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차례에 걸친 암살사건 중에서도 가장 아슬아슬한 사건이 김시현 옹이 주동이 된 암살모의라 할 수 있다.때는 1952년 6월 25일 임시수도 부산에서였다. 김시현 옹과 함께 이대통령 암살을 모의한 당시 62세의 유시태 노인이 제2주년의 6·25동란을 기념하는 식장에 태연히 걸어들어 오고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그들은 계획적이었다.기념식장에서 되도록이면 연단가까이 참석하여 연설하는 이대통령을 권총으로 저격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그러한 계획이었다. 그리하여 유씨는 권총을 모자 안에 숨겨 머리에 얹고는 태연하게 기념식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는 식장 전면에 차려 놓은 귀빈석에 자리잡았다. 김시현 옹도 국회의원석에 자리잡아 긴장된 가슴을 억제하고 있었다.북한 공산군의 남침을 규탄하는 6·25 제2주년의 기념식이 막 거행될 순간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연단 뒤에 들어섰고, 식은 곧 시작되었다.
식순에 따라 이승만 박사가 연단에 올라갈 때 유시태나 김시현 옹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미리 마련된 식사를 읽어 내려가는 이박사의 연설을 두 귀를 모아 듣고 있던 청중들, 그리고 두 손에 땀을 쥔 채 이박사의 생명을 노리는 김시현 옹과 유시태씨.어느 틈엔지 권총을 포켓에 넣어 가지고 기회만 노리고 있던 유시태씨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식사를 읽어내려가는 이박사와의 거리는 불과 2미터였다. 이대통령은 그때 아무 것도 모른 채 불과 2미터 뒤에서 자기의 생명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알지 못했다.이박사 뒤 귀빈석에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난 유시태씨는 즉각 이승만 대통령을 향하여 권총을 겨누어 방아쇠를 당겼다.“찰칵!”웬 일일까. 다시 한 방 겨누어 방아쇠를 당겼다.“찰칵!”권총을 두 방이나 쏘았으나 한 방도 실탄이 나가지 않았다. 모두가 불발탄이었다. 이윽고 세번째 쏘려는 순간, 당시 치안국장이었던 윤우경씨가 육탄처럼 아니 번개처럼 날아들어 권총을 낚아채며 유시태씨의 몸을 껴안았다.
동시에 헌병들이 달겨들어 유씨의 팔을 쳤다. 유씨의 손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권총소리가 둔탁하게 들렸다. 모든 일은 끝났다. 윤우경 치안국장은 그 때까지도 유시태를 꽉 껴안고 있었다. 유시태씨의 체포와 함께 얼마 안았어 김시현 옹도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지난날의 혁명아로 자처하던 김시현 옹과 유시태씨의 계획은 여지없이 무너진 셈이다.이로써 이박사는 하늘의 뜻을 부여받은 사람처럼 위기를 모면한 안도의 숨을 쉴 수가 있었다.1952년 6월 어느날 이었다. 첫 여름의 바람이 하늘거리는 대구의 삼호여관에서는 유시태씨가 묵고 있었다.유 노인은 일정한 직업이 없었다. 사람들의 말로는 애국심이 남달리 강한 사람이라고들 했다. 아닌게 아니라 그는 일제시대에 한국 임시정부가 중국에 있을 때 그 외곽 단체인 의열단의 쟁쟁한 멤버로 활약하였다. 일본 사람으로 침략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사람과 친일파를 제거하기 위해서 조직된 의열단의 항일 투쟁에 있어서 행동대원으로 큰 활약을 하였다.
이러한 의거에 가담하여 싸우다가 10여년 동안을 왜놈의 감옥에서 보내게 된 불우한 청년기를 보낸 바 있다. 그뒤 조국이 해방되자, 그도 국가 장래를 위하여 공헌하려 하였다. 그런데 세상 일이 그와는 맞지 않게 돌아가는 데다 이박사의 정치에 환멸을 품고 있었는데 때마침 정치파동이니 뭐니 해서 이박사의 비행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자 ‘이승만을 죽여야 한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 무렵 그의 결심을 확신에 차게 해준 사람이 있는데 그는 김시현 옹이었다.대구 삼호여관에 투숙하고 있던 김옹은 유시태를 만난 것이 무엇보다도 반가웠다. 두 사람은 고향이 같을 뿐만 아니라, 우국충정도 같았다.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서 이승만 대통령을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을 김옹은 벌써부터 가지고 있었던 터이다.경북 안동 출신인 두 애국지사는 독립운동 시절에도 똑 같은 의열단에 가담하여 활약하였고, 형무소살이도 같이 치르게 되었던 것이다. 동향일 뿐만 아니라 30여년을 사귄 다시 없는 동지였으니 반가웠다. 그들에겐 할 일이 있었다.
그들 둘이서만 해야 할 일이었다. 그들은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나서 곧 이박사를 암살할 계획을 꾸몄다.“이젠 참을 수가 없으니 없애버려야겠네……….”누구의 입에서 먼저 이런 말이 나왔는지 모르나 둘이서 즉각 동의를 하였다. 김옹은 이승만 배격론자로서 그를 제거하기 위하여 수년 전부터 암살을 계획해 오던 참이었다.1951년 12월에 김시현은 자기가 천거한 인천 형무소장 최양옥에게 이박사의 암살을 제의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최는 이 제의를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당국에 밀고해 버렸다. 이 일을 계기로 하여 김옹은 여러 차례에 걸쳐 당국에 소환되었는데 그때마다 이를 사실 무근이라고 해명하기 위하여 진땀을 빼야 했다. 가까스로 봉변을 모면한 셈이다.
김옹은 당시 70세로 백발을 날리는 노인이었는데 그들은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서 실로 위험천만한 밀계를 짜고 있었다.두 노인은 즉석에서 의견의 합의를 보자, 그들은 곧 암살수행을 위한 준비를 극비밀리에 추진했다. 권총을 김옹이 입수하기로 하고 거사는 나이가 젊은 유시태가 맡기로 했다. 유시태는 6월 17일 마지막으로 가족을 보기 위하여 고향을 찾았다. 권총과 탄알을 김옹이 준비하기로 했으니 마음이 놓였으나 이박사를 향하여 권총을 쏘아야 할 유시태로서는 일이 제대로 되든 안되든 죽음은 이미 각오한 바였다. 죽기 전에 가족들의 얼굴이나 한 번 보려는 생각에서 고향인 안동을 다녀온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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