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발이 장전되어 있다. 실수 없이 하여라”
“다섯 발이 장전되어 있다. 실수 없이 하여라”
  •  
  • 입력 2004-03-17 09:00
  • 승인 2004.03.17 09: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정재는 서약서를 삼룡에게 건내는데 …“자유당이 엄연히 존재하는 이 마당에 창당 동지회란 뭐 얼어죽을 놈의 창당 동지회야? 나 이정재가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는 이상 창당 동지회는 할 수 없어.”이렇게 말하고 난 이정재는 홱 돌아서며 회의장을 나가버렸다. 그러자 김두한 의원은 이정재의 등에 대고“야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겠다. 가서 이기붕이에게 똑똑히 전해. 이 김두한이는 한다면 꼭 하는 사람이라고!”김두한 의원은 회의장을 나서는 이정재의 등판에 대고 고함을 질렀다. 그 소리가 어떻게나 컸던지 장내를 정리하던 경찰들이 찔끔하며 돌아보았다.여기는 중국요리집 대관원.구석진 조용한 방에서 가죽점퍼의 이정재와 최신 유행 고급양복으로 차려입은 청년이 마주앉아 있었다.청년은 뭣인가 두려운 눈빛으로 힐끔힐끔 이정재를 건너다 보고 있었다.“삼룡아!”이정재가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삼룡이라고 불린 청년이 화들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너 제3세력에 대해서 알고 있지?”“예? 아, 예.”“그걸 어떻게 생각하니?”제3세력이라면 요새 한창 말썽이 되고 있는 ‘남북협상파’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소위 야당 탄압의 한 수단으로 불온문서를 야당 중진급 의원들에게 배달해 놓고 그걸 트집잡아서 ‘제3세력’이 형성되어 빨갱이와 손을 잡으려 한다고 떠드는 사건이었다.“빨갱이와 손을 잡을 수는 없지요.”삼룡이라고 불린 청년은 대답을 이렇게 하면서도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정재가 왜 새삼스럽게 세상이 다 아는 문제를 이 자리에서 꺼내는지 말이다.이정재는 삼룡이더러 긴히 볼 일이 있다면서 이런 으슥한 곳에까지 불러 놓고 고작 한다는 소리가 이것이었다.“맞았어! 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구나. 빨갱이와는 손을 잡을 수도 없고, 또 잡아서도 안돼. 그러니까 빨갱이와 손을 잡고 협상하겠다는 제3세력은 말살시켜야 돼!”이정재의 이야기는 점점 비약하기 시작했다.

“삼룡이 넌 어떻게 생각하니?”“예? 아, 예….”삼룡이라고 불린 청년은 또 한 번 화들짝 놀란다. 몹시 긴장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 청년, 이정재가 삼룡이라고 부르는 이 청년의 성씨는 김씨이고 이름은 삼룡이. 그는 악명 높은 이정재 사단의 종로책 중간보스로서 대외에 내세우고 있는 직함은 ‘정경신문사’ 섭외부장이었다. “이 자들을 그냥 두면 나라가 망하지 않겠느냐 말이야.”이정재의 음성이 갑자기 높아졌다.“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냥 두면 나라가 망합니다.”이정재의 말 뜻을 재빨리 간파한 김상룡이 이렇게 맞장구쳐 주었다.“역시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예, 제3세력은 때려 부숴야 합니다!”“나도 네 생각이 그럴 줄 알았어….”이정재는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뭔가 안주머니에서 깨내어 테이블 위에 펼쳐 놓는다.“이걸 잘 보라구. 이게 제3세력의 계보와 관련된 자들의 명단이야.”김상룡은 바짝 긴장하며 이정재가 펼쳐 놓은 명단을 주욱 훑어 보았다.

거기에는 야당의 거물급 인사의 명단이 거의 전부 기록되어 있었다.“너 어렵게 생각하지 말아라. 정치적인 살인은 살인이 아니야. 너도 과거에 빨갱이 많이 죽여봤지 않느냐? 더구나 안두희를 봐라. 김구 선생을 죽이구두 어디 징역살이를 하더냐?”삼룡이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럴 듯도 했다. 그러나 삼룡이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은 뒷골목 보스의 자리에서 물러나 정계에 진출했지만, 그래도 왕년에는 큰 형님으로 섬기며 고락을 같이 했던 처지가 아닌가.김삼룡이 대답은 해놓고도 망설이는 빛을 보이자, 이정재는 눈을 가늘게 뜬채 삼룡이를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한다는 말이,“좋아! 내가 징표를 하나 써서 너에게 주지.”이정재는 자기의 명함 한장을 꺼내더니 뒤에다 뭐라곤가 적더니 김삼룡에게 건네었다. 이윽고 삼룡이 그 명함을 받아서 읽어보았다.

“의형은 군에게 받은 선물을 깊이 보관하고 있고, 내 마음에 새겨 있노라. 내 생명이 살아 있는 한 군은 안심하고, 이 형이 군을 배반할 때에는 이것을 내놓고 어떤 보복 행위를 해도 달게 받겠다. 간단한 글로써 맹세하여 둔다.’라는 글이었다. 이것은 소위 뒷골목 깡패들간에 유행하는 ‘서약서’라는 것이었다.삼룡이는 그 명함(서약서)을 거절할 수가 없어 받았다. 그리고 말했다.“알겠습니다, 힘껏 해보지요.”“그래, 난 너만 믿는다.”그러면서 이정재는 품속에서 권총 한 자루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는다.“다섯 발이 장전되어 있다. 실수없이 하여라.”“예.”보스와 부하 사이에는 굳은 악수가 나누어졌다.“자, 술 들어. 오늘은 자리를 옮겨서 한 번 취하도록 마셔보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