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11월 16일, 서울 근교 화성군 태안면 병점리 외곽 마을 야산에서 아홉 번째 화성 부녀자 연쇄살인사건이 발생했다.
밤새 피해자를 찾아 헤매던 마을 사람들은 새벽녘에야 마을 입구 야산에서 강간 살해된 피해자 K양(13세)을 발견했다.
경찰은 아홉 번째 강간살인사건에 치를 떨며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부검을 의뢰하는 한편 현장 감식을 시작했다.
부검 결과는 경부압박 질식사의 소견과 하체에서의 다량 출혈이었다.
현장에서 채취 의뢰된 피해자의 혈액, 피 묻은 팬티, 거들,
그리고 현장 모발 등을 감식한 결과 피해자와 동일한 A형으로 판정되었다.
그러나 연쇄강간살인으로 추정되는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유독 피해자의 질 내에서는 정액이 검출되지 않았다.
범행에 확실한 단서가 될 정액증거물이 검출되지 않은 것은 특이한 현상이었다.
20여 점의 현장 모발 중 약 3cm 길이의 흰색 머리카락 1점은 초동수사에서 유일한 단서였다.
그래서 흰색머리카락이 있는 주변 사람들이 수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그러나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결국 수사본부에서는 과학수사로 완전 전환, 이번 사건을 국과수에서 전담토록 중책을 맡겼다.
사건 발생 5일째, 연구원들은 사건현장으로 향했다. 강간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정액 증거물을 찾기 위해서였다.
피해자 질 내에서 정액이 검출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범인의 정액이
현장 또는 주변 어디에선가 발견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연구원들은 사람 정액에 다량 들어 있는 산성인산에스테르의 가수분해 효소인 산성인산효소를 검출할 수 있는
정액 검출시약을 약 3,000CC정도 준비했다. 현장에 도착한 연구원들은
분무기에 시약을 채우고 분무하여 검사를 수행하기로 했다.
정액이 존재할 경우 정액의 산성인산효소는 시약과 반응해 청자색으로 발색한다.
연구원들은 현장 중심으로 범위를 넓혀가며
주변 잔디밭 전체에 시약을 분무했다. 그러나 두 시간이 지났는데도 정액은 발견되지 않았다.
연구원과 수사요원들은 제법 한기가 느껴지는 초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진땀을 흘렸다.
연구원들은 물론 수사요원들의 얼굴은 실망의 표정이 역력했고, 허탈한 심정으로 수사본부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혹시 정액의 배출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피해자의 상태로 보아 범인은 변태성욕자로 추정되며 정액의 배출은 기정사실일 것이다.
나는 피해자의 유류품들을 모두 꺼내놓아 달라고 수사요원들에게 부탁했다. 모든 증거물들은 이미 감정의뢰를 해놓았는데
수사본부 증거물 함에는 다른 유류품들이 더 있었다.
피해자의 목, 손과 발을 묶었던 피해자의 스타킹 조각과 블라우스 조각들이었다.
모두 단단히 매어놓은 매듭이 그대로 보존된 상태였다.
할 수없이 미리 매듭의 수법을 사진으로 촬영해 놓은 다음, 매듭을 풀어 정액을 찾기 위해 시약을 분무했다.
마침내 목을 묶었던 흰색 블라우스 조각에서 희미한 청자색의 발색이 나타났다. 그러나 극히 미량이었다.
범인의 손에 묻은 정액이 살짝 스친 상태로 추정되었다. 그래도 그 정액의 발견은 큰 소득이었다.
혈액형 분석결과 B형으로 증명되어 범인의 혈액형은 B형으로 추정되었다.
그 후 탐문수사는 계속되었고 마침내 범행현장 근처에서 유부녀를 겁탈하려다
미수에 그친 이웃 동네에 사는 Y라는 청년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고 그로부터 범행 일체를 자백 받았다.
그는 태연히 자신이 범행을 저질렀고, 범행 후 범행현장 아래쪽 솔밭 숲으로 도주했다고 진술했다.
수사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고 의뢰된 Y의 혈액형 검사 결과 정액의 혈액형과 일치하는 B형으로 판정되었다.
이 시점은 사건 발생 40일 후였지만 유력한 용의자인 Y의 검거는 천만다행이었다.
그러나 Y는 현장 검증 시 돌연 범행을 부인해 현장검증은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이제 그가 범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결정적인 물증을 확보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나 역시도 이 사건을 해결하려는 열의로 가득했다.
Y의 진술에 따라 피 묻은 손을 닦은 현장 소나무 가지를 증명했고,
또 그가 범행 당시 입었던 세탁한 점퍼 소매에서 혈흔이 검출되었다.
하지만 워낙 미량이라 혈액형은 확인되었지만 DNA분석은 불가능했다.
