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과학수사파일 제 6 회
대한민국 과학수사파일 제 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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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6-09-29 11:44
  • 승인 2006.09.29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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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튈까봐 운동화만 신고 부모 살해”

끈질긴 수사 통해 사건 해결 실마리 풀다. 공범이 숨어 있다?

1994년, 강남의 어느 이층집에서 화재가 발생해 지하층과 지상층 내부가 모두 불타버린 사건이 있었다.
당시 지하 안방에서 불에 탄 시체 두 구가 발견되었는데, 집주인인 M씨(46세)부부였다. 화재 신고를 한 사람은 아들 M군(23세)으로, 건넌방에서 사촌동생(13세)과 함께 잠을 자던 중 갑자기 ‘펑’하는 소리에 깨어 방을 나와 보니 안방 천장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사태가 위급해 미처 부모를 구하지 못하고 집을 빠져나와 신고했다는 것이다.
단순한 화재 사건으로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끔찍한 진실이 도사리고 있었다. M씨 부부의 시체는 불에 탔을 뿐만 아니라 온몸에 흉기로 난자당한 흔적이 있었던 것이다. 살해 후 증거를 없애기 위해 방화했을 가능성이 컸다.
당시 한약방을 경영하며 상당한 재력가로 알려졌던 M씨. 그러나 현금과 귀금속 등 값나가는 물건은 안방에 그대로 남아 있었고, 범인의 외부 침입 경로도 발견되지 않아 초동수사부터 진통을 겪었다.
수사요원들은 M씨 부부의 죽음을 원한관계에 의한 살인으로 보고 사업상의 지인 등 주변 인물들을 상대로 수사를 벌이기 시작했다. 사건 직후부터 옷차림이나 행동에 수상한 점을 보이던 아들 M군도 용의선상에 올려놓고 관찰을 계속했으나 소환은 하지 않았다. ‘제 부모를 그토록 잔인하게 살해할 수 있는 자식이 있을까’ 하는 한 가닥 희망과도 같은 의구심 때문이었다.
현장 감식을 끝낸 수사요원들이 국과수에 감정을 의뢰했던 증거물은 피로 범벅된 이불과 요, 피 묻은 장갑, M군이 입고 있던 운동복 하의, 소유자 불명의 면 셔츠와 속옷 등이었다. 먼저 증거물로부터 혈흔을 검출해 그것이 사람의 피인가를 알아내고 혈액형 등을 검사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물론 최총 DNA분석까지 실시하기로 했다. 그런데 혈흔검출 시험과정에서 대단히 중요한 단서 하나를 포착해 냈다. 혈흔은 뒷주머니 속 일부에서 발견되었으며, 더욱 특이한 것은 운동복의 겉이 아니라 안쪽 엉덩이 부분에서도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수사본부로 즉시 이 사실을 통보하면서 나는 M군의 몸에 운동복 하의 안쪽에 피가 묻어날 만한 상처가 있는지 조사할 것을 제의했다.
통화를 끝내고 얼마 후 수사요원들이 연구소에 도착했다. 운동복 하의에서 발견된 혈흔으로 수사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단서로 상황은 더욱 급박하게 돌아가고, 수사요원들은 사건이 잘 풀리리라는 기대를 가졌다. 그들은 운동복 하의를 서둘러 반송해 가면서 M군 옷에서는 혈흔이 발견되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으로 조사되었다고 말해 주었다.
그날 저녁, 수사요원들은 M군의 범행을 추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M군은 쉽사리 범행 사실을 자백하지 않았고, 요원들은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혈흔이라는 과학적 증거를 제시하며 그에 대한 해명을 끈질기게 요구했다.
“M군, 그날 자네의 사촌동생은 잠들어 있지 않았네. 깨어서 자네가 범행을 저지르는 모습을 모두 엿보았다고 진술했어! 게다가 운동복에 묻어 있는 혈흔은 부모님의 혈액과 같은 것으로 증명되었네. 혈액형도 DNA형도 말이야. 이젠 범행을 자백하고 부모님의 명복을 빌어드리는 일이 아들로서 마지막 도리라고 생각하지 않나?”
그 말에 M군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수사요원의 합리적인 추궁과 설득이 승리하는 순간이었다. M군은 모든 범행 사실을 순순히 털어놓기 시작했다.
“어떻게 내 옷에 피가 묻었는지… 농구화만 신은 채 옷은 하나도 입지 않고 했는데…옷에 피가 묻을까 봐…”
미국으로 일찌감치 조기유학을 떠났던 M군은 그곳에서 많은 돈을 탕진하고 돌아왔다. 씀씀이가 헤픈 아들에게 M씨 부부는 더 이상 용돈을 주지 않았고, M군은 그런 부모가 미워 급기야 칼로 찔러 살해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범행 시 온몸에 튄 피를 닦기 위해 M군은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했으며, 몸을 씻은 후에 미처 팬티도 입지 못한 채 운동복 하의를 걸쳤다. 결국 M군의 엉덩이 부분에 튄 피가 운동복 하의에 묻어났던 것이다. 수사요원들은 M군의 자백에 따라 집 부근 공터에서 범행에 사용했던 칼을 찾아내는데 성공, 추가로 감정을 의뢰했다.
