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춥고 긴 여름(9)

강 승길은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깜씨’는 그들을 바람막이로 사용하기 위해 일부러 노출시켰을 확률이 컸다.
“그렇다면 ‘아이’들을 서둘러 보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불독’이 발라맞추는 말투로 독촉했다. 그거 받아놓은 밥상 아닙니까. 그러나 강 승길은 그를 무시했다. 그는 ‘딱부리’에게 ‘아이’들을 서넛 더 데리고 나가서 직접 감시하라고 이르고는 손가락을 꼽아보다가 느닷없이 ‘새끼 오야지’들을 소집했다.
“빨리 빨리들 들어오라고 해!”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강 승길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틀림없었다. 손가락으로 꼽아본 바에 의하면 여자의 출산 예정일과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깜씨’는 산부인과까지 동행할 것이 분명했다. 강 승길은 마음이 바빠졌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그를 영원히 만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까딱 잘못하면 역습을 받을 공산까지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날로 예정되어 있던 김 국진 이사와의 면담도 뒤로 미루었다.
소집 명령을 받은 ‘새끼 오야지’들은 한 시간이 경과되지 않아서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그들은 모두 무슨 일인지 궁금해 하는
모습들이었다.
“머시여, 갑자기 남북통일이라두 되뻔진겨?”
‘누시깔’은 들어서면서부터 큰 눈을 희번덕거리며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도대체 어떤 꿍꿍이속일까. 강 승길은 머리가 아팠다. 확신은 섰으나, 아무리 궁리해보아도 ‘깜씨’의 속내를 감지할 수가 없었다. ‘새끼 오야지’들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강 승길이 긴 시간 동안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의견을 물어보았으나 그들의 입에서도 확실한 해답은 얻을 수가 없었다. 럭비공 같은 ‘깜씨’가 어디로 튈지 예측할 수 없다는 게 그들의 궁색한 변명이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이번에 놓치면 ‘깜씨’는 다시 잡을 수 없다는 걸 알아야 해. 그렇다면 ‘깜씨’가 영원히 주저앉아 있겠어?
‘잠수’를 타면서 숫돌에 갈던 칼을 이번엔 거꾸로 우리들을 향해 겨눌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
강 승길이 엄포를 놓았으나 ‘새끼 오야지’들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실뚱머룩한 표정으로 나 몰라라 하는 모습이었다. 그들이 한참 뒤에 겨우 내뱉은 주장이란 그 ‘아이’들을 잡아다가 조져댄다면 뭔가 꼬투리를 잡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건 나도 알아. 그렇지만 거기 나온 놈들이 그런 각오도 없이 나왔겠어?”
“그래도 일단은 잡아다가…….”
제비는 그래도 지금은 그쪽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깝신거렸다. 그러나 강 승길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것이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으나, 문제는 그 ‘아이’들의 실토도 믿을 수가 없다는 데 있었던 것이었다. 그것도 예상하지 않고 ‘깜씨’가 그 ‘아이’들을 길거리로 내보냈겠는가. 강 승길은 한숨을 길게 뱉어내었다.
‘낡은이’의 의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여자의 어머니가 있는 아파트와 미용실을 더욱 철저히 감시하면 설마하니 딸이 출산을 하는데 움직이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강 승길은 그 의견에도 찬성할 수가 없었다. 기대와 달리 서로 짜고 노인네가 아주 딴 방향으로 움직인다면 오히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기가 될 공산도 있었던 것이었다.
“이런 ‘썩돌’ 같은 것들이 무슨 ‘오야지’들이라고…….”
강 승길은 혀끝을 찼다. 반편스러운 것들……. 그는 모두가 마뜩찮았다. 결국 인근의 산부인과는 물론, 서울 시내와 수도권까지 입원 예정인 임산부 접수 상황을 모조리 파악해서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그는 회의를 끝마쳤다.
“지금부터 이십사 시간 내에 처리해. 알았어?”
‘새끼 오야지’들을 내보낸 뒤 그는 다시 어금니를 짓씹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깜씨’는 골치가 아픈 존재였다. 그가 없었다면 지금쯤 얼마나 좋을까. 두 다리를 쭉 펴고 골프장 공사를 통해 들어올 ‘쩐’이나 머릿속으로 굴리면서 ‘띵까띵까’하고 있을 시간이 아닌가.
# 밀약
골프 회동이 끝난 뒤 황 회장은 박 의원을 교외에 자리 잡고 있는 한정식 집으로 모셨다. 내기골프에서 이긴 기분에 들뜬 박 의원은 한정식 집으로 오는 동안에도 내내 골프 이야기뿐이었다.
