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관의 사명감
억울한 옥살이를 한 지 만 1년,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수감 중이던 K씨가 1년이 지난 1993년 12월 16일 무혐의로 석방되면서 사회적으로 떠들썩했던 사건이 있었다.
1992년 11월 29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 C여관에서 발생한 L양 살인사건. 이 사건의 범인으로 구속된 L양의 애인인 K씨는 1심과 2심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은 한마디로 사건현장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증거 위주의 과학수사를 소홀히 한 점을 여실히 드러냈다.
또한 부검에 의해 추정된 시체 사망시간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오판이 불가피했다는 것이 법조계의 지적이었다.
실험실에서 감정한 여관방 내의 정액 묻은 휴지 뭉치들, 그리고 침대커버, 방바닥, 시체, 욕실, 욕조에서 채취된 모발 등의 감정결과들을 정밀 분석해야 했다.
그리고 과연 K의 범행을 입증할 만한 증거가 발견되는가 하는 의구심을 갖고, 좀 더 치밀한 검토를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앞선다.
당시만 해도 모든 사건들은 선증거(先證據), 후자백(後自白)의 수순을 지키는 것이 철칙이었다. 이번 K의 억울한 옥살이는 너무나 의외의 일이며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이 사건은 수사관계자 모두에게 뼈저린 아픔과 반성의 계기가 되었다.
최근에는 서울 근교의 ○○아파트에서 어린이를 칼로 찌르고 방화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 해결을 위해 C형사과장은 직접 연구소를 찾아와 나를 만났다.
다행히 집요한 탐문수사 끝에 유력한 용의자 S군(14세)을 검거해 범행 일체를 자백받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범행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물이 확보되지 않은 것이다.
C형사과장은 즉시 용의자 S군이 범행 당시에 입고 있었던 의류(점퍼, 바지, 양말, 손목시계)와 범행현장의 모발, 그리고 범행 시 피해자의 입에 붙였던 테이프 등을 수거해 감정물로 가져왔다.
연구소에서는 즉각 이들 증거물에 대한 감정을 실시했다. 그 결과, 용의자의 의류는 이미 모두 세탁을 한 탓인지 혈흔이 검출되지 않았다. 현장의 모발은 피해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긴 머리와 그 외 길이가 짧은 머리카락이 발견되었으나, 모두 O형의 혈액형으로 판정됐다.
즉, 이 사건의 피해자나 용의자는 모두 O형으로 판정된 것이다. S군의 범행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될 수 있는 머리카락은 대부분 불에 타 모발 뿌리가 소실되어 DNA분석이 불가능했다.
C형사과장은 애를 태웠다. 자백은 했으나 증거가 될 만한 물증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와 C형사과장은 머리를 맞대고 증거 확보 방안에 대해 신중히 의견을 나누었다.
혈액형이 동일한 O형이기 때문에 감정 결과로는 용의자와 피해자 중 누구의 모발인지 식별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증거로는 현장에서 사용했던 청색테이프와 용의자의 집에서 수거한 청색테이프와의 동일성 여부, 즉 동일 회사에서 동일한 시기에 생산된 제품인지 여부의 분석과 테이프 절단면이 서로 일치하는지 등의 감정을 하기로 결론을 내린 것이다.
감정 결과로는 동일제품, 동일성분의 청색테이프로 증명되었으나 동일한 테이프로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가장 안타까운 일은 현장에서 발견된 테이프 절단면이 불에 탔기 때문에 절단면의 일치 여부를 판단할 수 없었다.
결국 자백 및 각종 정황 증거로 S군의 구속기소는 되었으나, 결정적으로 범죄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가 확보되지 않은 까닭에 유죄의 형벌을 기대할 수 없었다.
모든 범죄사건에서 증거물의 확보는 필연적으로 가장 중요한 수사과정의 하나다. 범행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의 입수는 그저 그렇게 적당히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범죄를 해결하려는 투철한 사명감과 소명의식, 그리고 뜨거운 열의와 성의가 없이는 쉽사리 얻을 수 없는 것이 범죄 증거물이다.
범죄 증거물의 확보는 사건 해결에 절대적이다. 아울러 법정에서 범행의 실증(實證)은 물론 판결의 근거로 삼는다. 즉 사건 해결의 성패여부는 증거물의 확보 및 범행을 입증할 수 있는 감정 결과에 달려있다.
