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식들, 이제야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는군. 난, 겁나는 게 없는 사람이야.’
이제야 겨우, 신동협 병장은 앞서 월남으로 떠난 병사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순자네 개를 잡아먹고 떠난 김칠규 병장이나 최시열 상병의 괴롭고 서러운 마음을 알 수가 있었다.
백차는 구만리의 38교, 소양강을 가로지르는 목재로 만든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거무칙칙한 기름을 잔뜩 먹인 긴 나무다리, 한없이 넓은 강변과 푸른 강물, 군사 작전용 비극의 다리, 분단된 민족이 만든 역사의 산물인 다리였다.
다리 위로는 군사용 차량들이 질주하고, 끝 간 데 없이 가마득하게 내려다보이는 강바닥은 절망의 나락처럼 보였다.
2년 전 어느 겨울밤에 신동협 병장은 구만리의 38교를 건너 이곳으로 왔다. 그러나 이제 그는 구만리의 38교를 건너 새로운 세계로 가고 있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낯선 곳. 그곳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다리를 건너자 멀리 군단 연병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이미 많은 병사들이 집결해 있었다. 그곳에서 한 달간 현지 적응 훈련을 받은 후 월남으로 떠나갈 것이었다.
“까불지 마, 개새끼들아! 난, 떠난다 말이야. 죽을 지도 모르는데 뭐가 겁나겠어, 다시 안 돌아오면 될 거 아냐.”
그는 자꾸만 흐려지는 두 눈을 손바닥으로 훔치며 중얼거렸다.
제14편 유령중대
위기의 순간, 병사들은 신을 찾는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신 그 분은, 그 어느 편도 아니라는 것을 곧 알게 된다.
7중대가 넓은 관목 숲을 통과하자 어느새 시계 바늘은 오후 3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전방에 장막처럼 드리워져 있는 킬러밸리는 이제 막 짙은 산 그림자를 만들며 어둠 속에 잠겨들고 있었다.
산이 어둠 속에 잠기자 골짜기는 더욱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7중대는 평소 그들이 잘 써먹는 수법대로 이 열 횡대로 키가 큰 갈대밭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멀리서 적의 첩자가 보면 중대가 이 열 횡대로 갈대밭을 수색하며 지나가는 것으로 보이나 사실은 통과하면서 해당 분대는 매복 지점에 도착하면 감쪽같이 숨어 버리는 것이다. 이런 수법은 적의 첩자에게 중대가 매복 없이 그대로 통과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기만하는 방법이었다.
병사들은 개처럼 혓바닥을 길게 빼물고 헐떡거리며 키 큰 갈대와 잡목으로 뒤엉킨 정글을 칼로 뚫으며 전진했으나 통과 속도는 아주 느렸다. 드디어 선두 소대가 세 그루의 야자수가 나란히 서있는 외딴 오두막집에 도착했다. 방탄복을 입은 중대장 이하 전 장병들은 목욕이라도 한 것처럼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병사들은 어느새 탄띠에 차고 있던 수통 4개의 물을 모두 마셔 버리고 목이 타서 쩔쩔매고 있었다.
병사들은 소금을 물에 탄 수통 1개, 커피를 물에 탄 수통 1개, 그리고 맹물을 가득 채운 수통 2개를 허리에 차고 다녔다. 정글 속을 수색하다 보면 소금을 탄 수통의 물을 맨 마지막으로 마시게 되는데, 그 때에는 몸에 염분이 모두 땀으로 빠져나가 의식이 흐려지기 때문이다. 눈앞이 가물가물해질 때 소금물을 마시면 마치 안경을 쓴 것처럼 금방 눈앞이 확 밝아졌다. 그러나 소금물까지 모두 마셔 버리면 그 때부터는 한층 더 목이 탔다. 따라서 고참들은 좀처럼 소금물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은 사정이 달랐다. 소금물도 바닥 난 것이다.
“야 물이다, 물!”
오두막 뒤편을 수색하고 있던 2소대 지역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 왔다. 병사들은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우르르 그 쪽으로 몰려갔다. 그곳은 우물이 아니었다. 스콜이 고여 있는 물 웅덩이였다. 병사들은 철모로 웅덩이의 물을 푹 떠서 입 속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한없이 꿀꺽꿀꺽 마시기 시작했다. 철모 가득히 물을 마신 병사들은 또 다시 물을 떠서 몇 모금 마시고는 바닥을 들여다보았다.
철모 속에 담긴 흙탕물 속에는 실같이 가느다란 빨간 지렁이들이 수없이 꼼지락거리며 헤엄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병사들은 전혀 개의치 않고 철모의 물을 재빨리 수통에 퍼 담았다. 동작이 뜨면 웅덩이의 물도 삽시간에 바닥이 나기 때문이다.
두 채의 오두막은 폐가가 된 지 무척 오래 된 것 같았다. 대나무로 얽어맨 벽들은 허물어져 구멍이 뚫렸고 바닥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집안에는 찌그러진 바구니와 가재도구들이 함부로 흩어져 있었다.
마당은 잡초가 우거져 쑥밭이 되었고 헛간에는 야생의 들개 한 마리가 커다란 입을 벌리고 죽어 있었다. 들개의 몸에는 하얀 구더기들이 한바탕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허리까지 오는 키 큰 선인장이 탐스러운 하얀 꽃을 머리에 화환처럼 쓰고 있었다. 잠깐 스쳐 가는 미풍에 키 큰 선인장의 짙은 꽃향기가 처녀의 산뜻한 체취처럼 실려 왔다. 잠깐의 휴식을 끝낸 7중대는 곧 작전에 돌입했다.
김영일 중위가 이끄는 1소대는 중대 퇴각로를 확보하기 위해 헬기 착륙장을 만드는 임무를 맡았다.
1소대장 김영길 중위는 소대원을 이끌고 관목이 무성한 나지막한 언덕 위로 올랐다. 그곳에 도착하자 김영길 중위는 몹시 기분이 좋았다.
멀리서 보기보다는 장애물이 없는 이상적인 헬기 착륙 장소였다. 바로 아래에는 중대 본부가 매복하고 있는 지점과 마른 실개천이 환히 내려다 보였다.
실개천 건너편에는 킬러밸리로 들어가는 오솔길이 이제 막 어둠 속에 잠겨 들고 있었다.
킬러밸리의 높은 산들이 점점 어둠 속에 잠겨 드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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