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지존파사건 뒷 얘기
수사요원들은 1994년 9월 19일 새벽 4시 30분 전남 영광에서
범인들이 은둔하고 있는 아지트를 중심으로 주변 야산에 잠복해 있었다.
몇 시간이 지나서였다. 아지트 안에서 사람의 움직임이 감지되었고,
곧이어 누군가 밖으로 나와 화물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수사요원들은 그 차를 1.5킬로미터 가량 추적했다.
이를 눈치 챈 범인은 도주하기 시작했다.
수사요원은 범인을 추격해 마침내 K군을 검거했다.
K군의 말에 의하면 아지트엔 남자 4명, 여자 1명이 있으며,
다이너마이트와 공기총, 그리고 칼도 여러 자루가 있다고 진술했다.
수사요원은 침착하게 상황을 분석해 치밀한 작전을 세웠다.
우선 영광지서에서 K군을 시켜 범인들의 아지트로 전화를 걸도록 했다.
지금 자신이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으로 후송되려고 하니 급히 영광지서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수사요원들 앞에 그들은 태연히 차를 몰고 나타났다.
3명이 차례로 차에서 내렸으나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이들은
재빨리 다시 차를 타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사요원들은 20여 킬로미터를 추격한 끝에 범인들을 모두 검거할 수 있었다.
범인의 진술에 따라 아지트에 남은 잔당을 검거하기 위해
수사요원들은 경찰 타격대의 지원을 받아 야산 주위에
배치시키고 아지트 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칼을 들고 대응하는 범인들과 격투 끝에 범인 일당 6명을 모두 검거하는데 성공했다.
이 사건은 1994년 9월 살인공장까지 만들고 사람을 납치, 살해, 소각까지 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소위 ‘지존파’ 일당의 검거 경위였다.
범인들에게 잡혀 있다가 가까스로 탈출한 L여인의 제보에 따라
수사요원들이 현장을 급습, 범인 검거에 개가를 올렸던 것이다.
지존파 일당은 1994년 9월 13일 오후 5시.
경기도 성남 공원묘지에서 벌초를 하던 모회사 대표 S씨와
그 부인에게 가스총을 쏴 쓰러뜨린 뒤 전남 영광까지 납치해 몸값으로 1억 원을 요구했다.
S씨 회사 관계자로부터 8천만 원까지 받았으나 범인들은
자신들의 얼굴을 아는 S씨 부부를 살해하기로 결정,
두 사람을 강제로 끌고 가 칼로 찔러 살해한 뒤 시체를 살인
공장 소각장에 넣어 태워버렸던 것이다.
수사요원들은 범인들의 승용차 트렁크에 은닉한 유골과
철사줄, 나일론 끈, 피해자의 유류품 등 범행 증거물들을 무더기로 발견하고 수거했다.
유골은 검은색 비닐봉지에 잘게 부서진 뼛조각과 뼛가루로 포장되어 있었다.
아지트 내에서 발견된 두개골 2점과 모발,
그리고 여기저기 시멘트바닥에 흩어져 있는 혈흔을 채취해
이 유골이 누구의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연구소에 감정을 의뢰했다.
외뢰한 두개골, 유골, 뼛조각, 재 등은 훼손 정도가 심해 혈액형과 DNA 검사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두개골을 대상으로 생존시 사진과
두개골의 사진 필름을 중합해 동일인 여부를 추정하는
감정기법인 슈퍼임포즈기법을 적용하기로 했다.
또한 살인공장의 지하실문, 철창문, 아지트 바닥과 벽에 묻은 혈흔 10여 점과 군용 대검, 도끼, 낫 등에서도
검출된 혈흔을 DNA 분석해 누구의 피인지를 증명하기로 했다.
두개골이 과연 S씨 부부인지를 입증하기 위해 현장의 혈흔에서 혈액형 및 DNA 검사를 실시하고,
S씨 부부의 형제와 자식의 혈액에서 DNA형을 분석해 가족 여부를 확인했다.
