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미국식 의회가 웬말이냐"
"대한민국에서 미국식 의회가 웬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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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3-10-17 09:00
  • 승인 2003.10.1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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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이든지 시켜주시기만 하십시오. 견마가 되겠사옵니다.”이정재는 덩치가 아까울 만큼 코가 땅에 닿도록 허리를 굽혔다. 그러자 이기붕의장은 보기가 민망한지“알았어. 오늘은 그만 돌아가 보래두. 나 몸이 피곤해서 좀 누워야겠어요.”이기붕의장은 자신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아, 네……….”이정재도 따라 일어나며 이기붕의장의 눈치를 살폈다. 서로 눈이 마주치자“잘 가라구.”라고 이기붕의장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러자 이정재는 두꺼비 잔등 같은 손으로 이기붕의장의 조그맣고 연약해 뵈는 손을 싸잡고 황송해서 어쩔 바를 몰라했다. 사실 이기붕의장이 자기에게 악수까지 청한다는 것은 너무도 파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그날 자기 사무실로 돌아온 이정재는 가슴 가득히 차오르는 흥분을 누를 길이 없었다.

그는 이기붕의장이 증표라며 하사한 백금시계를 소중한 듯 꺼내보았다.(나도 이젠 출세의 길에 오를 수 있다. 김두한이 제깐놈만 국회의원 하란 법이 있나?)그는 이렇게 마음속으로 뇌까리다가 문득 무엇인가 집히는 데가 있어 자리를 차고 벌떡 일어났다.(그렇다. 의장각하께서 내게 이 징표를 내려주시고 악수까지 청한 것은 바로 그것을 부탁하는 뜻이다.)이런 생각이 들자, 이정재는 급히 비서를 시켜 유지광을 불러들였다. 이윽고 어디에 있다가 왔는지 유지광이 급히 사무실에 당도했다 유지광을 본 이정재는 단도직입적으로 지시를 내렸다.“예, 알겠습니다. 곧 아이들을 시켜 김두한의 거처를 알아내도록 하겠습니다.”“사돈, 사회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해서 일을 처리하도록 해요. 어떤 일이 있어도 상처를 내지 않도록!”“예, 실수 없도록 하지요.”이정재도 오늘 자유당 의원총회에서 일어났던 불상사를 신문가십기사를 보고서 잘 알고 있는 터였다. 이기붕의장이 자기에게 직접 부탁을 안했지만 이 기회에 충성심을 보일 필요가 있다고 그 나름대로 판단했던 것이다.두목 이정재의 영을 받은 유지광은 호랑이처럼 날렵한 행동대원 5~6명을 거느리고 김두한의 행방을 찾아나섰다.

어둠이 짙게 깔린 거리. 수상한 사내들이 우중충한 청진동 골목길을 조심조심 헤쳐나가고 있었다.“형님, 초선이네 집이라면 거진 다 왔습니다요.”“응, 모두들 조심해라.. 김두한은 비록 늙었어도 발이 빨라.”일행중 가장 키가 당차게 생긴 사나이, 수상한 사내들이 형님이라고 부르는 그가 바로 이정재의 일급 참모요,싸움의 명수라고 불리는 유지광, 바로 그 사람이었다.유지광은 발소리를 죽여가며 조심 조심 초선이네 집으로 다가갔다.자그마한 한옥, 여염집처럼 조용하기만한 그 집 안에서 김두한의원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아무도 없이 조용하게 초선이와 마주앉아 주거니 받거니 대작하고 있었다.“문이 걸려 있는 데요. 형님?”“문이 걸려 있어? 그럼 담을 뛰어 넘어! 조심해서 소리나지 않게 말야.”유지광 일행은 높은 담장을 거침없이 훌훌 뛰어 넘어 안마당에 들어섰다.그 때 마침 화장실에서 나왔던 부엌아줌나가 유지광 일당이 마당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질겁을 하여“앗! 왠 사람들이에요? 도둑이야!”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유지광일당 중 한 사람이 나서며“쉿 조용히 해!”단도를 쓱 뽑아 겨누며 나직한 목소리로 위협을 했다. 그래도 부엌 아줌마는 “앗!”하고 놀라며 낮게 소리치며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귀가 밝은 김두한의원은 취중인데도 부엌 아줌마의 놀라는 소리를 듣고“초선이 밖에 누가 온 모양인데?”라고 말했다. 그리고 술김에도 어떤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지 획하고 몸을 날려 뒷문을 차고 뛰어나갔다. 그와 동시였다. 와장창 소리와 함께 문이 부서지며 5~6명의 사내들이 방안으로 들이닥쳤다. 그중 한 사내가 나서며,“방금까지 있었던 두한이가 어디로 갔어?”이렇게 물었다.“글쎄요. 인기척이 나니까. 급히 뒷문으로 나가셨어요.”초선이의 이 말에 유지광일당 중 누군가가“뒷문으로 토꼈다. 잡아라!”하자 그 사내들은 비호같이 뒷문으로 튀쳐나갔다. 그리고 막 담을 뛰어 넘는 김두한의원을 향해 총을 쏘아댔다.탕! 타앙! 탕! 탕! 탕!권총에서 뿜어내는 불꽃이 어둠을 찢었다. 때아닌 총소리에 고요하기만한 청진동 골목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너희들도 담을 뛰어 넘어라!”하고 유지광이 외치자, 괴한들은 날개를 단 듯이 높은 담을 훌훌 뛰어넘었다.

그러나 벌써 그곳에는 김두한의원이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그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멀리는 못갔을 것이다! 골목을 이잡 듯이 뒤져라!”유지광이 발을 동동 구르며 외쳤지만, 그건 무모한 짓이었다. 그 어둡고 복잡한 청진동 골목을 어떻게 다 뒤지며, 어디에 숨어 있는줄 알고 찾아낸단 말인가. 그 때였다.저만큼서 사이렌을 요란하게 울리며 차가 달려오고 있다. 그러자 “형님, 경찰 백차가 달려오고 있는데요.” 라고 말했다. 유지광은 경찰에서 주민들의 신고를 받고 백차가 출동했는가 싶다고 생각했다.경찰이 개입하게 되면 시끄럽다는 것을 유지광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유지광은 이정재가 주의시키던 말을 생각하고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틀렸다. 그만 가자.” 라고 말하자 유지광일당은 가볍게 몸을 날려 골목을 빠져나갔다.그걸 보고 있던 김두한의원은(흠, 녀석들! 이정재의 부하놈들이 틀림없군.)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며 어둠 속에서 싸늘하게 웃고 있었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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