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2호> 고려대의 데모와 자유당의 몰락
<제542호> 고려대의 데모와 자유당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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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4-09-21 09:00
  • 승인 2004.09.2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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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발을 2월의 춘풍에 휘날리는 노구의 교수들이“학생들이 흘린 피에 보답하자!”는 플래카드를 들고 떨리는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어린 제자들의 죽은 영혼을 위로하고 그들이 남기고 간 거룩한 뜻을 끝내 이루어야겠다는 이들 3백여명 교수들의 엄숙한 대열은 보는 이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이들은 또 정·부통령 재선거와 3부 요인들은 총퇴진하라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이 눈물겨운 스승들의 용감한 행동에 감격한 학생들은 다시 거리로 몰려 나왔다. 이제는 아예 “이승만은 물러가라!”라는 혁명적 구호가 하늘을 진동하였다. 출동한 계엄군들도 이들의 대열에 합세하며 무언의 성원을 보냈는가 하면 미소를 보내기까지 했다. 학생들은 계엄군의 탱크위에도 올라갔다. 군인들과 학생들이 혼합된 듯 누가 데모를 하고 누가 제지를 하는지 분간키 어려울 정도였다.마침내 서대문에 있는 이기붕 국회의장 집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이자 이기붕 국회의장의 장남인 이강석 소위에 의해 가족 전부가 사살당했는가 하면 집은 집대로 데모 학생들에 의해 불태워져 버렸다.

그뿐 아니라 최인규, 임화수, 이정재의 집도 부서졌다. 이밖에도 국민의 고혈로 치부한 원흉들의 집은 모두 대파되었다. 온 장안이 들끊었다. 이쯤되자 4월26일 오전 10시 마침내 이승만 박사는“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대통령 직에서 물러나 하와이로 망명하여 쓸쓸한 최후를 마쳤다. 그리고 이들 발포 원흉들은 5·16 군사혁명에 의한 혁명재판에 회부되어 이정재는 정치깡패 1호로 판결되어 사형에 처해지는 등 대부분이 사형이거나 무기징역에 처해졌다. 그런데 그 중 홍진기만은 군사 정부에 의하여 석방되었다. 또한 이기붕 국회의장의 아첨배였고 그 바이마르 헌법의 권위자인 장경근의원은 3·15 부정선거의 원흉으로 구금되었었는데 와병중임을 빙자하여 병 보석금 3백만환을 내놓고 가출옥하여 서울대학교 병원 제4병동 7호실에서 가료를 받았다. 그러던 중 1960년 11월 13일 밤 7시에 그의 애첩 강만순 여인과 함께 감쪽같이 병원을 빠져나와 행방을 감추고 말았다. 그러자 각 주요 신문들은 장경근의 도주에 대하여 대대적으로 보도하여 시민들의 물의를 자아냈다.

그리하여 서울 지방법원 제3부에서는 병보석금 3백만환을 몰수하고 장경근을 체포할 것을 검찰에 지시했다. 검찰에서는 통보를 받은 즉시 전국 방방곡곡에 수사망을 펴고 수배하는 한편 도피 우려가 있는 해안선에 봉쇄령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장경근은 좀처럼 발견할 수 없었다. 드디어 11월 19일 장경근이 일본으로 도주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정부는 곧 일본정부에 장경근의 일행에 대하여 정치적 망명을 거부해줄 것을 요청했고, 따라서 그들을 본국에 귀환시켜줄 것을 요청했다. 한편 내무부장관이었던 현석호씨는 장경근의 일본 도주에 책임을 지고 사임하게 되었다.아무튼 장경근의 도피 경위는 이러했다. 같은해 11월 13일 밤 7시였다. 장경근의 애첩 강만순 여인은 장경근이 입원해 있는 병원에 찾아와 장경근과 뭐라곤가 귓속말로 속삭인 뒤 간병인인 가정부에게는“누구든지 병실에 들어 오려고 하면 잔다고 말해요.”라고 부탁했다.

이어서“그래도 들어오겠다고 하면 남산동 집에 잠깐 다니러 가셨습니다.”라고 따돌려버리라고 했다. 그리고는 강만순 여인은 운전사와 함께 장경근을 부축하고서 자 3535호 승용차에 태워 떠났다. 강만순 여인은 남산동으로 차를 몰려는 운전사에게“동대문에 잠시 들를데가 있으니 그리로 가세요.”라고 했다. 이윽고 장경근을 태운 승용차가 경마장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강만순 여인은 장경근을 차에서 내리게 하고 자가용은 그대로 집으로 돌려보냈다. 경마장 앞에서 내린 장경근은 그 길로 아무도 모르게 청량리역으로 향하였고, 미리 준비한 3등 열차표를 제시하고 역안 폼에 들어섰다. 그들은 9시 30분 야간 열차에 몸을 싣게 되었다. 이튿날 아침 그들이 도착한 곳은 부산역이었다. 부산에 도착한 즉시 택시로 다대포로 직행하여 현찰 60만환을 지불하고 착화선 진어호(5톤짜리)에 실려 14일밤 다대포를 떠났다. 그리하여 16일 새벽 드디어 일본 좌가현 서당진항 부근에 상륙했다. 그러나 즉시 일본 해안 경찰에 의해 장경근 일행은 붙잡혔다.

그러나 장경근은 이름을 변경하여 진동명으로 행세하였고 소지하고 있는 여권도 변경되어 있어 무사히 수사망을 피할 수 있었다.아무튼 장경근은 그 때 병중의 몸이라서 후쿠오카에 있는 병원에 즉시 입원했다. 결국 장경근은 수사망에 걸려 12월 1일 비행기로 후쿠오카에서 토쿄로 압송되어 왔다. 비행기 안에서 기자의 질문에 장경근은“현재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유치중인 비서 이병균에게 크게 감사하고 그가 없었더라면 일본 도피는 불가능했으며 또한 일본으로 온 이유는 뭣보다도 신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한국의 정국이 안정되는대로 2,3년 후에 돌아갈 예정입니다.”라고 말했다. 장경근은 비행장에서 바로 도쿄시내에 있는 훼야몬드 호텔에 들어간 다음 몇 시간 후에 경응병원에 입원하였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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