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과학수사파일 제 7 회
대한민국 과학수사파일 제 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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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6-10-13 18:12
  • 승인 2006.10.13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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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용차안의 머리카락을 단서로…

사촌언니의 유괴살인

1994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유괴사건이 있었다. 검거된 피의자는 K양의 이종사촌 언니인 L양으로, 시체는 바로 L양의 집 안방에 유기되어 있었다.
10월 10일 12시 30분경 부산시 북구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범인은 귀가하던 K양(8세)을 유인, 대기 중인 승용차에 태운 다음, 노끈으로 손발을 묶고 테이프로 입을 막은 후 중구 국제시장 뒷골목으로 데리고 가 차 안에서 목을 졸라 숨지게 했다.
당시 국과수에 감정의뢰되었던 증거물은 차 안에서 발견된 모발뿐이었다. 범행에 사용되었던 승용차의 조수석과 운전석, 그리고 뒷좌석에서 채취한 머리카락은 64점이었는데, 물론 숨진 K양의 머리카락과 L양의 것, 그리고 L양의 공범이라고 지목한 차 주인인 K군의 모발도 함께 의뢰되었다.
모발 감정 결과, 차 안에서 나온 머리카락 64점은 O형과 B형의 혈액형으로 판정되었다. 함께 의뢰된 모발을 검사한 결과 혈액형이 O형인 사람은 피해자 K양과 피의자 L양(19세), 또 다른 피의자 O군(27세)이었으며 B형은 차 주인인 K군과 피의자 N양(19세)이었다. 다만 W군(24세)의 머리카락만은 A형으로 감정되었다.
그러나 혈액형만으로 차 안에서 발견된 머리카락이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차 안에서 발견된 머리카락 중에 숨진 K양이나 이종사촌 언니인 L양의 것이 포함되었다면, L양이 공범으로 지목한 피의자들의 범행 여부가 증명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모발의 혈액형 감정 결과를 해당 경찰서로 통보했고, DNA분석도 계속하기로 했다.
11월 19일, 4명의 피의자들은 검찰에 기소되었으며 11월 21일에는 1차 공판이 열렸다. 11월 23일에는 신문과정에서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W군과 O군의 신체 검증이 있었다.
한편, 검찰은 용의차량에서 발견된 64점의 모발 일부를 반환해 달라고 요구해왔고, 그중 32점을 검찰 DNA분석실과 공동연구를 하는 S의대 법의학교실에 보내 DNA감정을 의뢰했다. 그 결과 머리카락 13점은 숨진 K양의 것으로, 2점은 이종사촌 언니인 L양의 것으로 확인됐다고 한다. 또한 변론 재개를 신청함에 따라 선고 공판을 연기하고 사건을 다시 심리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5년 2월, 13차 공판에서는 머리카락의 DNA감정 결과에 대한 법정 공방이 벌어졌다. 검찰 측 증인으로 나온 S의대 Y교수는 지난번 재판부에 제출했던 DNA감식 1차 결과에 오류가 있었다고 진술했다. L양의 것으로 분석됐던 머리카락 2점과 피해자 K양의 것과 같은 것으로 분석됐던 13점 중 7점이 다른 머리카락으로 판명되었다는 것이다.
세포질 내 미토콘드리아에 있는 1만6,569개의 DNA 염기 중 변이가 심한 1,100여 개의 염기를 분석하면 정확도가 매우 높아지는데, 시간이 촉박해 270개밖에 분석하지 못했다는 해명이었다.
변호인 측 증인으로 나온 K대의 G교수 역시 Y교수가 270개의 DNA 염기서열만 분석한 채 동일인으로 감정한 것은 무리라고 말했다. G교수는 100명의 염기서열을 450개씩 조사한 적이 있는데, 그때 서로 다른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동일한 염기서열로 분석된 경우가 26명이나 있었다는 연구 결과를 근거로 제시하기도 했다.
결국 부산지법 제3형사부는 선고 공판에서 피고인 W군과 O군, N양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공범이 있다고 진술해 온 L양에게는 사형을 선고했다. 무죄 선고를 받은 3명은 그날 밤에 석방되었으며 검찰은 항소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국과수에서 DNA분석 업무를 책임졌던 나는 이 사건이 기사화될 때마다 “왜 국과수에서 끝까지 머리카락 DNA감식을 하지 않았느냐”는 항의 전화를 받곤 해서 곤혹스러웠다. 당시는 검찰과 국과수 간에 DNA 감식 기술 수준에 대한 홍보전에 심혈을 기울이던 때였고, 더구나 정식 사건담당 지휘검사의 증거물 반환 요구 공문서에 따라 국과수로서는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다.
모발 뿌리세포에서 채취한 세포핵의 DNA분석은 가장 정확하고 신뢰할 수 있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는 세포핵이 손상되고 소실되어 세포핵이 아닌 세포질 내 미토콘드리아 DNA의 염기서열을 분석하는 방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미토콘드리아 DNA염기서열을 분석하는 장비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으며, 기술 훈련 역시 미흡했다. 게다가 미토콘드리아 DNA의 과변이 부위에 대한 한국인 집단의 DNA빈도가 확립되지 않은 상태였다. 따라서 머리카락으로 개인을 정확하게 식별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나 지금은 ‘자동 DNA 염기서열 분석기’를 도입했으며, 고도의 숙련된 기술 축적으로 많은 사건을 해결하고 있다. 또한 미토콘드리아 DNA의 한국인 집단 DNA빈도도 확립되어 신뢰성과 정확성 높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과학수사 부문에 종사하던 나로서는 K양 유괴사건의 해결 추이를 바라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결국 이 사건은 공범 여부를 증명할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하지 못해 L양의 단독범행으로 결론짓고 막을 내리고 말았다.

