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8호> 주먹천하
<제478호> 주먹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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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3-06-25 09:00
  • 승인 2003.06.2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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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상륙작전 ‘성공’현대사의 비극 거창 양민 학살 사건 발생한·미 해병대는 마침내 비 내리는 인천 월미도에 상륙을 개시했다. 4백척의 상륙용 소형 배들을 네 번에 걸쳐 파상적으로 상륙시켜 무난히 교두보를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한국 함정 15척, 미군 함정 226척을 비롯하여 모두 7개국 함정 261척(영국 12척, 캐나다 3척, 호주 2척, 프랑스 1척 등)이 미 해군 소장 도일사령관의 지휘와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 지휘 밑에 이 작전은 치밀하게 감행되었다. 당시 유엔군 총사령관인 맥아더 원수가 유엔에 제출한 보고에 의하면 북한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완전히 포위하려는 작전을 벌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미 공군의 물샐틈 없는 방어에 북한군은 감히 범접을 못했다.아무튼 인천상륙작전의 제1단계는 월미도 점령이었다.

마침내 미 제5해병사단 제3대대는 월미도를 공격 개시한 이후 두 시간만에 월미도를 완전히 점령하는데 성공했다.제2단계 작전은 인천시가의 확보였다. 상륙 주력부대인 국군 해병 4개대대와 미 제7보병사단 그리고 미 제1해병사단은 전격적인 공격을 개시하여 순식간에 인천을 점령하고 북한군 제18사단과 수비대를 격파하고 같은 해 9월 17일 오전 8시 마침내 김포비행장을 탈환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북진부대와 나뉘어져 동쪽으로 진격한 부대는 10마일 진격하여 수원을 확보하므로 인천은 완전히 아군 수중에 들어와 버리게 되었다.제3단계는 서울 수복이었다. 2개 한국해병대와 미 제1해병사단은 같은 해 9월 19일 4곳에서 한강을 건넜고, 서울 서남방 2마일 지점에 돌입하여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 승전 뉴스가 전해지자, 이날 피난지 부산 역전에서는 수도 돌입 축하회가 벌어졌으며 20일에는 맥아더 장군 시찰 아래 아군 주력부대가 한강을 건너, 서울 공방전을 개시했다. 이 때 북한군은 소위 민족보위상이란 최용견을 서울 방위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약 2만 명의 병력으로 최후까지 저항하는 한편 수많은 애국지사와 부녀자들을 납치, 또는 학살하기에 이르렀다.

이윽고 20일 오후 유엔군의 수륙양용 전차대가 능곡에서 서울-평양간 도로를 차단하고 20일에는 한국군 해병대가 서대문 시가지에 돌입, 23일에는 서울에서 개전이래 가장 심하게 저항하는 북한군을 물리치고 미 제1해병사단은 덕수궁에 도달했고, 이날 아침 한강을 건넌 미 제7보병사단은 남산을 탈환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26일 정오 한국해병대 제2대대, 6중대 용사들은 중앙청에 감격의 태극기를 높이 올렸다. 이리하여 유엔군 반격작전 제1단계는 이날 오후 10시 20분에 완료되었고, 맥아더 원수는 서울 탈환 특별성명서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어 29일 아침에는 미처 북으로 도망치지 못한 북한군이 완전히 소탕된 서울은 알루미늄 합금제 교량을 미공군 비행기로 날라와 한강다리를 가설하기에 이르렀다. 그제서야 정부는 29일 환도하여 역사적인 서울 수복식이 거행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중공군 개입으로 인하여 51년 1월 4일 즉 1·4후퇴로 인하여 다시 부산으로 옮겼다가 51년 3월 14일 서울을 재수복해야 했다. 그러나 완전히 재수복한 것은 53년 8월 15일이었다. 다시 말해서 8월 15일에야 정부가 완전히 환도한 셈이다.

▨거창 양민 학살 사건

정부가 환도한 지 7개월여만에 한국역사상 매우 불행한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그것은 다름아닌 순박한 농민을 무턱대고 빨갱이로 몰아 6백여명이나 집단 학살한 무시무시한 사건이었다. 그러니까 광주민중 항쟁에 버금가는 커다란 사건이었다.1951년 2월, 경남 거창군 신원면 일대에서 공비 토벌중이던 11사단 9연대 3대대(대대장=한동석 소령)는 부락민이 공비와 내통했다하여 아무 죄없는 양민 6백여명을 집단 학살했다. 같은 해 2월 10일 내탄부락 골짜기에서 청장년 136명을, 11일에는 박산 계곡에서 젖먹이 50여명을 포함한 여자 304명, 남자 223명을 중화기로 무차별 학살하였다. 철없는 공명심이 빨갱이 소탕을 빙자하여 양민을 제멋대로 학살한 천인 공노할 사건을 일으켰다. 10년 권력 앞에 밝혀질 수 없었던 이 처절을 극한 사건. 당시의 면장(거창군 신원면) 박영보씨를 불에 태워죽인 사건을 계기로 하여 대검의 재수사 지시로 사건전모가 백일하에 드러날 단계에 이르고 말았다.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은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던 신성모씨를 필두로 그 말썽 많은 백두산 호랑이. 아니 부산에서 자기의 말을 듣지 않는다하여 김두한을 감옥살이 시킨 그 무지막지한 김종원 계엄사령관, 최덕신 사단장, 오익균 연대장, 한동석 3연대장 등과 유봉순 사찰주임, 박대성 지서주임, 그 밖에 당시 신성모 국방장관의 개인 조사반원이었던 김철안, 김현숙 소령 등이 수사 대상에 올랐다.경남 거창군 신원면 과장리에는 수시로 공비들이 출몰하여 주민을 괴롭히고 있었다. 공비들은 5일 새벽을 기하여 신원면 지서를 습격해 왔다. 그리하여 경찰관과 공비간의 치열한 교전끝에 쌍방이 30여명의 전사자를 내고 공비들은 산으로 동망쳐 버렸다.이 사건이 일어나자 주민들의 공포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공비 토벌에 나선 경찰관들까지 불안하기만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당시 계엄사령부는 보병 제11사단(화랑부대) 제9연대에 명령하여 한동석 소령이 지휘하는 3대대는 산청군과 거창군의 경계선이 되어 있는 감악산을 거쳐 거창군으로 진주하였다.주민들은 그제서야 안도감을 가질 수 있었다. 병력이 부족한 경찰관에 비하여 국군의 진주는 주민들에게 더 없는 은인이었다.

주민들의 환영은 물론 군인들에게 환대까지 하였다.다음 해 1951년 38선을 뚫고 북으로 진격하였던 국군이 뜻하지 않았던 중공군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1·4후퇴였다.같은 해 12월이었다. 신원면에 주둔한 군대는 어떤 정보에 의해서였는지 몰라도 대현, 와룡, 내탄, 중유 부락 등 6개 부락이 공비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마을 청년들 1백명을 색출하여 그들을 내탄 골짜기로 끌고 가서 그 중 3명만을 제외하고 기관총으로 갈겨대어 학살하였다.이튿날이 되어서였다. 주둔군은 와룡, 대현, 내탄, 중유 등의 1천여명 주민들에게 신원초등학교로 피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계엄령하에다 공비가 출몰하는 지구이고 보니 그 누구도 반항할 수 없는 처지였다.더우기 주민들은 아군이 들어와 피난하라는 지시이니 안심하고 학교 교정에 모였던 것이다. 국군을 믿을 수밖에 없잖은가.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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