국과수 연구원들은 칼에서 혈흔을 검출해 사람의 피라는 것을 증명한 다음, 혈액형 검사는 물론 DNA 분석을 실시했다. 역시 운동복 하의에서와 같은 혈액형과 DNA형이 나왔으며 그것은 피살자의 것과 같은 것이었다. 오차 가능성은 1천만분의 1이었다.
수사요원들은 증거물과 함께 M군을 검찰에 송치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때 M군은 뜻밖의 사실을 진술했다. 나는 M군의 ‘폭탄선언’을 신문에서 보았다. “친구 L과 함께 범행을 저질렀다”는 M군의 진술이 담긴 기사가 눈에 확 들어왔던 것이다. 공범이 있다니, 당혹스러웠다. 그때였다. 신문에서 눈을 떼기가 무섭게 전화벨이 울렸다. 사건담당 수사과장의 목소리였다.
“박사님, 신문 보셨죠!”
“예, 보았습니다. 공범이 있다니요?”
“공범 여부를 빨리 밝혀야 하겠습니다. 지금 연구소로 가는 중입니다. 박사님께서 수고해 주셔야 될 것 같습니다.”
나는 연구원들에게 여락을 취한 다음 황급히 연구소로 향했다. 연구소에는 이미 수사과장이 도착해 있었는데 몹시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오후 3시면 L군을 풀어줄 시각인데 그 전에 공범인지 여부를 밝혀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연구소에 가져온 증거물은 L군의 의류 20여 벌과 L군 소유의 승용차 한 대였다. 증거물 어디에서든 혈흔이 발견된다면 공범일 가능성은 보다 명확해진다. 나는 연구원과 함께 암실로 들어갔다. 이미 깨끗하게 세탁되어 육안으로 혈흔을 발견할 수 없는 L군의 의류, 우리는 이때 루미놀 시약을 분무하여 형광 빛이 발광하는지 눈이 빠지도록 관찰하였다. 그러나 20여 벌 모두 샅샅이 검사했지만 피의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이제 승용차를 검사할 차례였다. 우리는 L군의 승용차를 암막장치가 있는 곳으로 이동시켰고, 그곳에서 차량 내부는 물론 외부까지 루미놀을 분무해 혈흔을 찾아내려 애썼다. 그러나 이번에도 피의 흔적은 없었다. 그동안 세 시간이 흘러 어느덧 오후 1시가 되었다. 모든 검사는 끝이 났다. 혈흔이 발견되지 않은 것도 염연한 감정 결과이기 때문이다. 모든 임무도 종료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검사해야 할 또 한 대의 용의차량이 있었다. 수사과장은 휴대전화로 용의차량을 수배해 대기시켜 놓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결국 나와 다른 연구원 한 명은 수사과장의 승용차에 탑승해 강남수사본부로 향했다. 날아가는 화살이 그토록 빠를까. 88도로를 질주하는 수사과장의 승용차는 바람처럼 빨랐지만, 그는 연신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조급해하고 애를 태웠다. 게다가 막히기 시작한 도로 사정 때문에 일행의 속은 점점 타들어가는 듯했다. 시계바늘은 이미 오후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수사과장은 L군을 귀가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는데, 반드시 목욕을 시켜서 보내라는 말을 덧붙였다. 단 몇 분이라도 시간을 벌려는 의도가 안쓰럽기까지 했다.
우리는 3시 정각을 조금 지나서 강남 수사본부에 도착했고, 대기 중인 L군의 또 다른 차량에 대해 서둘러 루미놀 검사를 시작했다. 그 차량은 마지막 증거물이었다. 단독범행이 아니라 공범이 있다는 M군의 갑작스런 진술에 우리는 얼마나 당황했던가. 반드시 진실을 밝혀내야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긴장하면서도 온 정신을 집중해 혈흔을 찾았다. 전신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결국 M군의 단독 범행이었던 것이다. 수사요원들은 그 결론을 확신했다. M군 역시 진술을 번복하며 단독 범행임을 자백했다.
공범이 있다는 M군의 한 마디로 인해 마무리 단계에 있던 수사는 큰 혼란에 빠졌고 시간에 쫓기며 한바탕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새로 수사를 시작한다는 각오로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다각도의 과학수사를 펼쳤던 수사요원들 덕분에 깨끗이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용의자의 진술에 따라 또 다른 결과는 있을 수 있다. 피의자가 달라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떠한 진술이라 할지라도 무시할 수 없는, 제 3의 인물을 간과하는 수사가 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확인하는 자세야말로 과학수사의 기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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