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4월 25일에 시, 읍, 면 의원선거 및 5월 10일 도의회 의원의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여당이 승리하였는데, 그 때문에 이들 지방 의원들은 정부측 개헌안을 지지하고 절대 다수의 국회의원의 서명으로 제안한 내각책임제에 맞서려고 일어났다.이렇게 험악한 공기는 서민호 국회의원이 순천에서 현역대위를 사살한 것을 빌미로 삼아 더욱 격화되었다.5월 15일경부터는 민족자결단이니, 백골단이니, 땃벌떼니 하는 이름으로 국회의원 소환 및 국회 해산을 요구하는 관제 데모가 거의 매일 같이 일어났다. 이 데모는 부산거리를 휩쓸었고 때로는 국회 의사당을 휩쓸었고, 신익희 국회의장의 집을 포위하고 아우성을 쳤다.
이 가운데서도 자유당 간부들 사이에는 분열이 생겨 애당초부터 내각책임제를 지지하는 자유당 원내파와 속칭 원외파로 갈라져서 대립을 하고 있었다.이 어수선한 틈을 타서 이범석씨가 내무부장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즉시 25일을 기하여 경남, 전남북 일대에 후방의 나머지 공비를 조속히 소탕하기 위해서라는 구실로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의 결의에 의해서 석방되었던 서민호 의원을 그날로 재구속하였으며, 26일에는 50여명의 국회의원이 탄 버스가 헌병대에 연행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혼란한 틈을 타 국회내의 교섭단체가 생겼는데, 이를 신라회라 하였다.신라회 단체에는 원내 자유당의원과 이진수외 40여명이 규합되었고, 장택상 국무총리가 중심이 되어 있었고, 이종영, 이상철, 오성환, 윤재근, 이재형의원 등이 보좌하고 있었다.6월 12일 신라회를 중심으로 숙의를 거듭하던 세칭 소위 제3개헌안은 신라회와 삼우장파와의 타협하에 기초를 완료하였다.이 제3개헌안이란 말할 것도 없이 정부와 국회가 제안한 두 개헌안을 발췌하여 종합한 것으로 그 내용은 ①대통령 직선제 ②상·하 양원제 ③국무총리의 제청에 의하여 국무위원의 임명과 면직 ④국무원에 대한 국회의 불신임결의, 단 국무원 조직완료 또는 총선거 직후의 신임결의로부터 1년이내에는 할 수 없고, 재적 3분의 2 이상의 찬성 결의는 언제든지 할 수 있음. 드디어 이승만 대통령 지지파들은 7월 2일 오후 비밀회의를 열고 헌법개정 계획을 추진시키기 위하여 이내무부장관에게 경찰로 하여금 모든 국회의원 자택을 방문케 하여 2일밤에 열리는 국회에 출석하도록 종용하였다.
또한 개헌안을 통과시키기 위하여 2시 30분경 갑자기 월여동안 구속중에 있었던 의원이 석방되어 국회에 출석하였는데 구금되었다 석방된 의원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곽상훈, 이용설, 정헌주, 권중돈, 김의준, 장홍염, 이석기, 임흥순, 서범석, 양병일 등 10명이었다. 이 10명의 석방된 의원들은 자유당의 국회의원들의 요구에 의하여 석방된 것인데 석방되자 마자 하는 수 없이 국회에 출석하였다.이들은 국회에서 반대파들에 대한 신분보장을 위한 성명을 발표하고 국회의원들을 무조건 구속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라고 외쳤다.
여당의원들은 야당의원들의 요구조건을 들어주는 반면에 여하간 개헌안의 통과에 필요로 하는 1백23석이란 좌석은 사수하려고 했다.3일 국회는 삼엄한 경비 속에 12시 30분, 여야의원 1백17명의 의원이 모였는데 전체 출석의원은 2백25명이었으나 일부 의원들의 퇴장으로 결국 나머지 1백17명이 경비가 삼엄한 가운데 개회하였던 것이다.의사당의 문은 전부 봉쇄하고 의원의 출입에 필요한 정문에만 감시를 삼엄히 하는 가운데 어떠한 사람이고 출입을 할 때에는 삼우장파와 남송학의원의 출입허가증이 있어야만 출입하였다.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열린 국회는 개회와 동시에 회기 초인만큼 전원 위원장을 선출하자는 동의가 있어 전일 민국당을 탈퇴한 지청천 의원을 재적 1백17명 중 95표로 당선시킨 후 1시30분부터는 비공개 전원위원회로 들어갔다.
전원위장의 당선 발표가 있자, 장내는 환영 박수가 일어났으나 이는 삼후, 신라파 집중 환호였고, 원내 민국측에는 침묵이 흘렀을 뿐으로 이날 회의는 분명히 불협화음조로 회의를 가졌다.이렇게 국회는 가까스로 개회의 선언을 해놓고 토의하였으나 성과를 보지 못하고 말았다.이들 국회의원들중 철야로 나선 의원은 불과 82명 정도였는데 이들에게는 특별한 대우를 했다.한편 참석지 않은 국회의원은 경찰로 하여금 의사당에 참석하도록 연행하기에 이르렀다. 이윽고 4일이 되어서였다. 국회는 연일 계속되는 가운데 야당의원들은 지연작전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민국당 및 무소속 의원들은 낮 12시가 넘도록 자파간에 협의를 계속하였으나 끝을 맺지 못하여 여당의원들이 격분했으나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이날의 출석 국회의원은 1백72명이었다. 이리하여 오랫동안 국내외의 관심을 집중시켰던 정치파동은 7월 4일 밤 9시 30분 정부가 제출한 개헌안과 국회에서 제안한 양개헌안 중에서 적당한 조항을 발췌하여 통과시킴으로써 끝을 맺게 되었는데 아침부터 국회의장실에서 논의하고 있던 민국당, 무소속 등의 65의원은 오후 6시 30분 전기 발체항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에 놓여서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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