음식이 나오자 황 회장은 박 의원에게 공손히 술을 따랐다. 대낮이라면서 박 의원이 몇 번 손사래를 쳤으나 황 회장은 반주쯤인데 어떠냐고 고집을 부렸다. 이건 술이 아니라 약인데요, 뭐. 그가 상 앞으로 바투 다가앉았다.
“그런데 공천은 언제쯤이나 확정이 될 것 같습니까?”
술잔이 몇 순배 돌고난 뒤 그가 이윽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야당에서는 벌써 시작된 모양이던데…….”
그의 눈빛에서 심상찮음을 느낀 박 의원은 비로소 더 이상 골프 이야기만 하고 있을 계제가 아니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는 단숨에 잔을 비운 뒤 그것을 다시 황 회장에게 내밀었다.
“아마 한두 달 안으로는 확정이 될 것이오.”
“신문지상으로는 보름 안에 모든 게 끝날 것이라고 하던데요.”
황 회장은 박 의원이 건네주는 잔을 두 손으로 받았다. 그의 손이 수전증에 걸린 사람처럼 가볍게 떨렸다.
“그건 기자들이 추리해서 쓴 것이요. 당의 일정은 그렇지 않아요.”
박 의원은 상 가득히 놓인 찬 가운데에서 먼저 굴비에 젓가락을 대었다. 그리고는 밥을 깊게 떠서 미역국에 말았다.
“그럼 그때까지 기다려야 하나요?”
황 회장은 그러나 그때까지도 수저를 들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박 의원을 건너다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아니면, 지금부터 워밍업을 해도 괜찮은 건지…….”
그는 당장 선거 운동에 뛰어들더라도 거칠 것이 없다는 얼굴이었다. 이젠 켕길 게 없다는 자신감이 그의 얼굴에 역력했다.
“물밑에서 조용히 작업하는 것이야 상관없겠지만, 당에서 정식 발표가 있을 때까지는 노출시키지 마세요. 잘못하면 구설수에 오를 수도 있으니까.”
박 의원은 그쯤에서 그 이야기를 끝내기 바라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황 회장은 다른 때와 달리 그냥 물러서지 않았다. 말을 꺼낸 김에 확답을 얻어야겠다고 작심한 듯 더욱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럼 혹시 제가 몇 번을 공천 받을지는?”
“글쎄, 그것은 아직…….”
박 의원은 잠시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역시 노련했다. 곧 얼굴색을 고친 그는 초조해 하는 황 회장을 다독거리기 시작했다. 밥을 한 숟갈 떠서 입안에 가득 문 채 그가 말했다.
“불안해하지 마세요.”
“아니, 그냥 저는…….”
“저도 그 마음 이해합니다. 처음 입문할 때엔 저도 그랬으니까……. 그러나 걱정 말아요. 아, 내가 누굽니까. 그렇게 식언이나 할 위인으로 보입니까?”
박 의원은 활짝 웃었다. 그리고는 술잔을 다시 황 회장에게 건넸다.
“어쨌든 참신한 경제인이라는 이미지가 지금 먹혀들고 있으니까, 곧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기대해도 괜찮을 거예요. 그 점은 내가 보증할 수 있어요.”
황 회장은 그래도 못미덥다는 얼굴이었다. 그가 걱정하는 문제는 공천이 아니라 번호였다. 남의 사정 보다가 갈보 난다고, 현재 돌아가는 여론으로 살펴볼 때 5번까지는 당선이 확실하고, 10번까지는 확률이 반반이며, 그 번호 이상 넘어간다면 빛 좋은 개살구 신세가 되기 십상이라는 게 그의 판단이었던 것이었다.
“번호를 앞으로 좀 당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황 회장의 말투는 다시 사정조로 바뀌었다. 만약 그런 방법이 있다면 후원금은 얼마라도 상관이 없다는 투였다. 그러나 박 의원은 즉답을 피했다. 어느새 얼굴이 불콰하게 달아오른 그는 다시 슬그머니 화제를 골프 이야기로 돌렸다. 지난번 황 회장으로부터 선물 받은 골프채가 썩 마음에 든다면서, 오늘은 티오프 할 때부터 왠지 예감이 좋았다고 너스레를 떨어대는 것이었다.
“언제쯤이면 내가 황 회장과 스크래치로 공을 때릴 수 있을까?”
박 의원은 얼굴 가득 웃음꽃을 피웠다.
<다음호에 계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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