 부통령을 선출하자는 것이었다.제2대 대통령 후보에는 이승만, 조봉암, 이시영, 신흥우 등 네분이었다.

제3대 부통령에는 함태영, 이윤영, 이갑성, 조병옥, 임영신, 백성욱, 정기원, 전진한, 이범석 등 9명으로 그 후보는 난립상태를 면치 못하였다.선거일인 같은 해 8월 5일 아침 7시부터 전국 일제히 투표가 개시되었는데 총 유권자는 8백25만9천4백28명에 달하였다. 전국에 5천8백93개의 투표소가 설치되어 오후 5시까지 투표를 끝냈는데 개표는 이날 밤부터 전국 1963개의 개표소에서 일제히 개시되었다.특히 같은 해 8월 5일 선거에는 유엔 한국 위원단에서 6개반을 조직하여 전국적으로 선거 상황을 시찰하여 주목을 끌었다. 6개반이란 ①부산지구 ②서울·대저지구 ③청주·이리지구 ④광주·목포지구 ⑤강릉지구 ⑥대구지구를 말한다.이 날의 선거 분위기는 비교적 평온을 유지하였다. 비록 전시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엄청난 사고는 없었다.아침부터 상가는 철시되었고 관공서는 사무를 보나 마나한 상태였다.

그리고 은행은 고객 출입이 반감된 한산한 상태였으며 각급 학교는 하루를 쉬었다.한편 개표 결과 대통령에 이승만박사가 자유당 소속으로 5백만 표 이상을 얻어 압도적으로 당선되었다. 5백만 표는 전 유권자 3분의 2에 해당되었다. 부통령 선거에는 9명의 난립된 후보자 중에서 무소속의 함태영씨가 약 3백만 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이렇게 민주주의의 기틀이 잡혀갈 즈음. 6·25에 의해서 어려운 고비를 넘기면서 우리 나라는 새로운 시련을 각오하고 여사 창조에 다시금 발벗고 나서게 되었다.중앙선거위원회에서는 8월 13일 서울특별시 및 각도의 정·부통령 선거 결과와 상황을 민의원 의장에게 제출하였다. 따라서 민의원 의장은 13일 개회되는 국회 본회의에서 이를 접수하여 정·부통령 당선자를 공표하고 당선자에게 각각 통고하였다.

그런데 중앙선거 위원회에서 민의원 의장에게 제출한 이승만 대통령의 총 투표수는 5백23만8천7백69표이고 부통령 당선자인 함태영씨는 2백64만3천8백표였다.한편 전투표 현황을 보면 대통령투표에는 전 유권자 8백25만9천4백28명의 87%인 7백27만5천8백83표가 투표하였는데 그 중 유효표 수가 7백2만6백84이고, 무효표 수는 25만5천1백99표였다. 기권이 무려 98만3천5백45표로 되어 있다.그리고 부통령 선거투표에 있어서는 전 유권자의 88%인데 그 중 유효표 수는 7백13만3천2백98표이고 무효표 수가 13만7천5백85표, 기권이 98만8천5백46표였다.이제 여기서 각각 기호별로 투표수늘 보면대통령 후보①조봉암 79만7천5백4표②이승만 5백23만8천7백69표③이시영 76만4천7백15표④신흥우 21만9천6백96표부통령 후보자①이윤영 30만2천4백71표②함태영 2백94만3천8백22표③이갑성 50만9백71표④조병옥 58만5천2백60표⑤임영신 19만2백11표⑥백성욱 18만2천2백88표⑦정기원 16만4천9백7표⑧전진한 30만2천4백71표⑨이범석 1백81만5천6백92표 등이었다.이와 같이 하여 제2대 대통령으로 당당히 당선된 이승만 박사는 8월 14일 부산으로부터 오전 11시 30분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하였다.

거기에는 이미 수많은 꽃다발을 가슴에 그리고 목에 걸친 이승만 대통령은 얼굴에 미소가 담뿍 넘쳐 있었다.한편 특별 열차편으로 입경한 장국무총리 이하 정부 요인들은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차에 몸을 싣고 가두에 늘어선 시민들에게 답례를 하면서 차의 속도를 늦추어 경무대에서 몸을 쉬며 15일에 있을 제7차 광복절 기념식과 정·부통령 취임식을 위하여 자리에 들었다.광복절과 독립기념일 그리고 제2대 대통령의 취임식을 알리는 새벽 5시, 종로 인경 소리로 15일 아침이 밝자, 3일만에 활기를 회복한 서울의 거리는 물끓듯 끓어 올랐다. 가가 호호에는 태극기가 해뜨기 전부터 나부끼고 먼데서나마 이 날의 성전을 바라보며 축하하는 시민들은 중앙청 앞으로 몰려 들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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