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 양민 학살 사건
거창 양민 학살 사건
  •  
  • 입력 2003-07-03 09:00
  • 승인 2003.07.03 09: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학교 운동장에는 주둔군 장교 및 거창 경찰서 사찰계 형사 조용진, 박세복 등 5명과 지서 주임 박대성 경사 등이 와서 1천여명 주민 중에서 군인가족과 경찰 가족, 그 밖에 공무원 가족들을 가려내었다. 그리고 남은 주민들 1백여명(어린이, 젖먹이 포함)을 박산 개천가로 몰아 넣고 주둔군 2개 중대의 병력이 동원되어 근 2시간 동안 사격을 했다. 80객 노인과 젖먹이 어린애까지 공비와 내통한 사람이며 조국의 반역자로 몰아 학살한 것이었다.이렇게 잔인 무도하게 학살을 저지른 사건이 아무리 그 상황이 난국적인 전시였다 할지라도 그대로 묻혀버릴 리 만무했다.이 때 국회에서 논란이 벌어졌고, 결국 조사단을 구성하게끔 되었다.특히 거창출신 국회의원 신중목 의원은 서민호 의원의 도움을 받아 국회에 공포한 내용을 보면, ‘신원면에는 무시로 공비가 출몰하곤 했고, 그 때마다 부락민들은 자기들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공비들에게 양식을 주기도 했음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다 공산당이라 볼 수는 없다.

그런데 군에서는 사전 경고도 없이 부락을 모두 불태우고 주민들을 학살한다는 이야기가 항간에 떠돌아 젊은이들은 피신도 했고 남은 사람들은 전전긍긍했다. 1951년 2월 10일과 11일, 양일간에 걸쳐 3개 장소에서 젖먹이로부터 16세까지 아이들 3백27명을 포함하여 최소한 6백70명을 총살했고, 그 시체를 나중에 증거 인멸의 목적으로 한군데에 모아 놓고 휘발유로 태운 다음 그 옆에 있는 산을 폭파하여 시체를 묻었던 것이다. 죽은 사람은 성별로 보아서 여자가 많다는 사실(보고서=남223명, 여=304명)은 빨치산으로 볼 수 없다는 증좌인 것이다.’라고 논고되어 국회의 조사단이 파견되었건만 당시 계엄사령관 김종원 대령은 가공비(우리 국군이 공비로 위장함을 말함.) 조작으로 현지 조사를 중단시키고 말았다.국회에서 조사단이 현지에 도착한다는 말을 듣고 거창군 남상면과 신원면 사이 험한 계곡에 공비를 가장시켜 국군을 잠복케 한다음 따발총을 난사하여 조사단의 현지 도착을 방해하여 버렸다.이쯤되자 공포에 사로잡힌 국회 조사단은 거창경찰서에 자리를 잡고 당시 사찰주임이었던 유봉순이 사주한 조작 증언만을 듣고 있을 뿐이었다.

경찰로부터 공갈 당한 말은,‘부락민 2명이 사살당한 사실이 있으나 모두 공비와 내통한 자들이고 어린이와 노인은 없었다.’는 식의 내용이었다.한편, 신성모 국방장관은 자신에게 내려질 책임 추궁을 면하기 위하여 조사단도 아닌 김철안 및 김현숙 여사 등을 대동하고 현지 조사를 한 후 대통령에게 “………앙민 학살사건은 전혀 근거 없으며 양민이 아니라 공비를 토벌한 것입니다……….”라고 뜨거운 눈물을 떨어뜨리며 보고했던 것이다.

당시 제11사단 사단장이었던 최덕신씨가 국방부에 올린 보고에 의하면(1951년 3월 12일) 다음과 같다.주민을 학살한 원인신원면 일대의 각 부락민은 남녀노소 어린이(젖먹이 포함)를 막론하고 적정에 대하여 함구했을 뿐만 아니라 식사, 기타 금품을 제공하였다. 때문에 비참한 민족사를 연출한 것임.주민에게 주는 반향적성분자라고 대거 학살한 주민 중에는 적성분자가 간혹 있으나 대부분이 양민이었으며 심지어는 경찰가족이 포함되어 있어 무차별 사격에 주민들은 공포심을 가지고 있으며 군에 대한 신뢰감이 전무 현상임.국군비행에 대한 당시의 여론신원면 작전부대에 대한 여론 감정은 대단했으며 특히 부녀자에 대한 강간사건 및 국민에 대한 물품강요, 강탈 등 심지어는 주민 소유의 재산을 약탈하여 주민에게 강매하는 행위 등에 대하여 주민은 격분을 금치 못한 현상이 드러남.사살시체 처리 경과1951년 3월 10일경, 신원면 고정리 및 대현리에서 사살한 주민의 시체를 제9연대 한동석 소령은 부하 1백여명을 출동시켜 그중 약 40여명은 고지에 은밀히 배치하여 지방인의 출입을 경계케 하고 약 1백명의 인원으로 현지에 방치된 양민의 시체를 현지로부터 약 2킬로 떨어진 계곡에 은밀히 암장하였음. 이상의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단장의 보고는 국방부장관 신성모에 의하여 밝혀질 수가 없었다.또한 국회에서 소동을 일으키게 된 이면에는 다음과 같은 극적인 비화가 숨어 있다. 이 사건이 발생한 얼마후 하루는 어떤 젊은 사병이 엄상섭의원에게 이름을 밝히지 않고 두툼한 봉투를 전달하고 갔다.엄의원과 서민호 의원이 봉투를 열어 보니 그 속에는 수없는 해골바가지를 찍은 사진과 숱한 사람들의 명단이 들어 있었다. 그 해골바가지와 명단은 거창지구에서 학살당한 사람들의 것이었다.그리고 국회, 조사단이 구성되어 떠나기 며칠 전에 엄의원에게는 또다시 놀라운 정보를 제공해 주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것은 경남지구 계엄사령관인 김종원 대령이 국회 조사단을 방해할 목적으로 자기 부하를 공비로 가장시켜 도중에 잠복시켰으니 조심하라는 경고였다.

엄상섭의원은 조사단의 한 사람인 김종순의원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결국 김종원이 꾸민 연극은 정보와 같이 성공한 셈이 되었던 것이다.이 거창사건의 정보를 제공한 사람은 후에야 김모 장군의 부하였다고 알려진 바 있다.그후 양민학살 사건은 국회의 의결로 조사 끝에 1951년 12월 12일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신성모 국방부장관이 출두하지 않은 채로 판결이 내려졌다.김종원 대령 징역 3년.당시 보병 제11사단 제9연대장이던 오익균에게 무기 징역, 그리고 9연대 대대장 한동석 소령에 무기 징역이 언도되었다.이로써 이 사건은 명목상 일단락을 짓게 되었지만 그후 김종원은 대통령의 특사로 풀려 나와 군복 대신에 경찰관 제복을 입게 되었다.뿐만 아니라 무기징역의 언도를 받았던 오·한 등도 모두 풀려 나와 버젓이 행세하기까지 되었으니 해괴망측한 일이 아닐 수 없다.6백여명의 양민을 공비로 몰아 무참하게 학살한 「거창 양민 학살사건」이 흐지부지되어 버렸다는 것은 억울하게 지하에 묻힌 영혼들을 조롱하는 처사라 하겠다.<다음호에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