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도 권력도 박차버린 김두한
김두한이 김종원의 청을 거부한 후 한달도 못되어 사직당국에 의해 또 쇠고랑을 차게 되었다.죄명은 허울좋게 공갈, 협박, 공금 횡령죄라는 것이었다.당시 김두한이 사무실로 쓰고 있던 3층 노조 건물에는 노동자의 가족들로 돗대기 시장바닥을 이루고 있었다.노동자들은 대다수가 가난하고 스스로 살아갈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라 5백여명이 넘는 가족을 김두한이 먹여 살려야만 했다.김두한은 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각 기업체나 큰 기관을 찾아 다니며 기부를 받아 이들의 입에 풀칠을 해주고 있었다.당국에서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두한을 공갈 협박 혐의로 붙들어 들인 것은 순전히 김종원이 시나리오로 꾸민 농간 때문이었다.“내게 죄가 있다면, 오직 국가와 민족을 사랑한 죄밖에 없소.”김두한의 이 떳떳한 태도에 취조관들도 할 말을 잃었다. 이윽고 취조관의 신문이 시작되었다.
“광복동 댄스홀을 습격하여 갈취한 금품은 어떻게 처분했소?”이 신문에 김두한은 수갑찬 손으로 책상을 쾅 내려쳤다.“전에 말하지 않았소! 모두 일선에서 군번도 없이 싸우다가 부상당한 학도 의용군들에게 보냈다고 말이오!”취조관은 더 이상 묻지 않고 김두한을 영창에다 집어 넣고 말았다.며칠이 지나서였다. 모처에서 왔다는 자가 감방으로 김두한을 면회하러 왔다.김두한이 그 자를 만나주었다.“저는 김선생을 위해서 몇 말씀 드리러 왔심더.’그 자는 은근한 목소리로 김두한을 설득했다.“말씀하십시오.”“김선생님은 김좌진 장군의 아드님으로서 대한민국에서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후손이십니더. 그래서 충분히 영화를 누릴 수 있으신데도 불구하고, 시대를 잘못 만나 고생을 많이 하고 계십니더.”그 자의 이 말에 김두한의 눈이 가늘게 떨렸다.
“지금, 김선생님은 기회를 잡으실 때입니더. 김선생님은 너무 성질이 곧으셔서 직선적으로만 나가시려 합니더. 조금만 굽어서 돌아 가시면 영화가 따를 것입니다만. 제 말 알아 들으시겠심니꺼?”“시끄럽소! 어서 썩 물러가지 못해요!”김두한은 주먹으로 콘크리트벽을 쾅쳐 버렸다. 그러자 모처에서 왔다는 청년은 다음에 또 들를테니 잘 생각해 보라는 말을 남긴 후 돌아가 버렸다.(조금만 굽어서 돌아가면 영화가 따른다고?)김두한은 혼자 입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조금도 내키지 않는 말이었다.(천만에! 너희놈들이 정말 이 김두한이를 모르는 모양인데 어림도 없지. 어림도 없구 말구.)
김두한은 이내 눈을 지긋이 감고 깊은 생각에 잠기고 있었다. 그러자 그간 걸어온 파란만장한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그러나 그가 생각하기에는 어느 하나도 굽어서 돌아온 것은 없었다. 그가 옳다고 판단한대로 곧게, 그리고 양심껏 행동하며 살아왔다고 생각될 뿐이었다.아무튼 1개월간의 영창생활을 마치고 김두한은 끝내 혐의가 풀려 자유의 몸이 되었다.(나도 이제 정치를 해야겠어! 무식한 이 김두한이가 민주주의를 좀 해야겠다는 말씀이야……….)김두한은 파도가 출렁이는 넓은 바다를 향해 이렇게 혼잣말을 했다.
▨인천상륙 작전
그러니까 북한은 6·25전쟁을 일으켜 불법 남침을 시작하여 전국을 물밀 듯이 휩쓸었다. 우리 국군과 유엔군은 후퇴에 후퇴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낙동강에 최후의 교두보를 구축하고 치열한 전투를 벌인 채 대치하고 있는 동안 유엔의 후속 지상부대는 속속 부산으로 상륙하였다. 이 때가 1백20마일 낙동강 전선에서 교착 상태에 빠졌던 1950년 8월 19일이었다. 당시 미육군 참모총장 코린스 장군과 해군 작전부장 셔면제독은 멀리 워싱턴에서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를 방문하는 한편 같은 해 8월 22일 한국 전선을 시찰하고 현지 수뇌자들과 일련의 군사회의를 가졌다. 수세에서 반격으로 한국 전선의 정세를 일변시켜려는 중요한 전술과 전략 문제가 논의되었다.회의의 결과가 발표되었는데 코린스 장군은,“한국에서 유엔 교두보를 유지할 자신이 있습니다.”라고 말했고, 셔면 제독은,“미 해병대의 지상항공 증원대와 극동 해군부대를 한국 전선에 증원하겠습니다.”하고 말했다.
또한 이 회의에서 뭣보다도 중요한 것은 한국 전쟁사에 길이 남을 인천상륙 작전이 극비리에 논의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때를 같이 하여 한국 해군에 의한 인천상륙의 전초전이 벌어졌었다. 그러니까 같은 해 8월 16일부터 한국 해군은 인천 공략의 전략적 요점인 적덕도에 공격을 시작하여 역시 같은 해 8월 20일에는 적덕도를 완전히 탈환하기에 이르렀다. 23일에는 영흥도, 같은 해 9월 10일에는 연평도를 완전히 점령해 버렸다.상륙부대를 실은 대수송선단은 9월 20일 부산항을 떠나 인천으로 향하였다.이 수송선단의 행방과 목적지가 북한군들에게 알려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유엔 함대와 비행기들은 동서양 해안에 마구 공격을 가하였다.
전함 미주리호의 16인치 포는 동해안의 삼척을 때렸고, 해군 특공대들은 포항서 북쪽인 군산 등지의 북한군을 건드려 보기도 하면서 북한군의 신경을 교란시켰다. 병력과 물자를 실은 유엔 함정이 조용히 인천 앞바다를 뒤덮고 있었다. 같은 해 9월 12일에는 함재기가 서해안 일대를 강타했고, 같은 해 9월 13일부터는 마침내 유엔 함대인 순양함과 구축함이 인천을 중심으로 함포사격을 시작하였다.같은 해 9월 15일 저녁 6시가 되어서였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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