사건현장은 증거물의 보물창고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증거물이 현장에 산재해 있다 하더라도 결정적인 증거물의 확보가 되지 않았거나 또한 증거물의 채취 및 수집 요령을 모르고 뛰어든다면 사건 해결에 돌이킬 수 없는 오류를 남기고 만다.
수사요원들의 협조관계
내가 국과수에 근무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뺑소니 사건이었다. 나는 연락을 받고 국과수 주차장으로 내려가 보았다. 두 대의 택시가 나란히 정차해 있었다.
담당 조사요원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 두 대의 택시는 사건 발생 시간을 전후해 사고현장을 통과한 차량이오. 그러나 이들 차량에서 육안으로 식별되는 혈흔을 발견할 수 없었소. 혈흔을 찾아주시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들 차량에서 혈흔을 찾으려면 어두운 장소로 옮겨 루미놀 시험을 실시해야 합니다. 이들 차량의 밑 부분과 타이어의 안쪽 부분을 검사할 수 있는 자동차 정비공장 등의 시설을 이용해야 합니다.”
당시만 해도 국과수 관련 연구소에는 이러한 시설이 없었다.
조사요원은 간단히 말했다.
“그냥 그 상태에서 혈흔을 찾아주시오!”
그는 택시 열쇠 두 개를 나에게 맡겨놓고 곧바로 돌아가버렸다.
나는 맡겨놓고 간 두 대의 택시에서 어떻게 혈흔을 찾아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하는 수 없이 날이 어둡기만을 기다렸다가 루미놀 시약을 만들어 차량에 분무하기 시작했다.
차량 외부는 골고루 시약을 분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차량 외부에서는 전혀 형광빛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차량 하체, 타이어 안쪽 부위 등을 검사했지만 그 부위의 검사 자체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몸을 낮추어가며 차량 밑부분과 타이어 안쪽 부분 등에 시약을 분무하는 것은 중노동에 가까웠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손이 닿는 부분 등을 거즈로 묻혀내며 혈흔을 찾는 데 몰입했다. 그러고 나서 그 채취한 부분을 실험실로 옮겨 혈흔 여부 등을 세밀하게 검사했다. 그러나 혈흔은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
전신은 땀으로 푹 젖었고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검사가 미치지 않는 차량 하체 부분 등의 미검사는 물론, 조사요원의 불성실한 감정 의뢰 태도에 불쾌감이 가시질 않았다.
그 당시 감정인으로서는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해 혈흔을 찾아보았지만 끝내 혈흔은 발견되지 않았다. 나는 혈흔 반응 음성이라는 내용의 감정서를 작성해 통보하고 차량 인수를 요청했다.
조사요원은 오랜만에 나타나 혈흔이 왜 검출되지 않는 것인지 못마땅한 태도로 차량을 인수해갔다. 기계적인 의뢰 태도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며 앞으로 이런 방법의 감정의뢰는 없어야 할 것임을 주지시켰다.
특히 교통사고에서 용의차량으로는 추정되나 혈흔이 육안으로 식별되지 않을 경우 차량 전체를 감정의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때문에 차량 전체를 검사할 수 있는 시설로 운반하거나 차량을 정비업소에서 부분 해체해서 감정을 의뢰하는 것은 너무도 일반적인 상식이다. 인명을 앗아간 사건을 처리하는 국가 공복으로서 그 책임은 누구보다 막중해야 함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 후 담당조사요원은 두어 번 나를 찾아왔다. 그는 적반하장 격으로 차량의 감정을 실시한 것이 사실인지 조서까지 받아가면서 믿을 수 없다는 태도로 나를 대했다. 나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지금은 지속적인 교통사고 관련 교육을 통해 교통사고 조사요원들은 용의차량의 의심가는 부위를 표시 또는 채취, 그리고 차량의 타이어 보닛, 흙받이 등을 떼 내어 의뢰하는 것이 상식화되었다.
연구소에도 암실 등 모든 시설을 갖추고 있어 내가 과거에 경험했던 것과 같은 의뢰인과 감정인의 갈등이 없는, 새로운 협조관계로 변화한 데 대해 큰 보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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