감정 결과는 소각되어 희생된 유골은 바로 S씨 부부가 틀림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한편 불에 타 심하게 훼손된 두개골을 복원하여 실시한 슈퍼임포즈기법에서도 S씨 부부로 추정되는 감정 결과를 얻었다.
이상의 감정 결과로 보아 더 이상의 또 다른 희생자는 없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 단어조차 무시무시한 살인공장, 도대체 왜 아무 이유 없이 고귀한 생명이 살해되고 처참한 피해를 당해야 하는 걸까.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들이 무차별적으로 범행 대상이 되어 어이없이 살해돼
불에 태워지는 끔찍한 살인사건은 이 땅에 다시는 없어야 하겠다.
제2화 담뱃불에 비친 얼굴
2001년 여름, 강간 사건의 증거물 감정을 의뢰받았다.
나이 어린 15세 소녀가 비닐하우스에서 성폭행을 당했다는 것이다.
증거물은 현장에 버려져 있던 담배꽁초 두 점. 피해자의 질 분비물과 혈액,
그리고 용의자 K의 혈액 등이었다.
우리는 타액에서 분비되는 전분 소화효소인 아밀라아제 시험법을 적용해
담배꽁초에서 타액을 확인했으며,
사람의 정액에 다량 함유되어 있는 산성인산효소 검출법을 적용해 정액을 증명했다.
그러나 이 같은 감정 결과만으로는 용의자 K의 범행을 입증할 수 없어 DNA 분석을 실시했다.
그 결과, 담배꽁초에 묻은 타액 상피세포의 DNA형과 K의 DNA형 여섯 종류가 모두 일치했으며,
피해자의 질 상피세포와 혈액의 DNA 모두 피해자의 DNA형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특이한 점이 발견되었다.
두 개의 담배꽁초 중 하나에서 피해자와 용의자가
담배 한 개비를 함께 피웠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나는 수사요원에게 피해자가 담배를 피울 줄 아는 소녀인지 조사해 보았느냐고 물었다.
수사요원은 당연하지 않느냐는 태도로 사건의 개요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건 당일 밤 10시. 회사원인 K는 피해자 P양이 홀로 길을 가는 모습을 보고는
갑자기 욕정이 일어나 P양에게 접근했다.
그러고 나서 입을 틀어막은 후 말을 듣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하면서 인근 비닐하우스로 끌고 들어갔다.
소녀는 공포심으로 몹시 떨었지만 그 와중에도 담배 한 대를 피우겠다고 범인에게 청했다.
K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고 라이터 불을 소녀에게 건네주었다.
소녀는 원래 담배를 피울 줄 몰랐다.
이때 유일한 현장 증거물인 담배꽁초가 생겼으며,
어두운 비닐하우스 안에서 범인의 얼굴이 휜히 드러난 것이다.
피해자가 범인의 얼굴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사는 한결 수월했다.
DNA 감식 결과를 확인한 수사요원은 피해자가 그토록 위급하고
두려운 상황에서도 냉정을 잃지 않고 기발한 재치를 발휘했던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최상규 작가는
국내 법생물학 분야의 1인자로 손꼽히는 최상규 박사는 1963년 서울대 생물학과에 입학, 한양대에서 박사학위를 마쳤다.
1969년 가톨릭의대 미생물학과에서 시작해 경찰대, 경찰종합학교, 육해군 헌병수사관,
국방부 범죄수사단 등에서 20여년간 강의를 해왔다.
1979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특채되어 1990년 미국FBI방문연구원으로서 DNA 감식기법을
공부하여 당시 국내에 유일무이한 DNA감식전문가로 명성을 얻었다.
DNA감식기법이란 사람마다 다른 DNA구조의 차이를 이용해 대상자의 신원을 밝혀내는 것이다.
이 연재는 필자가 30여년간 수많은 사건의 DNA 감식을 통해(화성 부녀자 연쇄살인사건,
삼풍백화점 참사, 씨랜드 화재사건, 백범 김구 선생의 혈흔 분석 등)
범죄 없는 세상을 위한 과학수사의 필요성을 흥미진진하게 펼쳐나갈 것이다.
글 : 최상규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