이제 오로지 정액을 찾는 일만 남았다.
나는 수사요원에게 그동안 의뢰했던 모든 증거물들…
피해자의 겨울 교복 상하의, 내의, 가방 등 잡다한 증거물들 일체를 접수했다.
나는 결정적인 단서가 될 수 있는 정액을 찾지 못한데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고,
이들 증거물 모두에서 정액 검출실험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실험은 의외로 큰 소득이 있었다. 모든 증거물에서 정액 반응을 검사했다.
마침내 교복 상의 왼쪽 칼라 아래 부위에서 정액이 다량으로 검출된 것이다.
바로 범인이 정액을 사정한 부위로 추정되었다. 이제 물증이 확보된 것이다.
이제부터 정액이 바로 Y의 것임을 증명하는 일만 남았다.
비록 40일이나 지났지만 건조된 정액이었기 때문에 부패, 또는 오염되지 않았고
게다가 다량의 정액이었다. 서둘러 혈액형을 조사했다.
Y와 같은 B형의 정액으로 판명되었으나 Y의 정액이라고는 단정할 수가 없었다.
DNA분석을 위해 일본으로 날아갔다. 일본과학경찰연구소DNA 분석팀장인 무코야마박사와
그곳 소장에게 일본에 온 목적을 얘기했다.
우리의 급한 사정을 듣고 그들은 감정의뢰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물론 국제적인 공신력을 인장받기 위한 양국 경찰청의 인터폴을 경유한 정식 감정의뢰였다.
DNA분석 결과 통보는 1개월 후로 결정됐다.
그들은 다음 해 1992년 1월 30일경 정식 감정서를 통보하겠다고 했고,
2주 후인 1월 15일경 중간 결과를 인터폴을 통해 알려주겠다고 했다.
귀국 후 나를 비롯한 이번 화성 사건 수사 관계자들 모두는
중간 결과가 통보되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하지만 1월 15일 오전까지도 아무 연락이 없었다.
빗발치는 전화문의로 나는 더 이상 사무실에서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즉시 일본행 비행기를 탔고 두 시간도 채 못 되어 일본 과학경찰연구소DNA분석실에 도착했다.
순간 나는 Y의 DNA형과 일치해 사건은 해결된 것이나 다름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나는 성급한 마음에 실험 결과를 다시 물었다.
증거물 정액과 Y의 DNA형이 일치하느냐, 일치하지 않느냐고.
그는 태연하게 “일치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농담하지 말라고 큰 소리를 쳤다.
그래도 그는 “일치하지 않아요”하며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눈앞이 캄캄해진 나는 이번 DNA분석 결과에 대한 자료를 다시 한 번 사진과 함께 꼼꼼히 확인할 수 있었다.
분명히 DNA형은 서로 일치하지 않았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오랜 피로와 실망감 때문에 나는 연구소를 빠져 나와 숙소로 겨우 돌아왔다.
국과수 소장에게 전화로 간단하게 말했다.
“Y는 범인이 아닙니다.”
“…할 수 없지.”
짤막한 말 한마디가 전부였다.
귀국 후 즉시 수사본부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최 박사 고생하셨소. 하지만 Y가 범인이 맞는데 왜 DNA가 일치하지 않는 거죠?”
“범인이 아니니까 다르겠죠.” “그럼 우리 경찰은 어떡하란 말입니까?”
“진짜 범인을 잡아야죠.” “증거물을 바꿔 가지고 간 것은 아닙니까?”
“절대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럼 증거물인 DNA가 돌연변이를 일으킨 것은 아닙니까?”
“절대 아닙니다.” 수사본부장과 나는 짧지만 무거운 단답의 대화로 끝냈다.
Y는 즉시 검찰에서 풀려났고 수사는 다시 다른 방향에서 시작되었다.
그 후 1년 동안 관련 용의자들의 DNA를 비교하기 위해
나는 일본 과학경찰연구소를 다섯 차례나 더 다녀왔지만 아무 성과가 없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화성 9차, 10차 범인의 DNA형은 영구히 확보됐고,
국과수의 DNA분석 연구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얼마 전 화성 부녀자 연쇄살인사건을 주제로 한 <살인의 추억>이라는
우리 영화가 성황리에 상영됐고 세인에게 좋은 영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나는 아직도 그 영화를 보지 못했다. 영화를 본 주변 사람들은 마지막 장면에 안경을 끼고
흰 가운을 입은 사람이 등장해 DNA분석을 FBI로 의뢰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 사람이 혹시 내가 아니냐고 물어온다.
나는 아니라고 대답하지만 그들은 믿지 않는다. 아무튼 미궁으로 빠진 사건이지만 지금도 용의자 수사는 계속되고 있다.
글 : 최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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