내가 범인인 줄 어떻게 알았어요?
1998년 8월 어느 무더운 한밤, 혼자 살고 있는 L할머니의 집에 누군가가 몰래 숨어 들어왔다.
그 마을은 30여 세대가 모여 사는 평화로운 농촌으로, 자식들을 도시로 떠나보낸 노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마을에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노인의 집에 잠입한 범인은 부엌에서 칼을 집어 들고 방으로 들어가 피해자의 목에 들이대고 위협하여 성폭행한 다음 유유히 도주해버렸다.
끔찍한 일을 당한 노인은 옆집 친구 할머니에게 이 이야기를 했고, 마을엔 금세 소문이 퍼졌으며 결국 노인의 가족이 경찰에 신고했다.
수사요원들은 90세 할머니를 성폭행한 범인의 죄질이 나쁠 뿐만 아니라 알코올중독이나 성폭력 전과자, 혹은 변태성욕자일 것으로 추정하고 빠른 검거에 전력을 기울였다. 사건 정황으로 보아 마을 지리에 익숙한 사람일 가능성이 컸으므로 탐문 수사에 중점을 두어 10여 명의 용의자를 검거하기도 했다. 그중 유력한 용의자는 3명으로 압축되었고, 국과수는 그들의 DNA분석을 실시했다.
사건현장에서 발견한 휴지뭉치, 이불과 요에 흩어져있던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이미 확보했기에 그 증거물들과 용의자와의 관계를 밝혀내기만 하면 되었다. 휴지뭉치에서는 정액이 검출되었고 모발은 B형과 O형의 혈액형을 가진 사람의 것으로 판명되었는데, 피해자 L할머니는 B형이었다. 우리는 계속 DNA분석을 해나갔다. 그러나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정액과 머리카락에서 발견된 DNA중 용의자 3명의 DNA와 일치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수사요원들은 원점에서부터 수사를 다시 시작하는 심정으로 수사방향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수사 범위에서 제외시켰던 인근 중고등학교학생 중 비행청소년을 대상으로 수사를 벌여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사건 발생 약 40일 후인 11월 중순에 그들 중 10여 명을 임의 동행, 동의를 받고 그들의 모발을 채취했다.
감정 결과는 매우 놀라웠다. 이미 확보된 DNA형 9종, 그것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용의자 한 명이 확연히 눈에 들어온 것이다.
감정 결과를 통보받은 수사요원들은 범인과 같은 DNA형을 가진 C군(16세)을 검거하기 위해 H고등학교로 찾아갔다. C군은 태연하게 수업을 받고 있었다. 수사요원들은 쉽게 C군을 잡을 수 있었는데, 그의 말 한마디가 기막혔다. “내가 범인인 줄 어떻게 알았어요?” 몹시 신기하고 이상하다는 듯한 말투였다.
C군은 평소 도벽이 심했으며 사건 당일에도 절도를 하기 위해 L할머니의 집에 침입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성폭행은 우발적인 것이었다고 진술했는데, 수사요원들은 죄의식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C군의 태도에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제 막 어린아이의 티를 벗은 소년이 범인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은 사건이었다. 범죄가 얼마나 엄청난 상처를 가져다주는지 C군은 전혀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성인으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몰랐던 무지의 결과로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수많은 비행청소년들을 볼 때마다 더욱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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